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에 두석을 씌운 옥쇄함 형식의 이 작품은 전통에서 한발 나아간 새로운 양식이다.
“1990년대 초까지는 생계에 급급했습니다. 공방을 차렸다가 불이 나서 다른 사람 가게에 들어가야 했고…. 아는 사람들이 ‘도와주겠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참고 버티며 나 자신과 싸워왔지요.”
2년 전 경기도 파주에 땅을 사서 안착하기까지 그는 길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기계로 장석을 제작할 때도, 남이 장석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손으로 만드는 장석 일을 포기하지 않고 버텨왔다.
그에게 장석 일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다 똑같이 힘들다”는 대답이다. 어떤 점이 가장 재미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역시 “다 재미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그에게 일은 솜씨와 지구력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 즉 큰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비록 스승이 있었다 하나 전통 도제 관계처럼 철저한 훈련과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거의 혼자 힘으로 기술을 익혀야 했음에도 일을 특별히 힘들어하는 것 같진 않다. 대신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운수의 흐름과 싸워 견뎌내는 것이 큰일이었던 거다.
자신의 불운과 극복 과정을 구태여 내세우지 않는 그이지만, 과거 인터뷰 자료를 보면 20대에는 죽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고, 절에서 출가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느 스님이 지어주었다는 그의 호 ‘심경(心耕)’은 마음밭을 잘 갈고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띠인 그의 삶은 마치 거친 돌밭을 묵묵히 가는 소의 우직함과 닮았다.

1949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3남4녀의 막내였다. 곧 6·25전쟁이 발발하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지만 목수였던 아버지가 휴전 이듬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일가족은 연고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전쟁 직후, 누구나 사는 게 힘들었지만 일곱 남매와 홀로 된 어머니의 삶은 신산하기 짝이 없었다.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고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한 막내는 늘 굶주리며 용산의 금양국민학교를 다녔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처음 찾은 일자리는 주물공장이 몰려 있던 남영동의 삼흥주물. 친구 따라 찾아간 첫 일자리가 주물공장이었으니, 쇠붙이와의 인연은 팔자에 있었던 것 같다.
“철을 녹여 재봉틀 부속이나 기어 같은 기계 장치를 주로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제가 가구 장석을 만드는 두석장이지만, 금속을 다루는 장인이니만큼 금속과 관련된 것은 다 할 줄 알아야지요.”
장석과 자물쇠가 전문인 두석장을 넘어서 금속을 다루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 다루게 된 데는 어린 시절 3년여 몸담았던 주물공장의 경험이 바탕이 됐을 터다. 어려서도 그는 ‘불굴의 화신’이었던 것 같다. 솜씨도 좋았지만 남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수당도 많이 받았다. 그런 성실함과 실력 덕택에 강원도의 큰 석회공장에 취직도 됐단다. 석회공장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들려주길 바랐지만 “그런 이야길 뭣하러 하겠느냐”며 썩 내켜하지 않는다. 열일곱 살 청년이 객지에서 새벽부터 야간작업까지 일에 묻혀 살던 시절을 되돌아보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렇게 타지에서 힘들게 일하다 몇 달 만에 서울로 올라와 다시 주물공장에서 고생하던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준 것은 막내누이였다. 누나의 시누이 남편이 인사동에서 장석 공방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박문열의 스승 윤희복 선생이다. 공방이라고 해봤자 인사동의 유명한 표구사 동문당 뒤편 한옥 부엌에 마련한 이름도 없는 일터였다. 인사동에서 거래되는 가구의 장석을 만들거나 수리해주는 곳이었다. 작고 초라하긴 해도 그가 처음으로 장석과 연을 맺은 곳이니 나름대로 특별한 감흥이 있었을 법한데, 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장석에 무슨 관심이나 적성이 있어서 간 게 아니라 생계를 해결하려고 일하러 간 것이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