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호

보수는 북쪽, 진보는 서남쪽 무당파는 동쪽

종묘광장공원 이념지도

  • 이현용 │고려대 경영학부 4학년 leehy0906@korea.ac.kr 하지연 │고려대 미디어학부 2학년 jydgha@daum.net

    입력2014-02-20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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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수·진보 서로 얼씬 못해
    • 무당파 구역엔 박카스아줌마·윷놀이도박·장기전쟁
    • 우리 사회 이념 갈등과 노령화 문제 압축
    서울 종로의 종묘광장공원은 노인 세상이다. 종로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이 공원 입구에서부터 많은 노인이 무리 지어 앉아 있거나 서성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청·장년층은 아무래도 ‘거대한 노인정’이 된 이 공원 안으로 들어가기 주저한다. 그래서 ‘박카스 아줌마’ 같은 특별한 내용이 아니면 이 공원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른다. 최근 필자들은 이 공원을 여러 번 찾아 노인들을 취재했다. 그 결과, 이 공원이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 상인들에 따르면 하루 평균 2000여 명의 노인이 이 공원을 찾는다. 65세 이상 노인이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된 후, 5호선 3호선 1호선 3개 지하철 노선이 만나는 종로3가역 인근 이 공원이 서울·수도권 노인들의 ‘허브(hub)’가 됐다. 노인들 처지에서, 이공원에 오면 비슷한 연령대의 여러 노인을 만날 수 있어 적적하지 않고 공원 서편으로 2000원짜리 국밥집이 즐비해 끼니를 해결하기도 수월하다. 또 무료급식 같은 무상서비스도 생겨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또 다른 ‘노인의 안식처’인 탑골공원도 산책 삼아 갈만한 거리에 있다.

    종묘광장공원 안에서 노인들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있는데, 이들의 말에 따르면 공원 내엔 암묵적인 경계가 설정돼 있다. 공원 북쪽은 보수 성향 노인이 주로 모이고, 남서쪽은 진보 성향 노인이, 동쪽은 여가활동을 즐기려는 무당파 노인이 주로 모인다. 공간적으로 뚜렷이 구분돼 있어 편의상 보수 구역, 진보 구역, 무당파 구역으로 부를 수 있을 듯했다.

    서울·수도권 노인들의 허브

    보수는 북쪽, 진보는 서남쪽 무당파는 동쪽

    종묘광장공원 이념 지도.

    보수 구역에선 정치 이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노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5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무슨 내용인지 들릴 정도로 이들은 격양돼 있었다. 필자가 ‘김용판 무죄 판결 사건’(2012년 대선 당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이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수사를 축소 은폐한 혐의로 기소돼 최근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에 대해 이들 노인에게 입을 뗐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나왔다.



    “젊은이들이 정치를 아느냐?”

    “판결도 못 믿겠다니 민주당 사람들 정말 큰일이다.”

    “세상이 온통 빨개지고 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 듣는 처지에선 정신이 약간 어질했다. 보수 구역의 어르신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이모(84) 씨는 자신의 국가유공자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하루 일과를 말했다.

    이씨는 오전 11시쯤 공원에 도착한다고 한다. 평소 알고 지낸 노인들과 자연스럽게 시사 이슈를 놓고 대화한다. ‘국정원 댓글’ ‘특검’ ‘이석기’ ‘박 대통령 순방’ ‘안철수 신당’ ‘서울시장선거’ ‘장성택’ 같은 정치·안보 관련 토픽이다. 제3자인 필자가 보기엔 대화하는 사람이 모두 보수 성향이어서 의견이 똑같을 것이므로 이 ‘시국토론’이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전략적 부분에선 대동소이하지만 전술적 부분에선 많이 달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면 두 시간은 총알처럼 지나간다고 한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하 어버이연합)’이 대개 이 공원에서 강연을 하는데 이씨는 동료들과 함께 이 강연을 빠짐없이 듣는 편이다. 이를 통해 자기 이론을 ‘정교화’한다. 이씨는 “방송에 나오는 정치 평론가들의 수준을 평가할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어버이연합의 회원으로서 이씨는 이 단체에 매월 2만~3만 원의 회비를 낸다고 한다. 어버이연합은 강연 시 회원이자 청중인 노인들에게 간단한 음식을 제공한다. 이들에겐 점심 대용이 되기도 한다. 이씨의 동료인 한 노인은 “어버이연합 집행부는 월 회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베풀어준다. 그들은 우리의 구심점이 되는 고마운 존재”라고 말했다. 이씨와 동료들은 대개 강연을 듣고 귀가하지만 어버이연합 주최 시위가 있으면 거기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씨는 “민주당사 앞 시위, 통합진보당사 앞 시위, 이석기 의원 공판에 갔다”고 말했다.

    요즘 어버이연합의 시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보도된다. 진보진영에선 온라인의 ‘일베’와 오프라인의 ‘어버이연합’을 강경 보수의 대명사쯤으로 여긴다. 반면 보수 측 인사들은 “좌파가 도심시위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어버이연합 같은 단체들이 맞불을 놓아주고 있어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진보진영의 표현대로 하면 ‘보수꼴통’의 핵심 본거지 중 하나가 종묘광장공원의 북쪽 보수 구역인 셈이다. 이곳 노인들은 대부분 어버이연합에 소속돼 강한 응집력을 보인다. 회원이 아닌 노인들도 이 조직과 거의 같은 의견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강모(81) 씨는 “나는 새누리당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안철수는 기회주의자다. 민주당에 들어가 같이 정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 혐의로 징역 20년을 구형받은 것에 대해선 “20년은 너무 짧다”고 했다.

    이곳 보수성향 노인들을 뭉치게 하는 접착제는 ‘참전 경험’이었다. 상당수 80대와 70대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공산군과 싸운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또 다른 유공자인 이모(85) 씨는 “6·25전쟁 때 전우 570여 명이 죽는 것을 봤다. 북한군들이 총으로 쏘면 될 텐데도 죽창으로 고통스럽게 찔러 죽이더라”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우리가 북한군과 중공군하고 싸워서 이 나라를 세운 거다. 종북 세력은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고 했다.

    “진보 터전인 정자 뺏어”

    북쪽 보수성향 구역에서 수백m 걸어가면 진보성향 노인이 주로 모이는 남서쪽 공원 출입구 부근이 나온다. 이곳 노인 대부분은 정부 여당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보수 구역과 달리 이들은 위축돼 있는 듯 자기 견해를 잘 밝히지 않았다. 몇몇 노인에게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나는 모른다”로 일관했다.

    임모(81) 씨도 처음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임씨는 “정치적 성향으로 편을 나누는 것 자체가 안 좋다”고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는 속마음을 꺼냈다. 그는 진보 구역에 있는 노인들에 대해 “70% 정도가 호남 출신이고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어버이연합이 노인들을 선동한다. 점심을 주고는 해병대 옷을 입혀 데모하게 한다”며 어버이연합을 비난했다. 특히 그는 “이곳(진보 구역)에 있는 노인들은 보수성향 노인들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북쪽으로는 다니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노인도 북쪽에 갔다가 보수진영 노인들에게 욕을 먹은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는 “내가 저번에 북쪽에 잠깐 갔는데 ‘빨갱이 XX 꺼져’라는 말을 들었다. 예전엔 보수성향 노인들이랑 몸싸움도 했다. 요즘엔 그렇게 싸우지 않는다. 우리는 욕먹는 게 싫어서 이쪽으로 온 거다”라고 했다. 보수 측 노인들도 남서쪽 진보성향 구역으로는 발길을 끊는다고 한다.

    종묘광장공원 안엔 이처럼 이념의 장벽이 38선처럼 공고하게 쳐져 있는 듯했다. 다만 세력 판도가 보수 쪽으로 약간 기운 느낌이다. 과거 이 공원에서 진보성향 노인들은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홍익노인회라는 단체는 2008년 10월 여기서 뉴라이트를 “친일매국노집단”이라고 비난하는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홍익노인회는 그때도 진보 구역에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지금은 세력이 많이 위축됐다는 게 이 공원 노인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와 관련해 진보성향 노인들은 새누리당 소속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자기들의 터전을 뺏었다고 본다. 현재 종묘광장공원의 한복판에선 공사가 진행 중이다. 주변엔 가림막이 쳐져 있다. 몇몇 진보성향 노인은 “우리는 공원 내 정자에서 자주 모였다. 하지만 오세훈 전 시장이 종묘공원 공사를 시작하면서 이 정자를 공사구간에 포함시켰다. 이후 모임을 가질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어 큰 불편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아 정자를 잃었고 공원 출입구 쪽으로 내몰렸다고 본다. 이 공원 공사는 올해 초 끝날 예정이다. 그러나 이후 정자가 진보 성향 노인들의 차지가 될지는 미지수다.

    공원 출입구에서 역까지

    보수는 북쪽, 진보는 서남쪽 무당파는 동쪽

    노인들이 종묘광장공원에서 장기·바둑을 둔다.

    진보 구역 노인들은 북쪽 보수 구역 노인들과 정반대의 정치적 의사를 표시한다. 이곳에서 만난 이모(68) 씨는 안철수 신당에 대해 “기존 정치에서 벗어나 새 정치를 한다니 찬성이다. 새 정치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석기 의원 재판에 대해선 “20년이라는 형량이 다소 무겁기는 하지만 국가를 상대로 그런(RO) 모의를 했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진보성향 노인들의 영역이 공원 출입구 쪽으로 움츠러들면서 일부 노인들은 공원 밖으로 나와 지하철 종로3가역 내부로 들어앉았다. 이 역 12번 출구로 내려가면 노인 수십여 명이 삼삼오오 모여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정치 이야기를 서로 나눴지만 필자가 다가가면 말문을 닫고 흩어졌다. 이 중 한 노인은 “우리도 참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같은 민족끼리 분열해 싸우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라고 말했다.

    종묘광장공원 안에서 보수 노인들은 당당하게 인터뷰에 응한 반면 진보 측 노인들은 수세적으로 피하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보수 정권이어서 보수 측이 이 공원에서 우세를 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공원을 관할하는 서울시의 박원순 시장은 민주당 소속이기 때문이다. 이 공원에서 보수·진보를 가르며 차이를 만드는 주요 원인은 응집력으로 보였다. 보수 측의 어버이연합에 필적할만한 응집력 있는 조직이 진보 측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무당파 노인들의 지역은 이 공원 중앙에서 동쪽으로 가장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하루를 소일할 거리를 찾는 노인들이 주로 온다. 필자들이 여기서 마주한 상당수는 ‘그냥 하염없이 앉아 있는 노인’이었다. 이들은 몇 시간씩 허공을 보며 앉아 있다 귀가하곤 했다. 공원 안을 계속 도는 노인들도 있었다.

    “그래도 윷판은 계속된다”

    무당파 구역 가운데 위치한 주차관리소 앞에선 많은 노인이 일렬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신문을 읽고 있었다. 주차관리소 동쪽으론 장기판과 바둑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날씨가 조금 풀리면 장기와 바둑을 두는 노인들로 이곳은 매우 북적인다. 내기 장기·바둑은 아닌 듯했지만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장기 전쟁, 바둑 전쟁에 가까워 보였다. 승부에 대한 강한 집착과 열의가 느껴졌다. 판이 열리는 곳마다 관전하는 사람이 모였다. 몇몇이 훈수를 두자 게임을 하는 사람이 “왜 수를 가르쳐주느냐”며 목소리를 높여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곳 노인들이 앉아 있는 사이사이에 50~60대로 보이는 여성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여성들은 옆 자리의 노인들에게 가끔 박카스를 건네기도 했다.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한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이 여성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삶의 활력소”라고 말했다. ‘당국의 단속으로 ‘박카스 아줌마’가 거의 사라졌다’는 기사를 여러 번 본 것 같은데 이 여성들은 박카스 아줌마로 보였다. 한 노인은 “여성과 노인이 같이 앉아 있다 함께 어디로 간다. 박카스 아줌마 성매매 행위가 사라지진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주말엔 주차관리소 서쪽 곳곳에서 윷판이 벌어졌다. 윷판 하나에 적어도 10여 명이 둘러싸서 게임에 참여하거나 구경한다. 한 노인은 “상당수 윷판이 일종의 도박이다. 외부 사람들이 와서 판을 열면 노인들이 돈을 걸고 윷가락을 던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찰 단속도 자주 나오고 적발돼 끌려가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윷판은 계속된다”고 했다.

    이곳의 한 노인은 “우리는 정치 같은 거 모른다. ‘오늘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대다수 노인은 ‘점심 값 2000원+알파’로 하루를 보낸다. 월 10만 원으로 한 달을 사는 노인이 태반이다. 이들은 이런 형편에 하루를 가장 빨리 보내기 위해 매일 이곳을 찾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고 싶어서 장기도 바둑도 전쟁하듯 두는 것이다.

    종묘광장공원 내부는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과 노령화 문제를 압축하는 듯했다. 취재를 마치면서 두 가지 바람을 갖게 됐다. 이 공원 안에서 어르신들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노인 기초연금 20만 원’ 공약을 꼭 지켰으면 한다.

    * 이 기사는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미디어글쓰기’ 수강생들이 취재해 작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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