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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

인류 문명과 동물 세계 이끈 협력과 연대의 힘

  • 김학순 │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인류 문명과 동물 세계 이끈 협력과 연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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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

“공동체의 어느 구성원이든 먹이를 달라고 요청하면 나눠주는 것이 개미에게는 의무이기도 하다.” “작은 티티원숭이들은 비가 오면 떨고 있는 동료의 목을 자신들의 꼬리로 감싸주면서 서로 보호한다. 몇몇 종은 부상한 동료들을 배려하고, 퇴각하는 동안에도 살려낼 희망이 없다고 확인될 때까지 부상한 동료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사회에서 상호부조가 형성되는 과정뿐 아니라 붕괴되는 과정까지 꼼꼼히 추적했다. 그는 원시사회의 상호부조를 설명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포틀래치를 언급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공산제를 기반으로 했지만 유럽의 영향을 받은 몇몇 원주민은 사적 소유를 인정했다. 이들은 부의 지나친 축적이 부족의 단합을 깨뜨릴 수 있다고 판단해 부작용을 방지할 방안으로 포틀래치를 시행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면 씨족 사람들을 성대한 잔치에 불러 모아 실컷 먹인 뒤 전 재산을 모두에게 나눠준다. 그 뒤 잔치 때 입었던 옷을 벗고 낡은 털옷으로 갈아입고는 누구보다 가난해졌지만 우정을 얻게 됐다.”

그는 유럽 전역의 농촌에서 공유제가 존재한다는 점도 눈여겨봤다. 민회가 공유지를 관리하고 촌락공동체가 폭넓은 자치권을 소유하는 스위스를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한다. 당시 스위스에서는 관습적인 상호부조만이 아니라 협동조합을 통해서도 근대적인 다양한 요구가 충족되고 있었다.

크로포트킨은 생존경쟁이 없다는 게 아니라 생존경쟁 외에도 상호부조라는 원리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진화의 한 요인인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종이 유지되고 더 발전하도록 보증해주면서 그런 습성과 성격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어쩌면 상호투쟁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그는 “중앙집권국가의 파괴적인 권력도, 고상한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과학의 속성으로 치장해 만들어낸 상호 증오와 무자비한 투쟁이라는 학설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깊이 박혀 있는 연대의식을 제거할 수는 없다”고 결론짓는다.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한 과학자답게 사변적인 형이상학이나 관념론에 빠지지 않고 자연과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했다.

‘상호부조론’은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해 준 최초의 연구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아나키즘은 ‘과학적 사회주의’로 불리는 마르크스주의에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19세기 이래 헉슬리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강자의 약자 지배를 정당화해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는 정치철학으로 이용된 반면, ‘상호부조론’은 피압박 개인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정치철학의 바탕이 됐다. ‘상호부조론’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려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응원서로 읽힌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검은 깃발

동서 냉전이 격화하면서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졌던 아나키즘은 1960년대 들어 자본주의와 현실 사회주의가 모두 위기에 봉착하자 부활했다. 1968년의 세계적인 혁명 분위기는 ‘상호부조론’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념적 구분을 넘어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물결이 전 세계적으로 흘러넘쳐 1968년 전 세계의 거리를 장악했던 시위대는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과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동시에 내걸었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1980년대 말에도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운동에서, 인간의 자연 지배를 비판하는 운동에 이르기까지 아나키즘의 상징인 검은 깃발이 펄럭였다.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이후 1%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도 ‘상호부조론’과 맥이 닿는다.

비슷한 시기에 ‘상호부조론’의 아나키즘은 생태주의, 대안공동체, 대안교육, 빈집점거운동, 반문화운동, 양심적 병역거부운동, 풀뿌리민주주의운동 등을 통해 소생했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지식의 공동소유까지 주장하는 아나코-코뮨주의로 이론화했다.

그사이 ‘상호부조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게 쏟아져 나왔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 유례없이 격렬해지자 이런 경향은 더욱 깊어져갔다. 많은 이가 실질적으로는 상호부조에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를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국 인류학자 애슐리 몬터규는 ‘상호부조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격찬한다.

신동아 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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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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