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호

펑펑 오일머니 종착역은 중동 아닌 美·유럽

세계경제 뒤흔든 오일쇼크 ‘흑역사’

  • 조인직 | 대우증권 동경지점장

    입력2015-04-22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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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도성장기 한·일, 1 · 2차 오일쇼크에 뒷걸음
    • 유가 전망? 차라리 동전을 던져라!
    • 미·영 7대 오일 메이저는 유대인 가문 소유
    • 중동-美 ‘오일전쟁’은 중동-이스라엘 전쟁
    펑펑 오일머니 종착역은 중동 아닌 美·유럽
    국제 원유 가격이 배럴당 40달러대로 떨어진 데 이어, 6월에는 30달러대까지 폭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배럴당 140달러대까지 치솟은 2008년에 비하면 20~30% 수준에 불과한 가격이다.

    한창 잘나가던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중에서도 ‘자원무역’ 위주로 경제구조가 형성된 브라질과 러시아는 이미 달러 대비 자국 통화(헤알화, 루블화) 가치가 1년 전보다 40% 이상 폭락했다. 이들 국가의 올해 국내총생산(GDP)도 마이너스 성장을 못 벗어날 듯하다.

    세계 3대 유종인 북해산 브렌트유(Brent oil)를 기준으로 최근 20여 년간 가격 추이를 살펴보면 유가는 롤러코스터 장세를 보였다. 1994년 이후 줄곧 배럴당 20달러 안팎을 유지하다가 중국과 신흥국의 부상으로 세계경제가 고성장을 구가하던 2000년대 들어서면서 30달러를 돌파해 계속 상향곡선을 그렸다. 2005~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오기 전까지 유가는 수직 상승해 140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러다 다시 40달러대까지 곤두박질치는 예측불허 장세가 이어졌다. 유가는 2011년부터 3년간 월평균 100~110달러를 오르내리면서 안정세를 유지하다가 지난해 7월 이후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면서 최근 40달러 중반대로 떨어졌다.

    30달러? 80달러?

    한국과 일본처럼 자원 빈국이면서 고도 공업국인 나라들, 즉 에너지 수입률이 높고 석유와 직결되는 중화학공업 위주 경제를 기반으로 한 국가들 처지에선 유가 하락이 반갑다. 유가 하락은 수입물가 인하에 따른 소비심리 증가 효과에도 도움이 된다. 원자재 구입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원유 값이 하락하면 당연히 기업의 영업이익도 늘어난다.



    한국과 일본 경제에 유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두 차례의 세계 오일쇼크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1960년 이후 1998년 외환위기(-6.9%) 때까지 40년 가까이 대내외의 파고를 넘어 ‘중단 없는 전진’을 해온 한국 경제는 2차 오일쇼크(1979년) 여파로 1980년(-1.5%)에 딱 한 번 뒷걸음질쳤다. 일본도 본격적인 정치 안정을 가져온 ‘자민당 체제’가 발족한 이후 1956년부터 1973년까지 연평균 9.1%의 고도성장을 거듭하다가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인해 1974년 -0.5%의 역성장을 기록했다.

    국제 유가에 대한 전망은 분분하다. 일본의 글로벌 투자은행사인 노무라증권은 올해 2분기를 기점으로 반등해 연말께는 배럴당 80달러 선까지 회복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 원유 소비가 여전히 역대 최고치를 찍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반면 골드먼삭스는 공급과잉 쪽에 방점을 둔다. 게리 콘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최근 ‘셰일가스 혁명’이 더해져 미국 원유 재고량이 4억5000만 배럴까지 상승해 80년 만에 최대치에 육박했는데, 이 때문에 올해 유가가 30달러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은 ‘석유 자원이 없는 나라’라는 한계적 인식 때문에 가격결정의 원리나 과정은 도외시하고 가격의 흐름과 결과에만 천착해온 측면이 있다. 또 공개된 정보가 적은 ‘먼 나라 중동’에서 주로 가격을 결정한 탓에 예측 자체가 어려웠다. 실제 유가의 흐름을 어느 정도 예측하려면 유가 결정과 관련된 역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투자은행이나 연구기관들은 오르면 오르는 대로,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수만 가지의 이유를 대기에 헷갈리기만 한다.

    레너드 그리고리예프 러시아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 교수는 최근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가의 방향성을 알고 싶다면) 차라리 동전을 던지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전문가도 이런 형편이니, 우리는 나무를 볼 게 아니라 좀 더 멀리서 숲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세븐 시스터스 vs OPEC

    2차대전 후 새롭게 시작된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 체제에서 석유 가격 결정 주도권을 쥔 쪽은 ‘오일 메이저’라고 하는 미국·유럽 중심의 7개 석유회사였다. 엑손·모빌·걸프·소칼(스탠더드)·텍사코 등 미국 5개사, 네덜란드 및 영국 자본이 섞인 로열더치셸,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 등이다.

    이른바 ‘세븐 시스터스’라고도 한 이 회사들은 1950년대 한때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90%, 정제 능력의 75%를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찍이 중동 유전사업에 진출해 ‘깃발’을 꽂은 이 회사들 때문에 중동 산유국들은 자기 땅에서 나오는 석유임에도 생산과 판매 통제권은 물론 채굴 감독권도 행사하지 못했다. 일견 불평등해 보이는 계약에 의해 일정한 사용료와 세금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븐 시스터스를 견제하기 위해 중동 국가들을 중심으로 1960년 결성된 단체가 석유수출국기구(OPEC·Organization of Petrolem Exporting Countries)이다.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등 5개국이 창립 멤버였다. 1960~70년대에 카타르, 알제리, 에콰도르, 나이지리아, 리비아, 아랍에미리트 등이 추가로 참가한 데 이어 2007년 앙골라가 마지막으로 가입하면서 12개국 협의체로 덩치가 커졌다.

    펑펑 오일머니 종착역은 중동 아닌 美·유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의 무력충돌은 7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거대한 화염이 솟아오르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위)와 폭격 이후.

    2015년 현재 벌어지는 유가 하락의 배후 조종자도 다름 아닌 OPEC이다. 미국발 ‘셰일가스 혁명’의 위협을 느낀 이들은 선제적인 ‘시장 교란’에 나섰다. 분야가 좀 다른 사례지만, 삼성전자가 막대한 공급량을 바탕으로 메모리 반도체 가격 인하 경쟁을 통해 지난 10여 년간 일본과 대만 경쟁업체들을 고사시키려 한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OPEC은 단순히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돕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발족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실제로 원유 값을 인위적으로 상승시켜 1973년 전 세계에 1차 오일쇼크를 일으킨 배경도 사실은 그해 일어난 제4차 중동전쟁 때문이다. 1948~1973년 4차에 걸쳐 진행된 중동전쟁은 한마디로 이스라엘과 여타 아랍 국가들이 현 이스라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방의 거주권을 둘러싸고 벌인 싸움이다.

    막강 親유대 네트워크

    이집트와 요르단 사이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팔레스타인에는 2000여 년 전 유대인들이 살았다. 그러다 로마제국 시대에 이들은 유럽 각국으로 추방됐고, 이들만의 거주지도 사라졌다. 예수의 죽음에 관여했고, 이들의 선민(選民)의식이 다른 민족들과 분란을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유럽에서도 별도 격리지역인 ‘게토(Getto)’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도 덧씌워졌다.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받는 것을 천한 일로 여긴 주류 기독교인들은 금융업에 한해 유대인들에게 살길을 열어줬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의 자본 축적에 큰 도움이 됐다. 청교도 혁명을 시작으로 나폴레옹 전쟁까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각종 분쟁과 전쟁에서 ‘이길 만한 쪽’에 붙어 자금을 조달해주며 조용히 재산을 불린 유대인들은 19세기부터 다시 그 옛날 자신들의 조국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을 전개했다.

    1차대전 때 전쟁 승리에 협조하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독립 동의를 받은 이스라엘은 미국 독립전쟁 후부터는 ‘떠오르는 신주류’ 미국에 많은 줄을 대기 시작한다. 로스차일드의 진출과 JP모건의 설립으로 대변되는 ‘금융제국’의 설립, 아울러 통화발권을 담당하는 연방준비제도(FRB)에 자기 사람을 심어 규정을 조종하고, 거기서 축적된 자본을 정계와 산업계 전반에 쏟아부으면서 ‘친(親)유대’ 기반을 다졌다.

    이스라엘은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을 분할하는 안이 세간의 예상을 깨고 통과되자 아랍 원주민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표결 전만 해도 아랍인 중심의 팔레스타인 연방안이 우세했으나 미국의 입김이 제3세계 국가들을 움직였다. 아랍인들이 ‘2국 분할안’을 계속 거부하자 이스라엘은 오히려 1년 뒤인 1948년 5월 팔레스타인 전체를 이스라엘 독립국으로 선포했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위해 주변 아랍 국가들이 연합전선을 펼쳤다. 그 결과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에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세븐 시스터스 역시 간판만 미국과 영국 회사일 뿐 실상 유대계 소유라는 사실이 OPEC 결성을 자극했다. 엑손 · 모빌 · 소칼 · 걸프는 록펠러 가문, 로열더치셸은 로스차일드 가문, 텍사코는 노리스 가문의 소유이며, 브리티시 페트롤리엄 역시 국책회사지만 뿌리는 유대계 자본이다.

    세븐 시스터스는 2차대전 이후 단단한 카르텔을 통해 석유 수요 예측 및 이에 따른 생산 할당을 했으며, 유전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원유 가격을 조금씩 인하했다. 결국 공급자인 아랍 산유국의 이익보다는 선진 경제권의 구매자인 원유 소비국들의 입맛을 충족시킨 셈이다. 세븐 시스터스는 1959년 산유국의 동의 없이 원유 가격 인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1960년 OPEC 설립의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한국 · 일본에 충격파

    OPEC은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세븐 시스터스와 함께 가격결정권을 행사했고, 이듬해부터는 세븐 시스터스로부터 석유 채굴사업권도 이양받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OPEC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과 영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원유 생산량을 25% 감산한 뒤 본격적으로 가격결정권의 칼날을 휘둘렀다. 전쟁 직후 1배럴당 3.0달러에서 5.12달러로, 1974년 1월에는 다시 11.65달러, 3개월 사이에 4배 가까이 올랐다.

    오일쇼크는 에너지원을 석유에 의존하던 공업국에 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은 1972년부터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 막 중화학공업시대로 전환을 꾀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1973년 12.0%이던 경제성장률은 1974~75년 평균 6.6%로 반토막 났다. 무역수지 적자폭도 10억2000만 달러에서 22억9000만 달러로 2배 이상 늘었다.

    석유와 거의 100% 연동되는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 3대 산업이 성장 엔진이던 일본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1974년 일본은 고도성장 시대의 1막을 고하는 마이너스 성장(-0.5%)을 기록했다. 일본은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석유 금수(禁輸)조치 때문에 진주만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할 만큼 석유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했다. 오일쇼크는 일반 소비제품에 대한 사재기 현상이 끊이지 않는 등 큰 폭의 물가상승(11.6%)으로 이어졌다. 당시 세계 물가상승률은 오일쇼크 이전인 1973년 9.6%에서 1974~75년 연평균 13.8%로 급상승했다. 세계 경제성장률도 1973년 6.8%였다가 1974~75년에는 2.4%로 3분의 1토막이 났다. 불황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도 뒤따랐다.

    1979년에는 2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친미 정권이던 팔레비를 몰아내고 권좌에 오른 이란 혁명이 발단이었다. 호메이니 정권은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미국의 입맛에 맞는 가격대로 원유 수출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하루 550만 배럴의 원유 생산량을 4만 배럴로까지 줄였다. 이로 인해 배럴당 원유 가격은 1차 쇼크보다 2.5배 높은 28달러대까지 치솟았다.

    오일쇼크 음모론

    걸프전과 중동 분쟁으로 인해 유가 변동성이 커지는 것을 두고 미국 오일 메이저와 산유국 부자들 간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음모론이 한때 인터넷에 확산됐다. 결과론으로만 보자면 그럴듯한 주장이다. 원유 가격 인상으로 막대한 돈을 챙긴 산유국 오일머니의 종착역(혹은 주차장)은 결국 미국 금융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이 ‘배럴당 OO리얄(사우디 화폐)’ 이라고 하지 않고 ‘OO달러’라고 하는 걸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산유국들이 아무리 달러로 돈을 많이 벌어도 자국에는 그만한 자금 수요가 없기 때문에 그 달러를 돌려서 추가로 운용수익을 낼 안정적인 예금처는 당시 미국 은행만한 곳이 없었다. 요즘처럼 자유화한 세계 자본시장에서 아부다비투자청(ADIA) 같은 정부계 국부펀드(SWF·Sovereign Wealth Fund)가 알아서 해외 각국에 투자하며 자산 운용을 하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주요 글로벌 대출처를 꿰고 있던 미국 은행의 위상이 막강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미국 본토 은행은 아니더라도 유럽계 은행에 달러를 예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로 인해 이른바 ‘유로 달러 시장’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오일머니가 넘쳐난 미국 은행들이 주시한 곳은 한창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며 개발투자자금을 구하고 있던 중남미와 동유럽, 아시아 지역이었다. 미국 은행과 유로 달러 시장 자금은 융자 혹은 유로본드 등의 증권화 상품을 통해 개발도상국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 유럽, 일본의 주요 은행들이 대상 국가나 프로젝트의 리스크를 낮추려고 공동 협조 융자를 일으키는 신디케이트론(Syndicate Loan)도 이 무렵 본격적으로 태동했다.

    이들 오일머니, 오일달러가 가장 강력한 번뇌의 씨앗을 낳은 곳은 지금도 누적 국가 부채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중남미 지역이다. 수출보다는 투자를 받아 개발하는 대신, 각종 소비재 등은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체제가 많았다. 처음엔 달러를 싸게 공급받다가 종내에는 미국이 출구전략을 가동하자 대출금리가 상승, 부채 이자를 갚지 못해 디폴트(Default · 채무불이행)를 선언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채무국 처지에서는 고금리와 더불어 고유가에 따른 에너지 비용 상승, 이로 인한 무역수지 악화, 외화준비금 감소 등이 겹치게 된다. 양적완화 종료에 맞춰 올해 하반기로 예상되는 미국의 금리 상승 때문에 벌써부터 세계의 많은 유동자금이 ‘떨고’ 있는데, 40여 년 전에도 비슷한 패턴이 발생한 것이다.

    무너진 ‘브라질의 기적’

    요즘은 ‘신흥국(Emerging Countries)’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1970~80년대에는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ies)’이나 ‘발전도상국(Less Developed Countries)’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경제 우등생 국가가 많았다. 이들 중엔 한강의 기적만큼이나 급성장한 국가들도 있지만, 두 차례의 오일쇼크 및 이에 따른 부산물인 ‘잉여 달러’를 제어하는 미국의 금융정책에 휘둘리면서 대부분 몰락했다. 한국처럼 50년 이상 ‘중단 없는 전진’을 한 국가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브릭스(BRICs)의 대표 국가인 브라질은 원래 1968~73년 ‘브라질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연평균 두 자릿수대의 경이적인 성장률을 시현했다. 수출은 19억 달러에서 62억 달러로 늘었고, 외화준비금은 2억5000만 달러에서 64억 달러로 26배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대외채무가 38억 달러에서 125억 달러로 늘었지만, 이 같은 외화준비금 여력에 힘입어 해외 은행들이 평가한 신용도는 훨씬 높았다.

    브라질 경제 역시 자원무역 외에는 외자를 투자받아 자동차나 가전 등 내구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내수형 경제’를 통해 몸집을 불려나갔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이후 밀려든 오일머니 차관은 한번 더 경제성장을 펌프질할 수 있는 마중물로 보였다. 실제로 1974~78년 5년간 연평균 8%대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문제는 이 기간 동안 대외채무가 435억 달러로 3배 이상 치솟은 것. 결국 1979년 2차 오일쇼크 이후 수입물가가 폭등한 데 이어, 미국 FRB에서 단기금리를 20% 수준까지 인상하자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1978년 27억 달러에 불과하던 이자 지출이 1982년에는 4배가 넘는 113억 달러로 팽창했다.

    결국 당시 중남미 발전도상국들의 롤모델이던 브라질은 1983년 디폴트를 선언하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신규 차입을 받는 한편, 국제은행단과 기존 채무에 대한 경감 및 재조정(rescheduling)을 요청하게 된다. 물론 브라질보다 한발 앞서 1980년에는 스리랑카·볼리비아·페루, 1981년에는 폴란드·루마니아·중앙아프리카공화국, 1982년에는 멕시코·아르헨티나·에콰도르·나이지리아·터키가 디폴트 선언을 했다. 그리고 1983년에는 브라질 외에도 칠레, 파나마, 필리핀, 모로코, 잠비아,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이 비슷한 길을 따랐다.

    OPEC 국가들이 벌어들이는 오일달러의 존재감은 1980년대부터는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이 아니더라도, 오일쇼크에서 파생된 교훈을 체득한 선진 경제권에서 아랍권의 자원민족주의에 맞설 수 있는 대체에너지 개발 및 위험회피 금융기법 등을 서둘러 도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2015년 현재 오일달러 총액은 약 3조6000억 달러로 추산되는데, 이는 중국의 외환보유고(3조8000억 달러) 및 전 세계 헤지펀드(3조 달러) 등과 비견되는 규모다.

    유가는 숨 고르기 중

    다만 OPEC와 ‘맞장’ 뜰 수 있는 선진국이나 대형 자본이 아닌, 개별 국가로 들어가면 사안은 1970년대 오일쇼크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막대한 유전을 보유한 OPEC이 미국 오일 메이저 세력에 비교우위의 자신감을 느끼는 순간 다시 유가 상승은 이어질 것이고, 비산유국의 물가 상승 및 경상수지 적자 등도 뒤따를 것이다. 신흥국의 부채는 다시 한 번 악화할 것이고, 디폴트를 막기 위한 미국 중심의 국제기구 개입도 불가피하다. 그리스, 포르투갈 등 남유럽의 재정건전성 취약 국가 중심으로 신용도 하락 및 국채 투매 현상이 벌어지면 또 다른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오일은 죽지 않았다. 다만 가격 하락을 통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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