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호

평일엔 노숙인촌 일용직 ‘불금’은 화상 경마장에서

집 나간 가장(家長)들 24시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4-06-19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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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 나온 가장(家長)들이 서울 영등포역 일대로 모여든다. 역을 중심으로 한 교통근접성, 전통시장의 낙후한 환경, 주택가 곳곳에 자리 잡은 여인숙과 고시원, 각종 음식점과 술집, PC방과 노래방, 화상경마장까지 돈 없고 갈 곳 없는 이들을 위한 먹을거리와 놀거리, 볼거리가 풍부해서다. 이곳으로 이어지는 숱한 가장의 위험한 가출 24시.
    평일엔 노숙인촌 일용직 ‘불금’은 화상 경마장에서
    실낱같은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던 6월 2일 오후 4시 반. 서울 영등포시장 맞은편 대로변의 한 낡은 건물 1층엔 공사로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2층으로 통하는 건물 입구를 지나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자, 노숙인이 단골로 드나든다는 PC방이 나타났다. 동행한 서울영등포경찰서 중앙지구대 김태석 노숙자담당관(이하 담당관)이 “여긴 남자만 있는 곳이라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하니 절대 취재 온 티를 내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궂은 날씨 탓인지 찌든 담배 냄새와 퀴퀴한 곰팡내가 코를 찔러 숨쉬기가 불편했다. 창문이 모두 가려진 어두컴컴한 실내는 영업 중인가 싶게 조용했다. 평소 안면 있는 주인과 눈이 마주친 김 담당관은 “사람 좀 찾으러 왔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실내를 눈으로 훑자 100개 남짓한 칸막이 좌석 중 20여 개를 40~60대 남자 손님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컴퓨터에 별 관심이 없는 듯 엎드려 잠을 청하거나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멍하니 있었다. 몇몇은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며 자세를 고쳐 앉고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쫄’과 ‘반쫄’

    평일엔 노숙인촌 일용직 ‘불금’은 화상 경마장에서

    영등포시장 인근 주택가 공원에서 낮잠을 자는 노숙인을 살펴보는 김태석 서울영등포경찰서 중앙지구대 노숙자담당관.

    역을 중심으로 한 영등포 일대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은 줄잡아 700여 명. 짧게는 20일, 길게는 3년간 머물 수 있는 노숙인을 위한 5개 일시보호·자활시설(쉼터)에서 생활하는 500명을 비롯해 PC방과 다방, 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 거리와 여인숙·고시원을 넘나들며 생활하는 사람까지 포함한 수치다. 이 지역에서 통용되는 은어가 ‘쫄’과 ‘반쫄.’ ‘쫄’은 IMF 외환위기 이후 거리 무료급식소 앞에 ‘쪼르르’ 줄 서서 밥 타기를 기다리는 노숙인을 가리키는 은어다. ‘쫄’이 거리 노숙인을 뜻하는 반면, ‘반쫄’은 쉼터나 여인숙, 고시원 등 주거공간으론 적합하지 않지만 당장은 묵을 곳이 있는 노숙인을 가리킨다. 이들을 ‘반쫄’로 부르는 이유는 언제든 일자리가 끊겨 돈이 떨어지면 다시 길거리로 밀려날 수 있기 때문.

    이곳 노숙인은 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하고 익명성에 몸을 숨긴다. 서로의 이름이나 나이, 과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철저한 경계와 거리 두기로 인해 일주일의 취재기간 내내 노숙인에게 가까이 접근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PC방을 나서려는 순간 멀리서 남자 2명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그중 한 명은 며칠 전 PC방 건물 앞에서 마주쳤던 50대 초반의 이모 씨였다. 그때 그는 “반장님(김태석 담당관), 지구대에 ‘실종신고 들어왔다’고 하고 저 좀 잡아서 시골집에 보내줘요”라며 하소연했다.



    얼굴을 익힌 덕에 경계심을 많이 누그러뜨린 이씨와 함께 영등포경찰서 중앙지구대까지 3분 남짓한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씨는 “우리 말고도 현재 PC방에 3명(노숙인)이 더 있다. 아침엔 더 많았는데 비가 그치자 여러 명이 나갔다. PC방에서 게임을 하려면 ID가 있어야 해서 우리 같은 사람은 게임을 못하고 주로 공짜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일이 없으면 그냥 죽치고 자거나 쉬러 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는 “시간당 이용료가 600원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겐 주인이 돈을 안 받고 눈감아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가? 원래 2~3층이 PC방이었는데 2층으로 줄었다. 며칠 전엔 사장이 ‘장사가 안된다’고 9월에 가게 계약이 끝나면 문을 닫겠다고 하더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중앙지구대 인근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서 건너편 문 닫힌 가게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10여 년 전 고향(충북)에서 일자리를 잃고 가정불화로 아내와 헤어진 뒤 서울로 온 이씨는 오랫동안 노숙생활을 전전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그가 집을 나온 뒤 이혼한 전처는 자녀를 데리고 경기도로 이사해 살고 있다.

    어느 날 아이들이 보고 싶어 용기를 내서 집을 찾아간 이씨는 “스무 살이 넘은 다 큰 자식들이 하는 일 없이 제 엄마한테 빌붙어 사는 걸 보고 한심해서 호통을 치고 나왔다”고 했다. “며칠 전 실종신고 얘기는 뭔가?”라는 질문에 “3년 동안 고향에 못 가서 팔순 넘은 부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은데 지금 이 꼴로는 면목이 없어서 내 발로 고향에 못 간다”며 깊은 한숨을 토했다.

    놀거리, 볼거리 풍부해 운집

    영등포역 일대가 쪽방촌과 노숙인 생활공간으로 주목받는다. 지난해까지 중부대에서 겸임교수로 형사정책과 범죄학을 강의했던 김태석 담당관에 따르면, 경부선 열차역과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한 교통근접성, 전통시장(영등포시장)을 중심으로 한 낙후한 환경이 원인이다. 그뿐 아니라 주택가 골목 곳곳에 자리 잡은 여인숙과 고시원을 비롯해 음식점과 술집, PC방과 노래방, 화상경마장(용산 마권장외발매소)까지 먹을거리와 놀거리, 볼거리가 풍부해 돈 없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운집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췄다.

    김 담당관은 “노숙인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섞이더라도 부끄러움을 덜 느끼는 환경이어야 한다. 게다가 여긴 쉼터가 많아 언제든 그곳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어 비교적 깨끗하게 생활할 수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지방자치단체와 경찰, 쉼터가 연계해 노숙인 관리가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잘 이뤄져 일자리 등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사업 실패나 실직, 가정불화로 집을 나온 가장들이 이곳으로 흘러든다. 외환위기 이후 최근까지 이곳에 둥지를 튼 가출 가장이 현재 7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노숙인 자활시설인 영등포보현의집 이동길 센터장에 따르면 가장들이 집을 나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사업 실패나 실직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가족 보기가 미안해 집을 나오는 경우다. 둘째, 폭력이나 알코올 문제, 가정불화로 가족에게 ‘왕따’를 당한 경우다.

    불성실한 태도 탓에 잦은 실직과 이직을 경험한 40대 후반 김모 씨는 아내와 수년간 불화를 겪다 두 달 전 집을 나와 영등포의 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돈을 벌어도 방비 25만 원을 내고 생활비로 쓰면 남는 돈이 별로 없으니 애 데리고 알아서 살아라”고 아내에게 통고한 뒤 집을 나온 그는 한 달에 두세 번 집에 들어가 옷가지를 챙겨온다. 그때마다 10대 딸과 아내의 냉랭한 태도를 감수해야 하지만 이혼할 마음은 없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왜 아이와 집사람한테 남들처럼 잘해주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세상 일이 어디 내 맘대로 되나? 눈만 마주치면 부부싸움을 하게 되니 가장으로서 자괴감도 들고 무시당하는 기분도 든다. 차라리 떨어져 지내면서 가끔 보는 요즘이 속 편하다”고 했다.

    가출 가장을 포함해 일거리가 없는 노숙인이 평일 낮에 주로 시간을 때우는 곳은 PC방 외에 일명 ‘노숙동산’이라 불리는 영등포공원 내 지역이다. 영등포역 뒤편의 이 공원에 들어서자 한낮 땡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는 노숙인 대여섯 명이 눈에 띄었다. 며칠 뒤 이곳에서 만난 60대 초반 노숙인은 “8년 전 집을 나와 여인숙과 거리를 전전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도금 관련 사업을 하며 한때 잘나갔던 그는 부도로 한순간에 전 재산을 날렸다. 살던 집에서 가족이 쫓겨날 처지가 되자 그는 집을 나왔고 아내는 결혼한 큰딸이 모셔 갔다. 둘째딸은 자신의 좁은 가게에서 새우잠을 자게 됐다. 그는 “당장 가진 게 없는데 가족한테 연락하면 뭣하나? 자식들이 부담만 가질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50대 중반 이모 씨는 매일 오전 한 차례 중앙지구대에 들른다. 그곳에서 나오는 폐지를 수거하기 위해서다. 영등포의 노숙인 쉼터에서 생활하는 그는 10여 년 전 사업 부도로 가출했다. 그 뒤 남편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부부관계가 깨졌다. 이미 집을 떠나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씨는 과거 사용하던 휴대전화 번호를 지금까지 그대로 갖고 있다. 행여 자식한테서라도 연락이 올까 싶어서다. “열심히 일해 몇 백만 원이라도 모으면 노점이라도 하나 차리고 싶다. 그래야 가족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는 그는 차마 자신이 먼저 연락하지 못하고 이제나저제나 가족이 자신을 찾아주길 간절히 희망한다.

    자연스레 주민과 섞여

    영등포역 왼편에 위치한 영등포역파출소의 정순태 노숙팀장은 6년째 관내 노숙인을 담당한다. 정 팀장은 “집을 나와 노숙인이 된 가장들은 가족이 방치한 채 찾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어렵게 수소문해 연락하면 부인과 자식들이 ‘왜 연락했느냐’며 되레 화내는 경우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태석 담당관은 “집 나온 가장 중에 노숙 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돈을 벌어 애들 양육비나 학비를 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애들을 엄마가 데리고 있는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엄마 편이 된다. 10대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 수 있으니 아버지를 더 멀리하고 원망한다. 그러면 집 나온 가장들은 ‘지들이 어릴 때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하면서 서운한 감정을 갖게 된다. 50대 노숙인 중에 이런 사람이 많다”고 귀띔했다.

    한편 쉼터에서 만난 한 현장 실무자는 “사업이 망하면 가족이 빚쟁이에게 시달릴까봐 가장 혼자 집을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 가족을 보호하려 ‘위장이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가족 해체로 이어지기도 한다. 몇 년 전 50대 초반 남자가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사업이 망해 갈 곳이 없어지자 자살하려고 혼자 길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됐다고 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조금씩 빚을 갚아나가자 주위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가정으로 복귀했다. 가장이 집을 나오더라도 가족이 해체되지 않으면 희망이 있다”고 했다.

    영등포 지역은 퇴근시간이나 주말의 역 주변을 제외하고는 평일 낮 거리에서 노숙인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 술판을 벌이거나 술 취한 채 비틀거리는 노숙인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수백 명의 노숙인이 공존하는 공간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영등포경찰서 김용갑 중앙지구대장은 “이곳 지구대로 발령받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노숙인에게 벌금 스티커를 많이 떼라’고 직원들을 독려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일주일간 구치소에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 있으면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건강을 회복할 시간을 번다. 또 노숙인이 가장 싫어하는 자유를 구속당하다보면 다음부터 조심하게 된다”고 했다. 한편 쉼터가 타 지역보다 많다보니 이곳에서 근무하는 현장 전문가들이 365일 거리로 나가 노숙인을 상담하고 쉼터 입소를 권유해 일자리와 취업을 돕고 있다. 한 쉼터 센터장은 “쉼터에 들어오면 언제든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구직이나 일을 나가려면 깨끗하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숙인임이 드러나지 않고 자연스레 주민과 섞여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평일엔 노숙인촌 일용직 ‘불금’은 화상 경마장에서

    영등포역 일대의 쪽방촌.



    ‘경마 폐인’도 속출

    평일엔 노숙인촌 일용직 ‘불금’은 화상 경마장에서

    용산 마권장외발매소의 금요일 오전 풍경. 손님 10명 중 3명가량이 노숙인이다.

    이곳 노숙인에게 ‘불금(불타는 금요일)’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중앙지구대 바로 옆에 위치한 용산 화상경마장(이하 경마장)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5월 30일 오전 11시10분, 경마장 건물 1층에 들어서자 지하철 개찰구 같은 기계가 앞을 가로막았다. 교통카드를 대자 2000원의 입장료가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내리자 실내엔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경마전문지를 펼쳐든 40~60대 남자가 70여 명에 달했다. 그들 주변으로 노숙인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중년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어깨너머로 경마전문지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첫 경주가 시작되려면 2시간 가까이 남은 시각. 경마장 입구의 판매대 위엔 수백 권의 경마전문지가 쌓인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판매원은 “4000원짜리와 1000원짜리 두 가지가 있는데, ‘×××경마’ 전문지가 1000원짜리 중 가장 인기 있다”며 한 부를 건넸다. 경마전문지를 손에 들고 둘러본 실내는 3구역으로 나뉘어 230여 개 좌석이 배치돼 있고, 좌석 정면 벽 상단부마다 예닐곱 대의 모니터가 설치돼 있었다. 한편에 설치된 커피자판기 앞에서 청소원 2명과 50대 남자 손님 2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손님이 “여기는 맨 노숙인만 오고 너무 복잡해”라고 불만을 털어놓자 청소원 한 명이 “요즘 경주당 베팅액도 늘었다. 1만 원씩 하다 2만~3만 원으로”라며 맞장구를 쳤다.

    김태석 담당관에 따르면 경마장 고객 중 30%가 노숙인이다. 2011년 중앙지구대로 발령받은 그는 “일반인은 몰라도 우리는 노숙인을 금방 알아본다. 근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금요일 낮 길거리에 노숙인이 안 보였다. 왜 그런가 했더니 다들 경마장에 가 있었다. 집 나와서 이곳으로 흘러든 가장 중 ‘경마 폐인’이 된 사람이 많다”고 했다. 쉼터에서 일자리를 소개받아 현재 강원도의 한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50대 초반 임모 씨는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영등포로 돌아온다. 평일 내내 고된 노동으로 번 돈으로 다음 날 경마장에 가기 위해서다.

    중앙지구대와 경마장을 중심으로 한 닷새간의 평일 취재 내내 낮 동안은 문을 여는 음식점이나 술집이 거의 없어 한산하게 느껴지던 거리가 이날만큼은 달랐다. 오전 11시경 경마장을 향해 가는 동안 거리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활짝 열고 손님맞이에 분주히 움직이면서 거리는 활기를 띠었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되는 첫 경주를 2~3분 남겨놓고 군데군데 비어있던 4층 경마장 좌석엔 손님이 꽉 들어찼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해 통로에 자리 잡은 사람 수도 좌석 수에 육박했다.

    이어지는 가출의 발길

    평일엔 노숙인촌 일용직 ‘불금’은 화상 경마장에서

    영등포시장 인근의 여인숙·고시원 밀집 골목.

    낮 12시30분, 마권 발매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창구와 자동발매기 앞으로 순식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실내 모니터가 켜지고 부산 경마장에서 열리는 첫 경주가 생중계되자 통로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니터 가까운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눈 깜빡할 사이 경주가 끝나자 곳곳에서 탄식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50대 초반 남자는 “×발, 입장료 2000원 때문에 안 들어오려고 했는데…”라며 마권을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노숙인으로 보이는 40대 후반 남자는 2만 원을 베팅한 마권 한 장을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한 장을 손에 든 채 초조한 듯 계속 만지작거렸다. 실내 한편에 마련된 흡연실은 첫 경주가 끝나자마자 20여 명의 남자로 북적댔다.

    경마장을 나서다 이른 아침부터 주변을 순찰하던 김태석 담당관과 마주쳤다. “건물 전체가 경마장이라 하루 입장 정원이 7000여 명에 달한다. 노숙인은 쫓지 않으면 한 주 내내 어렵게 번 돈을 여기서 다 탕진한다. 오후 7시에 마지막 경주가 끝나면 노숙인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와 경마장 주변에 난리가 난다. 돈을 잃은 사람은 잃었다고, 딴 사람은 땄다고 술판을 벌인다. 돈 없는 노숙인 중엔 유료 지정좌석표를 사서 일반인 자리를 대신 맡아주고 장당 2000~3000원의 수고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일요일까지 경주가 열리니 술 마시느라 월요일이면 일하러 못 가는 노숙인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6월 2일 월요일 오후 2시30분, 다시 찾은 중앙지구대 안이 떠들썩했다. 흰색 와이셔츠에 양복바지 차림의 50대 초반 남자가 직원들을 붙들고 시비를 걸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말쑥한 차림에 술 취한 모습도 아니었지만 20여 분을 달래도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지구대 밖으로 쫓겨난 그는 길가에 서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분노를 쏟아냈다. 두어 시간 후 그를 다시 만난 곳은 지구대 근처 편의점 앞. 노숙인 두 명과 맨바닥에 주저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태석 담당관은 “갑갑해서 집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노숙인도, 이 지역 사람도 아니다. 근데 벌써 며칠째 여기 주변을 맴돌며 탐색 중이다. 아마 실직한 것 같다. 저런 사람을 그대로 놔두면 십중팔구 여기로 흘러들어 노숙인이 된다”며 걱정했다.

    한 쉼터 센터장은 “갈 곳 없이 집을 나왔을 때 6개월 안에 가정으로 복귀하는 게 좋다. 그 이상 넘어가면 노숙생활에 찌들어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황폐해진다. 긴 노숙생활로 가정이 깨지기 전에, 그나마 어떻게든 가정과 가족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 초기에 가출 가장을 발견하고 필요하다면 자활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 장기간 노숙생활에 물들면 가정 복귀 의지도 약해지고 자립해서 가정으로 돌아가기까지 일반인의 10배가 넘는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쉼터 현장 실무자는 “가장들이 초기에 집을 나와 위기에 닥쳤을 때 그들을 즉각 구조할 수 있는 정보전달 체계와 노숙인에 대해 잘 아는 현장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들에게 책정된 급여가 공공근로 수준이다보니 노련한 현장 전문가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뿐 아니라 쉼터를 거쳐 나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지원이 이뤄져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 독립할 수 있도록, 또는 완전한 가정 복귀가 이뤄질 수 있도록 사후지원 시스템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있다. 그들을 노숙인이 아닌 극빈층으로 보고 건전한 사회 일꾼으로 되돌아가도록 보살펴야 할 책임이 우리 사회에 있다”고 했다.

    6월 3일 오후 3시, 경기 부천시의 한 빌라에서 50대 후반의 이영호(가명) 씨를 만났다. 24평 남짓한 공간은 부부가 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씨는 노숙인 출신으로 자활에 성공해 2012년 현재의 집을 마련해 아내와 함께 제2의 신혼을 이어간다. 대기업 상무로 재직하다 사업을 시작한 그는 한때 5~6개 기업을 운영하며 반도체 회사와 대형 병원 등 굵직한 고객을 둔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하지만 자신이 선 연대보증과 지인의 사기로 한순간에 집과 회사가 날아갔고, 2007년 겨울 양복과 코트만 걸친 채 가족에게 온다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

    “을지로와 서울역을 전전하면서 3년 가까이 노숙생활을 하다 동사무소를 찾아가 쉼터(보현의집)를 소개받았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일했다. 강원도 건설 현장에서 ‘노가다’도 하고 음식점 불판도 닦았다. 눈물도 많이 흘렸다.”

    자활 지원책 마련 절실

    “노숙 당시만 해도 죽이고 싶은 사람이 17명이었다”는 그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힌 건 쉼터에서 마련한 템플스테이에서였다. 이씨는 “1박2일간 공짜라니까, 마침 일도 없어 별 기대 없이 갔다가 그곳에서 한 여자보살을 만났다. 자신의 인생사를 죽 들려주는데 나보다 더 파란만장했다. 그때 사기 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과거를 잊고 재기의 각오도 다질 수 있었다”고 했다. “가족 볼 면목이 없어 가출 뒤 5년간 연락을 끊고 살았다”는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와 계기를 준 쉼터 사람들,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던 나를 끝까지 기다려준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다. 한 아파트 기계실에 근무하는 그는 지금도 주소를 ‘보현의집’으로 두고 있다. 지금이 있게 해준 지난 과거가 결코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정순태 노숙팀장에 따르면 영등포역파출소는 지난해부터 안전화를 비치해 노숙인에게 빌려준다. 정 팀장은 “노숙인에게 흔한 일자리 중 하나가 일용직이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려면 안전화가 있어야 한다. 안전화 살 돈이 없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노숙인이 한둘이 아닌 걸 알고 대여를 시작했다”고 했다. 북한산에서 9개월간 노숙생활을 하다 영등포로 온 50대 초반 김모 씨는 안전화를 빌려 신고 부지런히 일을 다닌 끝에 지난해 신길동의 한 고시원에 방을 얻어 이곳을 떠났다. 정 팀장은 “김씨처럼 안전화를 빌려 신고 노숙생활을 청산한 사람이 3~4명이나 된다. 집 나온 초기 노숙인의 조기 발견 못지않게 그들이 꼭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한 세심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했다.

    재기와 가정 복귀에 성공한 부천의 이씨는 “쉼터 사람들은 이미 사회에서 한번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노숙인 특별자활근로 같은 공공근로 일자리는 대부분이 몇 개월씩 단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어렵게 자활을 마음먹고 일을 시작했다 얼마 못 가 일자리가 끊기면 더 큰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아무리 집에 들어가고 싶어도 손에 쥔 돈이 없으면 가족한테 연락하기조차 미안하다. 그들에게 장기적인 일자리가 정말 필요하다”고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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