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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북쪽, 진보는 서남쪽 무당파는 동쪽

종묘광장공원 이념지도

  • 이현용 │고려대 경영학부 4학년 leehy0906@korea.ac.kr 하지연 │고려대 미디어학부 2학년 jydgha@daum.net

보수는 북쪽, 진보는 서남쪽 무당파는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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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보수·진보 서로 얼씬 못해
  • ● 무당파 구역엔 박카스아줌마·윷놀이도박·장기전쟁
  • ● 우리 사회 이념 갈등과 노령화 문제 압축
서울 종로의 종묘광장공원은 노인 세상이다. 종로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이 공원 입구에서부터 많은 노인이 무리 지어 앉아 있거나 서성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청·장년층은 아무래도 ‘거대한 노인정’이 된 이 공원 안으로 들어가기 주저한다. 그래서 ‘박카스 아줌마’ 같은 특별한 내용이 아니면 이 공원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른다. 최근 필자들은 이 공원을 여러 번 찾아 노인들을 취재했다. 그 결과, 이 공원이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 상인들에 따르면 하루 평균 2000여 명의 노인이 이 공원을 찾는다. 65세 이상 노인이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된 후, 5호선 3호선 1호선 3개 지하철 노선이 만나는 종로3가역 인근 이 공원이 서울·수도권 노인들의 ‘허브(hub)’가 됐다. 노인들 처지에서, 이공원에 오면 비슷한 연령대의 여러 노인을 만날 수 있어 적적하지 않고 공원 서편으로 2000원짜리 국밥집이 즐비해 끼니를 해결하기도 수월하다. 또 무료급식 같은 무상서비스도 생겨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또 다른 ‘노인의 안식처’인 탑골공원도 산책 삼아 갈만한 거리에 있다.

종묘광장공원 안에서 노인들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있는데, 이들의 말에 따르면 공원 내엔 암묵적인 경계가 설정돼 있다. 공원 북쪽은 보수 성향 노인이 주로 모이고, 남서쪽은 진보 성향 노인이, 동쪽은 여가활동을 즐기려는 무당파 노인이 주로 모인다. 공간적으로 뚜렷이 구분돼 있어 편의상 보수 구역, 진보 구역, 무당파 구역으로 부를 수 있을 듯했다.

서울·수도권 노인들의 허브

보수는 북쪽, 진보는 서남쪽 무당파는 동쪽

종묘광장공원 이념 지도.

보수 구역에선 정치 이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노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5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무슨 내용인지 들릴 정도로 이들은 격양돼 있었다. 필자가 ‘김용판 무죄 판결 사건’(2012년 대선 당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이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수사를 축소 은폐한 혐의로 기소돼 최근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에 대해 이들 노인에게 입을 뗐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나왔다.



“젊은이들이 정치를 아느냐?”

“판결도 못 믿겠다니 민주당 사람들 정말 큰일이다.”

“세상이 온통 빨개지고 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 듣는 처지에선 정신이 약간 어질했다. 보수 구역의 어르신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이모(84) 씨는 자신의 국가유공자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하루 일과를 말했다.

이씨는 오전 11시쯤 공원에 도착한다고 한다. 평소 알고 지낸 노인들과 자연스럽게 시사 이슈를 놓고 대화한다. ‘국정원 댓글’ ‘특검’ ‘이석기’ ‘박 대통령 순방’ ‘안철수 신당’ ‘서울시장선거’ ‘장성택’ 같은 정치·안보 관련 토픽이다. 제3자인 필자가 보기엔 대화하는 사람이 모두 보수 성향이어서 의견이 똑같을 것이므로 이 ‘시국토론’이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전략적 부분에선 대동소이하지만 전술적 부분에선 많이 달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면 두 시간은 총알처럼 지나간다고 한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하 어버이연합)’이 대개 이 공원에서 강연을 하는데 이씨는 동료들과 함께 이 강연을 빠짐없이 듣는 편이다. 이를 통해 자기 이론을 ‘정교화’한다. 이씨는 “방송에 나오는 정치 평론가들의 수준을 평가할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어버이연합의 회원으로서 이씨는 이 단체에 매월 2만~3만 원의 회비를 낸다고 한다. 어버이연합은 강연 시 회원이자 청중인 노인들에게 간단한 음식을 제공한다. 이들에겐 점심 대용이 되기도 한다. 이씨의 동료인 한 노인은 “어버이연합 집행부는 월 회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베풀어준다. 그들은 우리의 구심점이 되는 고마운 존재”라고 말했다. 이씨와 동료들은 대개 강연을 듣고 귀가하지만 어버이연합 주최 시위가 있으면 거기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씨는 “민주당사 앞 시위, 통합진보당사 앞 시위, 이석기 의원 공판에 갔다”고 말했다.

요즘 어버이연합의 시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보도된다. 진보진영에선 온라인의 ‘일베’와 오프라인의 ‘어버이연합’을 강경 보수의 대명사쯤으로 여긴다. 반면 보수 측 인사들은 “좌파가 도심시위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어버이연합 같은 단체들이 맞불을 놓아주고 있어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진보진영의 표현대로 하면 ‘보수꼴통’의 핵심 본거지 중 하나가 종묘광장공원의 북쪽 보수 구역인 셈이다. 이곳 노인들은 대부분 어버이연합에 소속돼 강한 응집력을 보인다. 회원이 아닌 노인들도 이 조직과 거의 같은 의견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강모(81) 씨는 “나는 새누리당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안철수는 기회주의자다. 민주당에 들어가 같이 정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 혐의로 징역 20년을 구형받은 것에 대해선 “20년은 너무 짧다”고 했다.

이곳 보수성향 노인들을 뭉치게 하는 접착제는 ‘참전 경험’이었다. 상당수 80대와 70대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공산군과 싸운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또 다른 유공자인 이모(85) 씨는 “6·25전쟁 때 전우 570여 명이 죽는 것을 봤다. 북한군들이 총으로 쏘면 될 텐데도 죽창으로 고통스럽게 찔러 죽이더라”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우리가 북한군과 중공군하고 싸워서 이 나라를 세운 거다. 종북 세력은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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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용 │고려대 경영학부 4학년 leehy0906@korea.ac.kr 하지연 │고려대 미디어학부 2학년 jydgh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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