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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사라지는 모든 것을 생각하며 삼등열차 타고 떠나자

송창식 ‘고래사냥’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사라지는 모든 것을 생각하며 삼등열차 타고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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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모든 것을 생각하며 삼등열차 타고 떠나자

영화 ‘고래사냥’ 촬영지인 동해 현남항의 풍경.

노래와 영화(소설)는 모두 현실에서 찾아보기 불가능한 그 무엇을 찾는 것이 주제가 된다. 철학과에 재학 중인 병태는 미팅에서 영자라는 불문과 여대생을 만나 사귀게 된다. 얼마 후 영자는 병태가 돈도 없고 전망도 없다는 이유로 절교를 선언한다.

병태의 친구인 부잣집 외아들 영철은 적성에 맞지 않는 대학생활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전국적으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갈 곳이 없는 대학생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데, 술만 마시면 동해바다로 고래사냥을 가고 싶다고 말하던 영철은 어느 날 정말로 동해바다로 떠나 자살을 하고 병태는 군대를 선택한다. 병태를 태운 입영열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영자가 나타나 열차의 창문에 매달린 채 병태에게 입맞춤을 한다. 흥행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둔 이 영화의 또 다른 오브제는 기차다. 지금의 KTX 급이 아니라 삼등삼등 완행열차가 노래의 또 다른 주인공쯤 된다.

당시 완행열차는 당연히 ‘비둘기호’다. 적자를 이유로 한 경영논리에 의해 강제 퇴출된 지 오래다. 역이란 역은 모두 멈춰 서는 완행열차. 믿기지 않겠지만 속도가 워낙 느려 간혹 날쌘 청년들은 커브 길을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거나 올라타는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 열차는 고급인 통일호나 새마을호를 만나면 그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역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싼 운임 내고 탄 설움을 톡톡히 지불했다. 비록 느리고 허름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 열차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열차에는 인근 도시 학교로 통학하던 청소년들의 재잘거림,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는 대학생들의 설렘이 담겼다. 삶은 달걀과 푸성귀를 담은 광주리를 이고 아들 딸 집으로 가던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있었고, 5일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담은 봇짐을 들고 새벽 첫차를 탄 장꾼들이 있었다. 비둘기호의 단골 승객은 다름 아닌 우리 어머니였다.

그러나 비둘기호의 추억은 이제 너무 아득하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통일호나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타야 했다. 그러던 가운데 통일호마저 없어졌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새마을호보다 훨씬 빠른 KTX가 나타났다.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타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제 KTX를 이용한다. 그러나 모두가 KTX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기름과 찹쌀 자루를 걸머진 할머니나 지방 장터를 돌아다니는 장꾼은 비싼 요금을 감당할 수가 없다. 깨끗하고 쾌적한 KTX가 완행열차를 타고 고래사냥을 간다는 386세대의 추억마저 고스란히 앗아간 셈이다.

복고주의 열풍



노래 ‘고래사냥’의 주체할 수 없는 대중적 인기는 동명의 영화 ‘고래사냥’을 탄생시킨다. 역시 최인호 소설이 원작으로 1984년 배창호가 감독했다. 지금은 사라진 피카디리극장에서 상영돼 서울에서만 무려 43만 관객을 동원, 그해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안성기, 이미숙, 가수 김수철이 등장하는 영화는 신군부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를 무대로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은 젊은이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주제가 ‘고래사냥’은 당시 대학가가 안았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포착하면서 특히 청년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선동했다.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에 억눌린 젊음에게 서둘러 고래사냥을 떠나라는 절규 아닌 절규였다.

사라지는 모든 것을 생각하며 삼등열차 타고 떠나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거지 역에 안성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왜소한 병태 역에 음악을 담당한 가수 김수철이 직접 출연했고 이미숙의 풋풋한 벙어리 연기가 관객의 호감을 샀다. 노래의 인기는 뮤지컬도 만들어냈다. 1996년에 극단 환퍼포먼스가 이윤택 연출로 9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같은 내용을 뮤지컬로 만들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다. 그러나 ‘고래사냥’은 과거에만 있지 않다. 술집 뒷골목에서 술 취한 386들에 의해 이따금 불려지던 노래는 최근의 복고풍에 힘입어 되살아났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이은 ‘응답하라 1997’ 등으로 상징되는 복고주의 열풍은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해 있던 불멸의 노래들을 다시 등장시켰다.

사실 지금의 1970년대 복고바람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세시봉’으로 상징되는 통기타 가수들과 ‘불후의 명곡’에 송창식, 신중현 등이 등장해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부모 세대와 다른 정체성이 형성된 그 시절에 대한 애잔함이 아직도 호소력을 발휘하는 데 있을 것이다. 7월 5일 KBS ‘불후의 명곡’에서 정동하 · 딕펑스가 부르는 ‘고래사냥’을 보셨는가? 관중석에 앉은 중년 세대들이 악을 쓰고 절규하듯 따라 부르다 마침내 눈물을 훔치는 장면에 TV를 보던 나는 무한한 슬픔을 느꼈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타임이나 뉴스위크지를 꽂고 다니며 종로통을 방황하던 바로 그들이다. 노래 ‘고래사냥’의 배경은 당연히 가상공간이지만 현실 공간에도 엄연히 무대가 존재한다. 강원도 남애 해안에 가면 ‘고래사냥’의 무대가 있다. 미시령 터널 덕분에 서울에서 불과 두 시간 반이면 동해 바닷가다. 대관령 굽이굽이 옛길을 상상하던 나는 너무나 편리해진 터널 길에 말을 잊는다.

‘고래사냥’의 무대 남애 해변은 저 유명한 정동진역에서 조금만 올라오면 있다. 노래나 영화에 등장하는 것 못지않은 총천연색 관광열차가 해안가 파도를 내려다보며 달린다. 당연히 완행열차다. 바로 영화 속에 등장했던 그런 열차다. ‘고래사냥’의 유명세에 힘입어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만든 인공적인 장소, 하지만 사시사철 노래 ‘고래사냥’을 그리워하는 386세대의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펜션 이름도 고래사냥이고 횟집 이름도 고래사냥이다. 늦여름, 여전히 피서철임에도 인근 경포대나 속초에 비해 한적하다 못해 고적하기까지 한 남애 바다는 송창식의 또 다른 노래 ‘철 지난 바닷가’가 딱 어울릴 법한 쓸쓸한 풍경이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로 접어든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지만 우리는 떠나야 한다. 동해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야 할 때다. ‘고래사냥’은 우리더러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떠나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고래는 삶에 찌든 저마다의 가슴에 숨 쉰다. 가을이다. 이 가을에는 사라지는 모든 것을 위해 한 번쯤 고개를 숙여봐야겠다.

신동아 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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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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