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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 평택으로 가는 길

집값·땅값은 계속 오르고 ‘기지촌 할매’들 쪽방서 쫓겨날 판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찾아서

  • 이양구 | 극작가

집값·땅값은 계속 오르고 ‘기지촌 할매’들 쪽방서 쫓겨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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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비 지원 조례안 논란

사실 우순덕 대표는 사회복지사이지 운동가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할머니들과 함께 거리로 나와서 기자회견을 한 것은 그만큼 사정이 급박하기 때문이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하기 위한 조례안 상정 권한을 가진 염 위원장이 소관 상임위에 상정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임위에 상정할 권한을 가진 염동식 위원장과 우순덕 대표는 몹시 가까운 사이였다. 평택에서 자란 염 위원장도 어려서부터 할머니들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고 우 대표 또한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염 위원장이 당황스러워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 대표는 염 위원장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내내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기지촌 여성들이 처한 생활고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극단적 사례로, 내가 4년 전 햇살사회복지회의 소식지에 기록해둔 내용을 옮겨본다.

먼저 L할머니의 마지막 밤을 자원봉사자 S선생의 기억에 따라 적어둔다. S선생은 고인이 세상을 뜨기 전날 전화를 받았다. L할머니였다. 복숭아를 사다달라는 내용이었다. 치아도 없는 양반이 복숭아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입이 헐어서 그랬을까. S선생이 복숭아를 사들고 찾아갔더니 “맛있는 거 사먹게 돈 좀 달라”고 했다. S선생은 3만 원을 줬다. L할머니는 어린애가 투정 부리듯 2만 원을 더 달라고 떼썼다. S선생은 “내일 또 올 텐데 무슨 돈을 자꾸 달라고 그러느냐, 치아도 없는 사람이 밤사이에 5만 원어치나 무얼 사먹으려고 하느냐”고 해도 소용이 없어 결국 2만 원을 더 내줬다. L할머니는 손에 쥔 5만 원을 팬티 속에 넣었다.



다음 날 새벽 간병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L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녀는 아마도 노잣돈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L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 S선생에게 통장을 주며 장례식 비용으로 쓰라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통장 잔고는 699원에 불과했다. 정부 보조금이 입금되기 전 돌아가신 것이다.

집값·땅값은 계속 오르고 ‘기지촌 할매’들 쪽방서 쫓겨날 판

햇살사회복지회를 찾은 할머니들의 일상.

“빨리 죽고 싶은데…”

그녀의 별명은 왜가리였다. 사람을 만나면 마치 소리를 지르듯 말해서다. 아마 외로워서 그랬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오랫동안 유방암으로 고생하다 작년 초 세상을 떠난 나영란 할머니는 죽기 전 몇 달 동안 어찌나 고통스러웠던지 빨리 죽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잘 죽지를 않아. 이쪽 세상에서 안 받아주니까 저쪽 세상에서도 안 받아주나벼”라면서. 나영란 할머니가 마침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저쪽 세상에서나마 그녀를 받아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할머니들이 직접 무대에 오른 연극 ‘숙자이야기’(노지향 연출)에서 빼어난 연기를 펼친 노배우이기도 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져간 사람 중에는 여복동 할머니도 있다. 아직 살아 있는 그녀들을 위한 일이므로 여복동 할머니 또한 실명으로 자신이 거론되는 것을 허락하시리라 믿는다. 그분이 돌아가신 뒤 내가 그분과의 마지막 기억을 햇살사회복지회의 소식지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여복동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2010년 1월이나 2월이었을 것이다. 조미라 간사님을 따라서 할머니 방을 처음 방문했을 것이다. 조 간사님이 기도를 해주겠다고 하면 자기는 불교니까 기도는 안 해도 된다고 말하며 웃던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다. 민망해하던 조 간사님의 얼굴도. 할머니 방에는 달마대사 그림도 있었다.

2012년 봄 학기에 나는 화요일에 수업이 있어서 평택에 거의 갈 수가 없었다. 대신 화요일이면 못 간다고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 이번 학기 끝나면 갈게요. 미안해요. 그러나 3월이 지나가고 4월이, 다시 5월이 지나가는 동안 못 간다는 전화를 하는 것도 미안하고 바쁜 일상에 묻혀 6월에는 전화조차 끊게 되었다. 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연세였지만 무척 건강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내가 학기를 마치기 전에 돌아가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학기는 끝났고 바쁜 일이 좀 정리돼 이틀 후면 평택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일요일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원장님께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금요일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있었다니까 금요일이나 토요일쯤 돌아가셨을 것 같았다. 혼자 빈방에서, 언제나 그랬듯 그날도 혼자 영원히 잠드셨다.

다음 날 평택으로 갔다. 할머니는 평택시 장례문화원에 안치돼 있었다. 빈소가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병원 근방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조문을 대신했다. 병원 사무실 화이트보드에 ‘무연고 노인 1’이라고 누군가 써놓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원장님과 자원봉사자 몇 명, 팽성읍사무소 직원 한 명이 화장터로 가서 화장을 하고 시립 납골당에 유골을 안치하자 모든 것이 끝났다. 바람이 불었고 안성천에 떨어진 햇살은 물결 따라 반짝이며 멀리 사라져갔다.

흔히들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의 차이로 강제성과 자발성을 거론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간 것이지만 미군 기지촌으로 온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온 것이니 다르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 여부도 연행 과정의 강제성보다는 현지 위안소에서의 강제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듯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의 경우도 ‘자발적으로’ 기지촌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여부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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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구 |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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