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이봐, 윤 과장.”
컨테이너 뒤에 서 있던 윤기철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법인장 김양규가 다가오고 있다. 눈을 둥그렇게 뜬 것이 무슨 사고라도 일어난 것 같은 표정이다. 다가선 김양규가 말했다.
“허가증 나왔다.”
허가증이 휴가증으로 들렸는데 휴가증도 맞는 말이다. 북한 특구개발지도총국에서 허가증을 발급해주지 않으면 휴가고 뭐고 없는 것이다.
“이것 참, 어제 오후 4시에 신청했는데 오늘 오전에 나오다니.”
김양규가 머리까지 내저었다.
“총국에서 자네를 봐주는 거 같다.”
“수속이 빨라진 겁니다.”
“그런가? 어쨌든 준비해.”
“예, 법인장님.”
몸을 돌렸던 김양규가 머리만 비틀고 윤기철을 보았다. 웃음 띤 얼굴이다.
“어쨌든 자네가 오고 나서 일이 좀 풀리는 것 같아.”
그 말을 박스를 메고 오던 포장반의 남자 근로자들이 들었다. 북한 측 남자 근로자들이다. 윤기철은 심호흡을 했다. 근로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대표 동지가 뵙자고 하십니다.”
사무실로 들어선 윤기철에게 자재과 보조사원 김현주가 말했다.
“지금 대표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머리를 끄덕인 윤기철이 챙겨둔 가방을 들고 나오다가 멈춰 섰다. 사무실 안에는 선적 때문에 모두 창고로 지원을 나가 김현주뿐이었다. 22세, 둥근 얼굴이 자주 빨개진다.
“나 휴가 가는데 미스 김, 필요한 거 있어? 서울에서 사다줄게.”
“아유, 일 없습니다.”
김현주의 흰 얼굴이 빨개졌다.
“순미 언니나 사다주시라고요.”
“정순미 씨는 날 싫어해.”
“어머나.”
놀란 듯 김현주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럴 리가요? 모르시는 말씀이야요.”
“잘 알잖아? 나하고는 말도 잘 안 해.”
“순미 언니가 과장님을 좋아한다고요.”
그 순간 김현주가 입을 딱 다물더니 상기되었던 얼굴이 굳어졌다. 사람은 흥분했을 때 말실수를 한다. 김현주처럼 어리고 순수한 성품이면 그 가능성이 더 높다. 윤기철은 몸을 돌렸다. 김현주가 무심코 뱉은 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근로자 대표실 위치는 총화실 안쪽이어서 문을 두 개나 열어야 한다. 대표실 앞에 선 윤기철이 노크를 하자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문을 연 정순미가 말했으므로 윤기철은 잠자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하나, 소파 한 조가 놓인 방 안에는 둘뿐이다. 조경필은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앉은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대표님은?”
그때 정순미가 가방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 검정색 알루미늄제 서류가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