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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동서양의 접점 |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천존(天尊)은 한 처녀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였다”

중국화한 기독교 경교(景敎)

  • 최진묵|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cjm813@snu.ac.kr

“천존(天尊)은 한 처녀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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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년(당 태종 정관 9년) 아라본(阿羅本·알로펜(Alopen), 아브라함(Abra-ham, Yahb-Alaha), rabban(修士) 등으로 이해) 일행이 성경을 중국에 가지고 와 방현령(房玄齡) 등 중국 고위관료의 영접을 받았다. 638년엔 정식으로 포교를 승인받고, 781년 앞서 언급한 경교비가 건립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845년 7월부터 약 8개월간 진행된 폐불(廢佛)정책 이후 점차 쇠퇴했다. 동부 시리아교회는 페르시아는 물론 아랍, 인도, 몽골 등 중앙아시아까지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중국에도 그런 과정에서 유입된 것이 분명했다.

중국 경교는 전체 동부 시리아교회의 위상 속에서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던 것 같다. 경교비에 등장하는 대주교(大主敎·Bishop)란 칭호는 대공목수(Patri areh) 아래 총감독(總監督 ·Papas)을 보좌하는 지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교단본부에서 중국 교회에 대한 연락과 통제도 원활하지 못했던 듯하다. 비문에 기록된 대공교수 합남영서(哈南寧恕)라는 인물은 하난 이쇼(Hanan Isho) 2세를 말하는데, 그는 비가 건립되기 전인 780년(혹은 778년) 사망했다. 비가 건립된 781년에는 디모데(Timothy) 1세가 동부 시리아교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 비문은 본부교단의 직접적 통제를 덜 받는 중국 경교가 중국에 토착화해 있던 불교를 모방해 현지 문화를 적극 차용하는 정책을 채택했음을 보여준다. 이념과 교리를 설명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았을 테니 중국에 존재하던 다른 종교 용어나 술어를 차용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비문에 불교용어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경교의 교당은 ‘사(寺)’로, 경교 사제는 ‘승(僧)’으로 표현했다. 공유(空有), 법(法), 법계(法界), 공덕(功德), 광자(廣慈), 시주(施主), 법당(法堂), 대덕(大德) 등 불교 용어의 차용 사례는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무위(無爲), 원풍(元風), 조화(造化), 진주(眞主), 진현(眞玄) 등 도교(道敎) 기풍이 보이는 용어도 적지 않다.



충효 관념을 포함한 유교적 내용도 빠지지 않는다. 1780여 자의 비문 글자 가운데 유교의 5경을 인용한 곳이 80군데가 넘는다. 비문 상단의 도안이 불교와 도교의 혼합물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돈황에서 발견된 경교 한문 자료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로는 ‘서청미시소경’ ‘일신론’ ‘선원본경(宣元本經)’ ‘대성통진귀법찬(大聖通眞歸法贊)’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 ‘삼위몽도찬(三威蒙度贊)’ ‘존경(尊經)’ 등이 있는데, 여기에도 천존(天尊), 제불, 아라한(阿羅漢), 중생, 사색(四色), 정토, 무량, 해탈, 석자(釋子), 선연(善緣), 자은(慈恩), 패엽(貝葉) 등 불교 용어가 무수히 등장한다.

‘천존’은 도교의 삼청(三淸)에 나오는 원시천존(元始天尊), 영보천존(靈寶天尊), 도덕천존(道德天尊)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천존은 ‘하늘에 있는 가장 존귀한 자’로 이해할 수도 있으니 기독교 교리와도 상당히 부합한다. 조화(造化)는 도교의 ‘무(無)’ 개념과 무관하다. 조화를 의식적이고 인간적인 작업이 아닌, 세상의 어떤 질서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창조과정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한자어일 수 있다. 경전 번역자는 중의적인 면을 고려해 번역했을 것이다.

불교와 도교, 유교 용어도 차용

경전에는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내용도 있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본다면 현존 성서와 흡사한 곳도 적지 않다. 예컨대 일신론의 ‘세존포시론(世尊布施論)’엔 예수의 산상설교 일부분이 들어 있다. 선원본경에는 창세기 1장과 흡사한 구절이 있다. 삼위몽도찬은 찬송가의 의미를 갖는데 ‘삼위’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경교가 기독교적 본질을 상당 부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름만 전해지는 경교비의 저자 경정이 번역했다는 30부의 번역서 중에는 성경과 상응하는 것도 10여 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혼원경(混元經)은 창세기, 모세법왕경(牟世法王經)은 모세오경, 다혜성왕경(多惠聖王經)은 시편 등 구약성서를 옮긴 것이다. 아사구리용경(阿思瞿利容經)에서 ‘사(思)’자를 ‘은(恩)’자의 오자로 본다면 이는 4복음서인 것 같다. 계진경(啓眞經)은 계시록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번역한 양이 많지 않고 시리아 출신 전도사였던 경정의 한문 수준, 이질적인 문화환경 속에서 전도해야 했던 현실, 형이상학적인 관념에 관심이 별로 없던 중국의 문화풍토 등이 성서식 용어로 번역할 수 없게 했을 것이다. 이 번역은 기독교 교리대로 성령의 감응으로 번역됐다고 보기 어렵다.

민간 사회로 전파

2006년 5월 중국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낙양(洛陽)에서 경교 경전의 내용을 담은 경당(經幢)이 발견됐다. 경당은 다각형으로 깎은 돌에 경전을 써 넣은 돌기둥이다. 경당은 탑과 함께 불교 사찰에서 많이 짓는다. 낙양의 경당은 경교 연구에 새 돌파구를 열었다. 이 경당은 814년 제작됐으니 그 시기 경교는 장안을 넘어 낙양 등지까지 유행한 것이다. 교리가 민간 사회에 전파됐음을 알려주는 실마리였다.

경당에는 대진경교선원지본경 1부와 경당기(經幢記) 1부가 포함돼 있다. 선원본경은 이미 돈황에서 발견된 적이 있으므로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이 경당의 발견으로 ‘지(至)’자의 추가와 몇 개 글자의 탈루 등이 확인돼 이전 자료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경당 역시 불교를 모방한 흔적이 뚜렷해 경교비의 이미지를 바꾸지는 못했다.

장안의 초기 경교도들이 페르시아나 시리아에서 파견된 교단의 특별한 인물들이었다면, 낙양의 경교도들은 소그드 상인 계통으로 자기네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한화(漢化)한 호인(胡人)들이었다. 낙양의 경교에선 개인적이라기보다는 가족 단위 신앙의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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