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호

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바이킹 해적

  •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 sukkyoon2004@hanmail.net

    입력2014-02-19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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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칸디나비아에서 활동하던 바이킹은 약탈자이자 모험가였다. 뛰어난 항해술로 바다를 장악한 이들은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 등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을 약탈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끝내는 잉글랜드를 정복해 노르망디 왕조시대를 열었다.
    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바이킹 선.

    북아프리카의 사라센 해적이 지중해 연안에서 해적질을 일삼을 때 유럽에서는 바이킹 해적이 영국과 유럽 대륙의 해안지방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바이킹(Viking)은 ‘골짜기 강에서 온 사람들’을 뜻한다고 한다. 아마 이 말은 ‘피오르드(Fiord)’라 불리는 빙하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많은 협곡과 구불구불한 해안지형을 가진 스칸디나비아의 지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후 바이킹이라는 용어는 80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침략·무역·식민정책의 시대를 살았던 본국과 해외의 모든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지역의 스칸디나비아인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바이킹은 원래 외국과의 교역을 활발하게 진행한 정상적인 무역집단이었다. 본격적인 해적질에 나서기 전인 1세기경부터는 로마인과 무역을 했고 5세기에 이르러서는 번성하던 스칸디나비아 무역도시로 외국 상인을 맞아들여 활발하게 교역했다. 바이킹은 외국과 무역을 하면서 잘사는 다른 나라의 실상을 알게 됐고 침략과 약탈의 꿈을 키우게 됐다. 바이킹은 먼저 영국과 유럽의 수도원과 해안지역 등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며 수도자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잡아갔다. 이후 바이킹은 피를 좋아하는 무자비한 약탈자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바이킹이 정상적인 무역활동을 버리고 해적질에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스칸디나비아의 척박한 자연환경이 제일 큰 요인이었다. 북유럽의 추운 날씨와 척박한 토양 탓에 수렵과 어업 외에는 별다른 것을 할 수 없어 생계를 잇는 것조차 힘겨웠다. 교역을 하면서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땅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바다로의 진출은 이러한 욕망을 자극하는 당연한 돌파구였을 것이다.

    뛰어난 항해술

    한편 스칸디나비아는 엄격한 장남 상속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차남, 삼남들은 바다에 나가 약탈을 하든지 무역을 하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 본국의 정치적 불안도 바이킹의 해외 진출을 이끈 한 요인이었다. 9세기 후반 노르웨이의 금발왕 하랄이 작은 왕국으로 흩어진 노르웨이를 통합하면서 복속한 지역의 수장들을 무력으로 제거하려 하자 수장들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해외로 피신하면서 모험에 나서게 된 것도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험난한 항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먼바다로 진출했던 타고난 탐험 정신과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생존하면서 만들어진 강인한 기질, 약탈의 피가 바이킹을 만들었다.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사였다. 능란한 항해술을 가진 바이킹은 가능한 한 해안을 끼고 항해하며 낯익은 지형지물을 이용했다. 원시적인 위치확인 도구를 가졌지만 태양과 별의 위치, 바람의 방향, 파도의 모양, 물의 색깔과 온도, 해조와 바다 포유류의 존재 등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바이킹 사공들은 최고 시속 28㎞의 엄청난 속력으로 오랜 시간 항해할 수 있었고 대양뿐 아니라 강에서도 활약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항해술이 무사히 고국으로 데려다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바다 건너 미지의 대양으로 진출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이킹이 항해사에 기여한 특별한 공헌은 ‘Tack’이라는 항법을 개발한 것이다. 그들은 비스듬히 옆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 돛의 면을 좌우로 정교하게 바꾸어 바람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45도 이하의 지그재그 코스를 취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항법을 고안했다. 이 항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원시적이라도 일정한 의장과 키를 갖춰놓을 필요가 있었다. 바람을 맞고 나아가는 오늘날 요트의 항법을 바이킹이 처음 개발한 것이다.

    끝없는 항해

    바이킹이 활용한 항해 보조도구 중엔 태양의 방향을 알려주는 ‘태양석(Sun Stone)’이 있었다. 유럽의 북극 가까운 바다에는 무거운 바다안개나 비, 짙은 구름이 하늘을 자주 뒤덮어 태양이나 별자리를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날이면 바이킹은 섬광석(閃光石)이라는 광물로 만들어진 태양석을 이용해 태양의 방향을 알아냈다. 섬광석은 유리처럼 광택이 나는 투명한 광물로서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태양이 있는 쪽을 향하면 색깔이 바뀌는 성질을 활용했다.

    또한 바이킹은 ‘위도항해(Latitude Sailing)’라는 항법을 사용했다. 위도항해란 목표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그 목표지점과 동일한 고도를 따라 항해하는 것이다. 해상에서 정확한 위도를 유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이킹은 눈금을 새긴 긴 막대를 이용했다. 막대기가 갑판에 드리우는 그림자의 길이를 기록해서 그림자가 이전보다 길거나 짧으면 그림자가 원래 길이가 될 때까지 경로를 틀었다. 밤에는 북극성을 따라 키를 돌리면 계속 북서 방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들은 북극성의 자리를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선박과 북극성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경로를 바꿨다.

    바이킹은 단순한 약탈자가 아니라 모험심 넘치는 탐험가들이기도 했다. 뛰어난 항해술을 이용해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세계의 끝을 넘어서까지 항해했다. 북대서양을 가로질러 오늘날 캐나다의 래브라도,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까지 항해했다.

    바이킹 선의 갑판은 사방이 트여 있어서 거친 파도나 악천후 시 파도와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됐다. 바이킹은 모피와 기름 바른 가죽옷을 입고 있었지만 늘 차갑고 축축한 상태로 있을 때가 많았다. 육지 가까이 정박할 때는 상륙해 텐트 속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나 먼바다를 항해할 때는 이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갑판에 펼쳐놓은 2인용 동물가죽 침낭에서 잤다. 이런 경우 끼니는 말려서 소금에 절인 물고기나 육포로 해결했다.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사였지만 거친 바다의 위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존재였다. 많은 바이킹이 항해 도중 험난한 파도에 배가 난파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추위와 습기로 죽었다.

    그러나 험난한 바다의 조건이 바이킹의 모험과 대양으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생존을 위해 좋은 전리품을 약탈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으며 피를 흘리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다에서 살았다’는 바이킹의 생활에 대한 기록처럼 그들에게는 바다에서의 생존본능과 약탈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었다.

    가볍고 빠른 바이킹 선

    먼바다로 해적질을 하러 가기 위해서는 장거리 항해에 적합한 배를 만들고 운항하는 기술의 습득이 필요했다. 바이킹은 이미 오래전부터 돛이 없는 배를 만들어 계곡 사이의 피오르드를 타고 다녔으며 날씨가 좋은 때에는 먼바다로 항해하기도 했다.

    바이킹은 2000년 동안 가볍고 빠른 배를 만들어온 전통이 있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바이킹은 속도를 내기 위한 돛, 단단한 돛대, 바다에서 안정감을 주는 용골을 추가했다. ‘롱십 (Longship)’이라 불리는 바이킹 선은 날렵하고도 빨라서 먼바다 항해에 적합했다. 그뿐 아니라 해안에 용이하게 접급했으며 노를 저으면 내륙의 얕은 강물에서도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었다.

    바이킹 선 중 가장 덩치가 큰 것을 ‘드레카르(Drekar)’, 또는 선수의 용머리 장식을 따서 ‘용수선(龍首船)’이라 했는데 주로 침략과 전투에 나가는 바이킹을 실어 나르는 데 쓰였다. 바이킹 선은 바이킹에게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수단이었으며 먼바다와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약탈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선박을 건조할 때는 책임자가 각 분야의 전문 조선공을 거느리고 작업을 했다. 용골과 널빤지로 쓰이는 목재로는 곧고 기다란 참나무를 사용했고 휘어진 곳에 들어가는 목재로는 다른 나무들을 썼다. 배가 다 만들어지면 측면에는 둥근 방패를 붙이고 뱃머리에는 용머리 모양의 장식을 더했다.

    바이킹 선의 돛은 커다란 정사각형의 양털 천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엄청난 추진력을 제공했다. 그렇지만 거센 바람을 맞거나 풍랑에 젖으면 조종하기가 쉽지 않았다. 선원들은 그들의 돛대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고 돛에다 빗금이나 다이아몬드 장식을 그려 넣기도 했다.

    잉글랜드 약탈

    800~1100년은 바이킹이 미지의 세상을 향해 탐험을 본격화한 시기다. 다른 의미로는, 바로 이 시기에 바이킹의 해외 진출을 통한 해적질이 가장 활발했다.

    바이킹이 처음으로 기독교 성소를 공격한 것은 793년 1월 8일. 잉글랜드 동쪽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린디스판 섬의 수도원이었다. 바이킹은 교회에 침입해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했다. 수도자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노예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납치해 갔다. 저항하는 수도자들은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이후 바이킹의 브리튼 제도와 유럽 대륙 해안지역에 대한 침략과 무자비한 약탈, 살육은 계속됐다.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고 수도사를 학살하는 바이킹은 기독교도들에겐 곧 악마의 화신이었다. 바이킹의 목적은 오로지 약탈이었다. 이교도인 바이킹은 기독교의 성소가 어떻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바이킹에게 교회나 수도원은 무력 저항이 없고 황금으로 된 십자가 등 약탈할 보물과 끌고 갈 사람이 많은 약탈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877년 덴마크 바이킹은 잉글랜드 본토를 침공해 국토의 절반에 해당하는 서부와 동부 지역을 지배하게 됐다. 이 지역을 ‘데인로(Danelaw)’라 불렀는데 이는 ‘바이킹의 법과 관습의 지배를 받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후 잉글랜드는 데인로를 되찾았지만 이미 바이킹과 현지의 앵글로색슨 사이의 문화가 융합돼 정체성과 차별성이 많이 흐려진 다음이었다. 수 세대가 지나면서 양쪽 세력 모두 ‘잉글랜드인’으로 여기게 됐다.

    바이킹의 주된 약탈 대상은 풍요롭고 비옥한 잉글랜드였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아일랜드 또한 매력적인 약탈 대상이었다. 아일랜드의 교회와 사원들은 약탈할 물건이 풍부한 저장고였고 풍요로운 초원을 가진, 정착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9세기 중반 바이킹은 아일랜드의 리머릭·워트퍼드·웩스퍼드·코크·아크로의 해안에 정착지를 구축했다. 처음에 바이킹은 이런 근거지를 섀넌 강과 같은 아일랜드의 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 재빨리 약탈하고 달아나기 위한 겨울나기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해안 정착지들은 영구 정착을 위한 출발점이자 내륙 더 깊숙이 들어가 약탈하기 위한 거점이 됐다. 950년을 전후로 바이킹이 해적질 대신 정착을 택하면서 사실상 바이킹의 공격은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1014년 4월 23일 벌어진 ‘클론타프 전투’에서 바이킹이 아일랜드군에 패배함으로써 아일랜드에서 바이킹의 지배가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바이킹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그들이 세운 도시·무역·남긴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바이킹 해적이 활약할 당시의 북유럽 지도.

    러시아 진출

    세월이 흘러가면서 바이킹의 습격은 더 과감해지고 그들 세력 또한 내륙 깊숙이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800년대 초가 되면서 바이킹은 얕은 물에서도 항해가 가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지역으로 진출했다. 일부는 발트 해를 건너 러시아 대륙으로까지 들어갔다. 이들은 발트 해 가까운 내륙에 무역기지를 세우고 드네프로 강을 타고 흑해로 가거나 볼가 강을 타고 카스피 해에 이르렀다. 발트 해를 건너온 다음 중부 러시아의 두 강을 타려면 내륙의 먼 길을 걸어가야 했다.

    이때 이들이 내륙으로 가져갔던 배는 전통적인 바이킹 선보다 아주 작은 것이었다. ‘통나무배(Dugout)’라고 알려진 이 배는 하나의 통나무에서 속을 파내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순풍일 때는 노의 힘을 좋게 하기 위해 작은 돛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배의 가장 큰 장점은 무게가 가볍다는 것이었다. 급류를 만나거나 배를 띄울 수 없는 얕은 강을 만나면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항해가 가능한 곳까지 운반하기도 했다.

    바이킹은 러시아 대륙의 곳곳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들 ‘슬라브(Slav)’라 불리는 러시아 출신의 노예는 스웨덴에서 거래됐다. 슬라브 노예에서 노예와 노예제를 뜻하는 영어 단어 ‘slave’와 ‘slavery’가 유래했다. 이로써 당시 노예로 잡힌 러시아인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흑해로 진출한 스웨덴인 바이킹 ‘루스’(슬라브는 스웨덴인 바이킹을 루스라 불렀다)는 콘스탄티노플을 여러 번 무력으로 점령하려 했다. 비잔틴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907년 수만 명의 루스가 흑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비잔틴 황제는 바이킹에게 조공과 무역권을 주겠다며 강화를 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루스는 몇 년 뒤 재차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 등 비잔틴 수도원과 마을을 약탈했다. 루스는 그 땅에 ‘러시아’ 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비잔틴 제국뿐 아니라 아랍 세계와도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바이킹의 포악성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도 어쩌지 못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러한 용맹성과 포악성으로 스웨덴 바이킹 중 일부는 비잔틴 황제의 근위대로 선발돼 황궁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는 것이다.

    파리 침공

    바이킹은 본격적으로 유럽 대륙으로 진출하면서 먼저 프랑크 왕국의 파리를 침공했다. 885년 11월 24일 노르만 바이킹은 700여 척의 바이킹 선에 바이킹 전사 4만 명을 싣고 센 강을 거슬러 파리로 올라왔다. 센 강 하류 20리 지점까지 길게 뻗친 바이킹 선 행렬 때문에 강물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바이킹의 목적은 파리를 거쳐 비옥한 내륙지역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바이킹에게는 당시 센 강변의 작은 도시이던 파리보다 내륙 깊숙한 곳의 비옥한 땅이 더 매력적이었다. 센 강을 따라 올라가려던 계획은 파리에서 센 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다리에 의해 가로막혔다. 성탑으로 요새화 한 두 다리를 파괴해야만 배가 지나갈 수 있었다.

    프랑크 왕국의 군사들과 파리 시민들은 노르만 바이킹에 맞서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강력히 저항했다. 그러나 2월초 쏟아진 폭우에 두 개의 다리 중 하나가 유실되고 말았다. 바이킹은 그 틈을 이용해 다리가 있던 지역을 신속하게 통과해 내륙으로 올라갔다. 나머지 바이킹은 뒤에 남아 파리를 계속 옥죄었다. 포위가 1년쯤 계속되자 파리 시민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이 무렵 ‘비만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황제 샤를 3세가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전투 한 번 벌이지도 않고 협상을 하고 말았다. 바이킹에게 내륙 통행을 허가하는 대신 한겨울에만 내륙지방을 약탈하고 그다음 해에는 물러간다는 조건이었다. 또한 전별금으로 은 700파운드를 약속했다. 바이킹은 내륙에서 약탈한 전리품과 전별금까지 챙겨 센 강에서 해안 쪽으로 유유히 철수했다.

    이후에도 노르만 바이킹의 침략에 시달리던 샤를 3세는 911년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바이킹이 침략한 지역을 아예 봉토로 떼어주고 대신 충성서약을 받는 방식을 택했다. 바이킹도 약탈하던 지역을 자기 땅으로 만들었으니 달리 불만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북부에서 영국해협을 접하며 자리 잡은 나라가 ‘노르망디(Normandy) 공국’이다. 이후 영국에 노르망디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두 나라 간 복잡한 소유권 분쟁의 씨앗이 됐으며 수백 년 뒤 ‘백년전쟁(Hundred Years′War·1337∼1453)’의 시발점이 됐다.

    유럽 정착

    바이킹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대륙 전역에서 죽음과 파괴의 공포를 불러왔다. 844년에는 스페인의 카디스(Cadiz) 항을 공격했다. 이탈리아 반도까지 진출해서 발레아레스 제도를 공격하고 북아프리카를 침범하려고 지중해까지 가로질렀다. 약탈만 하고 물러간 것이 아니라 일부는 아예 침략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도 했다.

    바이킹은 정착한 곳의 문화·종교·언어를 받아들여 그곳의 생활에 동화됐다. 실제로 파리를 침략했던 노르만 바이킹의 일부는 센 강 하류지역에 정착해 프랑스 풍습과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노르만족은 ‘노르망(노르망디인)’으로 변신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노르망디에 정착한 뒤에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은 프랑스 여자와 결혼했고 기독교로 개종하고 프랑스어를 쓰며 현지의 풍습을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사실은 잉글랜드로 진출한 데인족 바이킹은 깔끔한 영국인 아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토요일마다 목욕을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옷을 빨아 입었다. 한발 더 나아가 일부 바이킹은 신성함을 정결함과 동일시했다.

    유럽 문화에 스며든 바이킹 유산의 하나는 뷔페다. 바이킹은 전투에서 이기거나 약탈에 성공한 경우 축하연을 열면서 널빤지에 여러 음식을 차려놓고 먹는 습관이 있었다. 이러한 바이킹의 음식 문화는 프랑스까지 퍼졌고 후에 뷔페 음식으로 발전됐다.

    1000년에 이르러 노르만인은 더는 광포하고 용맹한 바이킹 전사가 아니었다. 기독교가 스칸디나비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관습이나 예식도 서서히 유럽인을 닮아갔다. 2세기에 걸친 해외 이주와 정치적 통합 작업의 결과로 바이킹의 본고장에서도 해외로 목숨을 건 해적질을 나가겠다는 젊은이가 점차 줄어들었다.

    노르망디에 정착한 노르망은 그곳을 기반으로 해 남부 이탈리아로 진출한다. 비잔틴 제국과 사라센의 지배를 받던 남부 이탈리아에 진출해 이들의 지배를 벗어나고 싶어 하던 현지인들과 합세해 비잔틴 세력을 몰아내는 일에 착수했다. 1017년 남부 이탈리아로 진출한 후 2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남부 이탈리아를 제패했다.

    1039년 노르망은 곧바로 메시나 해협을 건너 사라센이 지배하던 시칠리아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시라쿠사를 공격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과 시칠리아의 사라센이 연합해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시칠리아 공략은 쉽지 않았다. 또한 사라센 해적이 다시 활개를 치는 남부 이탈리아의 사정 때문에 시칠리아 공략은 일단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시칠리아 제패를 위한 작업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진행되다 1086년 시라쿠사가 노르망에 의해 함락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잉글랜드 정복

    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잉글랜드 왕국을 세운 알프레드 대왕.

    여러 바이킹 국가의 지도자들이 통치권을 장악하고 국가의 경계가 뚜렷하게 결정되면서 노르만 통치자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1066년 노르망의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재위 1066∼1087)’에 의한 잉글랜드 정복이었다. 윌리엄은 노르망디 바이킹들을 이끌고 잉글랜드 해협을 건너와 당시의 왕인 해럴드 고드윈슨을 죽이고 영국의 왕이 됐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잉글랜드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잠깐 살펴보자. 기원전 54, 53년 두 번에 걸친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정벌 이래 410년 로마군이 철수할 때까지 브리타니아는 오랫동안 로마의 속주로 남아 있었다. 5세기 초반부터 9세까지 이어진 두 차례의 게르만 민족대이동 과정에서 독일 북부에서 건너온 앵글로(Anglo)족과 색슨(Saxon)족, 유트(Jutes) 족에 의해 브리타니아에는 여러 왕국이 건설됐다. 잉글랜드는 대륙과는 단절된 상태였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발전이 시작됐다. 당시 앵글로족과 색슨족이 세운 나라들은 왕국이라기보다는 부족국가에 가까웠다.

    서서히 진행되던 잉글랜드의 발전에 박차를 가한 인물이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재위 872∼899)이었다. 그는 데인족 바이킹과 맞서 싸움을 벌이는 대신 돈을 주고 평화를 얻는 방식을 택했다. 데인족은 알프레드가 통치하는 웨식스(Wessex)는 놔두고 다른 지역을 침략했다. 그러자 다른 왕국들은 몰락했고 웨식스는 상대적으로 번성했다. 알프레드는 데인족과 장기적인 평화를 추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앞에서 보았던 데인족의 자치구역인 데인로다.

    왕국의 안전을 확보한 알프레드는 자신의 왕국을 ‘잉글랜드’로 이름 지었다. 100년 이상 그런대로 유지되던 평화를 깬 쪽은 잉글랜드였다. 1002년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는 잉글랜드 내의 데인족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은 다음해 덴마크의 대대적인 공격을 불러일으켰고 잉글랜드는 아직 덴마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10여 년의 전쟁을 벌인 끝에 1016년 스칸디나비아 국왕의 동생 크누드(Knud)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위에 올라 20년 가까이 지배했다. 크누드가 죽자 알프레드 왕계의 에드워드가 왕으로 선출됐다. 에드워드는 그의 외사촌 동생이자 노르망디의 왕인 ‘정복왕 윌리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밀약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웨식스의 해럴드 고드윈이 왕위에 올랐다.

    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김석균

    1965년 경남 하동 출생

    한양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 대학원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 행정학 석사, 한양대 행정학 박사, 미국 듀크대 visiting scholar

    37회 행정고시

    남해지방해양경찰청장, 해양경찰청 기획조정관, 해양경찰청 차장

    2013년 3월~제13대 해양경찰청장


    그러자 왕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윌리엄은 7000여 명의 강력한 보병과 수백 명의 궁수 및 기병으로 이루어진 노르망 전사들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1066년 10월 14일 벌어진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에서 잉글랜드 왕 해럴드를 죽이고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정복왕 윌리엄은 해럴드를 앵글로색슨 계열의 마지막 왕으로 만들고 새로이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영국 왕조는 모두 윌리엄의 혈통이다. 즉 대륙에서 건너온 덴마크 바이킹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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