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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기록으로서의 퍼즐 사용법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소설, 기록으로서의 퍼즐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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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에서 페렉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사물들’(1965) 출간 이후 10년 여 뒤 발표된 ‘인생사용법’(1978)은 인간의 삶을 둘러싼 사물들을 각각의 시공간 속에서 벼려내어 조각조각 페렉식으로 창조하고 재구성한 방대한 퍼즐 작품이다.

계단은, 각 층마다 얽혀 있는 하나의 추억을, 하나의 감동을, 이제는 낡고 감지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그러나 그의 기억의 희미한 빛 속 어디에선가 고동치고 있는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즉 어떤 몸짓, 어떤 향기, 어떤 소리, 어떤 번쩍임,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오페라 곡을 노래하던 어떤 젊은 여인, 서투른 솜씨로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 크레졸의 고약한 냄새, (…) 실크나 모피가 스치는 소리, 문 뒤에서 나던 고양이의 애처로운 울음소리, 칸막이벽을 두드리는 소리, (…) 혹은 7층 오른쪽 아파트에서 가스파르 윙클레의 크랭크톱이 내던 지겨운 윙윙 소리, 그 소리에 답하는 듯한 세 층 아래 4층 왼쪽 아파트의 늘 한결같던 참을 수 없는 침묵을.

-조르주 페렉 ‘인생사용법’(김호영 옮김, 문학동네) 중에서

‘인생사용법’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공간들을 세밀하게 분류하고 중첩시키고 있다. 이는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울리포(OuLiPo)라는 당시 문학실험 전위그룹의 핵심이었던 페렉의 서사적 실험의 총화인 셈이다. 그리고 이 총화의 형상은 퍼즐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완성된 퍼즐은 시몽크뤼벨리에 거리 11번지 아파트의 입주자들에 대한 99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렉의 ‘사물들’과 ‘인생사용법’을 읽은 독자라면, 그들과 함께 파리에 오래 산 것처럼 거리와 골목, 계단과 문, 벽과 천장, 창문과 창문 밖 풍경까지 세밀하게 알고 있는 듯한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정원에 면한 천장이 낮은, 작고 아담한 아파에 살고 있었다. 냄새에 찌든 데다 어두침침하며 좁고 후끈거리는 복도에 있던 코딱지만한 옛집을 떠올리면, 새소리로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지금이 처음에는 황홀할 정도로 행복했다. 창을 열고 한참 동안 행복에 겨워 정원을 바라보고는 했다. (…)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풀들이 무성하고 화분들과 풀숲, 소박한 조각상까지 갖춘 모양이 제각각인 아담한 다섯 개의 정원과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난 다양한 모양의 큼직한 돌이 깔린 산책로는 마치 시골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느 가을날, 비라도 내리고 나면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낙엽 냄새, 두엄, 진한 숲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파리의 몇 안 되는 곳이었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중에서

이렇듯 공간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보인 페렉은 파리의 장소들을 기록하는 ‘서기(書記)로서의 소설가’를 자처하고, 소설뿐 아니라 영상으로 파리의 곳곳을 기록하는 영화 제작에도 관여하기에 이른다. 45세에 요절하기까지, 그가 기획한 마지막 프로젝트(‘장소들 Lieux’)는 12년에 걸쳐 파리의 열두 곳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는 왜 파리의 서기를 자처하며 장소들의 뿌리를 뽑듯이 낱낱이 기록하려고 했던 것일까.

서기(書記)로서의 소설가

나에게는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없다. (…) 불확실한 내 기억을 되살려내기 위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이라곤 빛바랜 사진, 몇몇 증언과 보잘것없는 서류 조각뿐이기 때문에 나에게 남은 선택은 아주 오래도록 내가 치유 불가능한 것이라 이름 지은 것들을 환기시키는 일이다. 과거의 것, 아마도 현재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있어야만 하는 과거의 것들.

-조르주 페렉 ‘W 또는 유년의 기억’(이재룡 옮김, 웅진펭귄클래식코리아) 중에서

파리에 도착해 두 달 가까이 체류하는 동안 책상에서든 거리에서든 페렉의 소설들을 끼고 살다가, 마침내 20구 빌랭 거리를 찾아갔다. 파리시의 거리기록 자료에는 언뜻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 200m의 포석이 깔린 거리’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정작 가보니 채 100m가 되지 않았고 포석은 거리와 이어진 벨빌 공원의 산책로에 깔려 있었다. 이 장소는 폴란드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네 살에 전쟁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여섯 살에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어머니를 잃은 페렉이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W 또는 유년의 기억’이라는 그의 자전소설의 무대이기도 하다. 페렉은 이 거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기록할 생각을 했고, 그것을 소설과 영상으로 남겼다.

페렉의 소설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나는 1996년에야 출간된 초역판 ‘사물들’과 2000년 출간된 초역판 ‘인생사용법’을 소장하고 있다. 당시 그의 소설실험을 수용하기에 한국 소설독서계는 이념 아니면 오락 쪽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재출간된 페렉의 소설들은 균형잡힌 독자들의 서가에 오롯이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신동아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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