2013년 3월호

“KAL기 폭파사건이 조작? 범인 시신 보면 그런 말 못하죠”

퇴임 앞둔 ‘박종철 사건’ 진실폭로 주역 법의학자 황적준

  • 박은경│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3-02-22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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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고려대 법의학교실 교수 정년퇴임
    • 동아일보에 박종철 사건 진실 알렸다가 사표
    • 법의학 2대 난제는 돌연사, 사후경과시간
    • “경찰과 국과수, 하나로 합쳐야”
    “KAL기 폭파사건이 조작? 범인 시신 보면 그런 말 못하죠”

    경기도 구리시 자택에서 인터뷰 중인 황적준 교수.

    하나의 사건이 열 마디 말보다 한 인물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다. 시간을 되돌려보자. 1988년 1월 12일, 동아일보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사망사건 1주기를 앞두고 ‘치안본부장 등 경찰수뇌들 고문치사 처음부터 알았다’는 제하의 특종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내보냈다.

    오는 14일로 1주기를 맞는 고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사건 발생 다음날 밤 사체 부검을 통해 박군이 고문에 의해 숨졌다는 사실이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치안본부의 차장급 이상 고위간부들에게 정확히 보고됐으나, 이들 모두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사실을 숨기고 ‘쇼크사’로 은폐 조작하려 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 황 박사의 일기를 종합 분석한 결과, 박군 사건은 당시 사체부검 참가 의사 중 유일한 법의학 전문의로 부검집도의이기도 했던 황 박사가 경찰 고위간부의 집요한 은폐 조작 강요와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정의와 양심에 입각해서 ‘경부압박치사’ 소견을 밝힘으로써 경찰의 은폐 기도가 무너졌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박 군은 1987년 1월 14일 교내 시위 주동 혐의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를 받다가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당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 발표는 온 국민의 공분을 샀고,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인한 사망’이라는 부검의의 소견은 그해 6·10 민주항쟁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됐다.

    민주항쟁 한복판의 법의학자

    박종철 고문사망 사건의 은폐 조작에 가담할 것을 종용받은 부검집도의이자, 그 사실을 일기장에 기록했다가 훗날 동아일보를 통해 세상에 알린 이가 바로 황적준(66) 고려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다. 사건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1과장이었던 그의 일기는 다시 한 번 온 나라를 뒤흔들었고,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됐다.



    올 2월 말 정년퇴임을 앞둔 황 교수를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자택에서 만났다.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맞닥뜨린 굵직굵직한 사건 현장에 얽힌 후일담과 40년간 법의학 외길을 걸어온 삶의 궤적을 들었다.

    ▼ 박종철 사건은 평생 잊을 수 없겠습니다.

    “양심과 직업의식에 따라 배운 대로 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저를 유명인으로 만들어준 사건이죠. 결과적으로 모교인 고려대에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됐어요. 의대 시절에 법의학교실 문국진 교수님과 해부병리학교실 백승룡 교수님, 두 스승의 뜻을 거역하고 튀는 편이라 동기와 선배들로부터 ‘넌 케이스리포트 감’이란 말을 들었어요. 그런저런 일로 눈 밖에 나서 교수 발령을 못 받고 법의학연구소에서 2년간 연구조교를 하다 부산 고신대 해부병리학 교수로 갔어요.

    그러다 국과수에서 연락이 와서 미련 없이 옮겼지요. 명색이 법의학을 전공한 의사인데 부검을 못하고 있으니 답답했거든요. 국과수로 가면서 5년 후엔 반드시 모교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3년 뒤에 박종철 사건이 터졌고, 결과적으로 계획보다 1년 일찍 모교로 가게 됐습니다. 유명세를 치른 덕도 있고, 학교에서 맡은 바 일에 충실하다 직장을 나오게 된 데 대한 동정심도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저런 사람이 학교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 1년 후 동아일보에 일기장이 공개된 사정은.

    “박종철 사망 1주기를 앞두고 동아일보 사회부 정동우 기자(현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교수)가 전화를 했어요. 한번 보자고.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 나타나선 대뜸 ‘안상수 검사(전 새누리당 의원)한테 다 들었다’고 해요. 사건 당시 참고인 자격으로 서울지검에 가서 안 검사에게 부검 결과와 경찰의 은폐 조작 강요까지 다 말했기 때문에, 정 기자가 당연히 그것도 모두 듣고 온 줄 알았죠. 이것저것 묻길래 책상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기억이 가물가물한 부분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답해줬는데, 사실 정 기자는 은폐 조작 강요와 회유 사실은 모르고 있었어요.”

    “KAL기 폭파사건이 조작? 범인 시신 보면 그런 말 못하죠”

    1988년 1월 13일 황적준 교수가 동아일보에 보도된 자신의 일기장 내용에 관한 참고인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 중수부에 출두하고 있다.

    ▼ 그 노트가 일기장이었군요.

    “그렇죠. 일기장을 들추면서 1시간 반쯤 얘기를 나눴어요. 그러고는 밖으로 나간 정 기자가 20분쯤 뒤 다시 들어와 일기장을 복사해줄 수 없느냐고 해요. 내가 법의학 의사로 증거물을 다루는 사람인데, 그때는 일기장이 정말 중요한 증거란 걸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다음 날 아침에 대학병원에서 부검을 마치고 나오니까 영안실 직원이 신문을 건네줬어요. 전날 복사해준 일기장 사진이 신문에 실렸더군요. 그 순간 사색이 됐죠.”

    ▼ 국과수가 발칵 뒤집혔겠습니다.

    “입구부터 기자들이 바글바글 진을 치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댔죠. 이미 지나간 사건이라 동아일보가 그렇게 크게 다루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고, 문제가 되리란 생각은 더더욱 없었는데…. 그길로 내 방에 들어가 사표를 썼어요. 거기까지 기자들이 밀고 들어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 진실이 알려진 건데, 사표를 쓸 일인가요.

    “지워달라고 했던 실명(實名)들이 그대로 다 나왔거든요. 당사자들은 사회에서 매장될 일 아니겠어요? 일기장을 복사해줬으니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고. 조직에 누를 끼쳤다는 생각이 컸어요.”

    유전자검사 연구 매진

    ▼ 갑작스럽게 국과수를 떠나게 됐는데….

    “의대 법의학교실 조교 시절에 혈액형으로 사람이나 변시체(뜻밖의 재난·사고·자살 등으로 죽은 사람의 몸)의 신원을 밝히는 ‘개인식별’에 대해 공부했어요. 국과수 들어가고 몇 개월 뒤에 ‘네이처’지에 유전자검사에 대한 논문이 실렸는데, 그게 세계적으로 첫 번째 유전자검사 관련 논문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완전히 새로운 분야라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공부하면서 논문 내용을 이해하기까지 10개월이 걸렸어요. 그러고 나서 국과수에서 유전자검사를 하겠다고 기안을 했는데, 갑자기 그만두게 됐으니 아쉬웠죠. 1991년에야 국과수에 유전자분석실이 설치됐습니다.”

    ▼ 그후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1년쯤 놀다가 고려대에 들어갔어요. 사표 낼 때만 해도 별 어려움 없이 취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오니까 갈 데가 없더군요. 국과수, 대학, 경찰 등이 다 박종철 사건과 관련 있으니 불러주는 곳이 없었죠. 그나마 해부학 전문의 자격이 있어서 3개월간 미국에 가서 DNA를 처리할 수 있는 실험과정을 배우고 왔어요.”

    ▼ 유전자검사에 대한 미련을 못 접었군요.

    “지금은 고려대와 국과수가 협약을 맺어 우리 학교에서도 부검을 할 수 있지만, 그때는 국과수를 나오면 부검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앞으로 뭘 할까 고민했죠. DNA는 확실한 증거가 되니까, 꼭 유전자검사 연구를 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어요. 국내 수사에 DNA 검사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범행 현장에 떨어진 담배꽁초에서 A형 혈액형이 검출되면 피해자 주변의 의심 가는 인물 중 A형 사람들을 다 잡아들이는 식이었어요.”

    황 교수는 고려대 교수로 부임한 2년 뒤 법의학과에 유전자검사 교육프로그램을 정착시킨다. 1994년엔 국내 최초로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를 통해 수십 년 된 유골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무덤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했다. 한 기의 무덤을 놓고 두 가족이 서로 자신의 아버지 묘라고 주장하면서 법정공방으로 이어진 일이 있다. 인천지방법원은 황 교수에게 유골 소유권 확인 소송과 관련한 법의학적 분석을 의뢰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2년이 소요됐다.

    “무덤에서 나온 두개골을 양쪽 아버지의 사진과 비교했고, 대퇴골과 치아로 사망자의 키와 나이를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DNA를 추출해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를 했습니다. 자식은 어머니와 동일한 구조의 미토콘드리아 DNA 특성을 가집니다. 즉, 형제끼리는 같은 구조의 미토콘드리아 DNA 특성을 갖지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뼈와 이에서 DNA를 추출하는 기술도 없었어요. 미국 육군병리시험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에 소개된 유전자추출법을 이용해 DNA를 뽑아냈어요. 그걸 증폭시켜 염기서열을 분석한 뒤 유골의 진짜 가족이 누군지 최종적으로 특정할 수 있었어요.”

    내친김에 한국인 100명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한 황 교수는 그 데이터로 국내 법의학 분야 최초로 유전자분석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강경대 군 부검 못한 사연

    ▼ 문국진 교수가 국내 최초의 법의학자이고, 황 박사께선 그분의 첫 제자였습니다. 어떤 계기로 법의학을 전공하게 됐나요.

    “처음엔 신경과학 쪽을 공부하고 싶어 미국 유학을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의료계 사정이 열악해서 의대를 졸업하면 미국 의사자격시험을 보러 미국에 많이들 갈 때였어요. 미국은 의사 수가 부족해 외국인 의사를 많이 받아들였거든요. 저도 미국 의사 자격을 따고 입대했는데, 제대하고 보니 미국이 더 이상 외국인 의사를 받지 않아요. 인턴도 해야 하는데, 제대 날짜가 하루 늦춰지는 바람에 1년쯤 공백이 생겼어요. 미국행도 인턴도 못할 바엔 법의학을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 그간 국과수가 많은 발전을 한 것으로 압니다.

    “제가 국과수에 들어간 1985년엔 직원 급여수준이 아주 낮았어요. 부산 고신대에서 월 120만 원을 받다가 국과수에 과장으로 가면서 45만 원을 받았으니까. 그러니 직원들의 전문지식 수준도 낮았죠. 고졸 과장도 있었고, 심지어 수위로 일하면서 실험을 도와주다 정식 직원으로 채용된 경우도 있었어요. 첨단 전자현미경을 갖다놨는데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어 폐기처분하기도 했어요. 우리 사회의 전반적 수준이 그 정도였다고 보면 돼요. 요즘 국과수는 직원들의 학력뿐 아니라 업무능력, 연구 성과 수준이 상당히 높아요. 내 생각엔 국과수의 여건이 대학 법의학연구소들보다 나은 것 같아요.”

    “KAL기 폭파사건이 조작? 범인 시신 보면 그런 말 못하죠”


    ▼ 박종철 사건 외에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 많을 것 같습니다.

    “1987년 경기도 용인에서 발생한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을 잊을 수 없어요. 밤에 집에서 TV 속보로 사건을 접하고 국과수에 전화했더니 ‘안 그래도 연락하려 했다’고 하더라고요. 곧장 국과수 팀을 꾸려 현장으로 출발했어요. 전날 폭우로 도로 곳곳이 유실돼 다음 날 아침 8시가 돼서야 도착했어요. 32구의 시신이 공장 바닥에 죽 놓여 있는데, 참혹했죠. 여름이라 서둘러 부검했는데도 마지막 한 구는 심하게 부패돼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어요.

    법의학계의 숙원 ‘현장 출동’

    1987년 KAL 858기 폭파사건 범인 김승일을 부검한 것도 기억에 남아요. 청산가리 가스를 압축시킨 액체가 든 캡슐을 담배 필터 속에 숨겨놨다가 그걸 깨물어 자살했는데, 시신의 치아 모양과 담배꽁초의 깨문 자국이 일치했어요. KAL기 사건을 놓고 조작이니 뭐니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부검 결과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죠.”

    ▼ 1991년 시위 도중 전경들에게 맞아 사망한 강경대 군(당시 명지대 1학년) 사건도 있습니다.

    “부검 의뢰를 받고도 부검을 못한 유일한 케이스예요. 강군이 사망하자마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유가족 측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와 정부 사이에 갈등이 있었어요. 수차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부검을 위해 열흘 넘게 병원을 찾아가 대기했는데, 결국 협상이 깨져 부검을 못했죠. 엑스레이를 찍어 사인을 판별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인을 밝히려면 반드시 부검을 해야 하는데, 그걸 반대하는 의사단체나 그에 밀려 제 역할을 못하는 공권력이나…. 요즘 유럽에선 부검 대신 엑스레이를 찍어 사인을 밝히는 ‘벌톱시(virtopsy)’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어요. 일명 ‘칼 대지 않는 부검’이죠. 아이러니하게도 강경대 군 사건이 뜻하지 않게 우리나라 법의학 최초의 벌톱시 케이스가 된 셈입니다.”

    ▼ 법의학계의 숙원 중 하나가 시신이 발견됐을 때 경찰과 동시에 현장에 출동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강의할 때 빼놓지 않는 사례가 ‘양지다방 사건’이에요. 30대 후반의 여주인이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전신화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옮겨져 숨졌어요. 사건 초에 경찰은 내연남과 싸우다 여자가 석유를 끼얹고 분신한 걸로 추정해 사고사로 결론 냈어요. 그런데 부검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코 중간부터 종아리까지 화상을 입었는데, 배 부위만 화상 자국 없이 깨끗한 거예요. 흉터와의 경계선이 거의 수평으로 선명하게 구분될 정도로.

    뒤늦게 현장에 가서 탁자와 불탄 의자를 보자마자 타살을 확신했습니다. 여자가 의자에 앉아 배를 탁자에 붙인 상태에서 죽었던 거죠. 현장과 부검 소견이 딱 맞아떨어지자 결국 내연남이 고등법원에서 자백했어요. 부검에서 최종감정서가 나오기까지 두 달 반이 걸렸는데, 좀 더 일찍 현장에 갔더라면 사건 해결 시간을 줄일 수 있었겠죠.”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조사→증거물(변시체 포함) 수집→증거물 검사와 감정 순(順)으로 수사가 진행된다. 법의학 의사는 부검 과정에서 변시체에 있는 증거물만 수집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증거물 검사와 감정을 하게 된다. 황 교수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부검 과정에서 필요한 증거 채취 요구가 있으면 그때서야 경찰은 현장에서 증거 수집에 나선다. 황 교수는 “나중에 현장에 가면 현장과 증거물이 이미 훼손된 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법률가 돕는 법의학 책 집필

    “KAL기 폭파사건이 조작? 범인 시신 보면 그런 말 못하죠”
    또한 국과수는 행정안전부 산하 독립기관이라 경찰과 소속이 다르다. 두 기관이 협조할 수는 있지만, 국과수가 경찰의 영역인 사건 현장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황 교수는 “경찰의 과학수사대가 커져 밥그릇이 걸린 문제가 된 바람에 국과수에 현장을 내줄 리 만무하다”고 우려했다. 황 교수는 사건 해결을 위해 손발을 맞추려면 “국과수가 경찰 쪽으로 합쳐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부검의로 발을 디뎠을 때부터 이렇게 주장해왔다.

    ▼ 정년퇴임을 앞두고 아쉬운 점이라면.

    “수십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미안했던 게, 인체 관련 데이터를 직접 만들어낼 수 없다보니 제가 의대 시절 들었던 강의 내용이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이에요.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법의학적 실험을 할 수가 없잖아요. 제가 학생일 때 법의학 분야에서 해결되지 않은 게 3가지였어요. 개인식별, 사후경과시간, 돌연사. 이제 개인식별은 해결되고 나머지 2개가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6년 전 고려대와 국과수가 부검 협약을 맺어 휴먼샘플(인체)이 들어오게 된 덕분에 현재 우리 학교 법의학연구소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어요. 질식사와 관련한 연구 결과가 분자·세포생물학지(Mole-cules and cells)에 실리기도 했지요. 계속해서 여러 실험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그걸 다 못 보고 떠나게 돼 아쉬워요.”

    고려대는 황 교수의 명예교수 선정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 결과로 황 교수가 학교에 남게 된다면 지금까지 해오던 연구를 계속 진행할 생각이라고 한다. 이와 더불어 그는 평생을 바쳐온 법의학 분야에서 또다른 결실을 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부검감정서와 사건 관련 기록들, 사진과 영상 자료 등을 토대로 법률가를 위한 법의학 책을 쓰는 것이다. 도전정신과 열정 없이 버티기 어려웠던 국내 법의학 분야의 개척사와 함께해온 황 교수는 스스로를 ‘행복한 법의학 의사’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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