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 출마 전 정부 실력자들과 의논
- ‘친박(親朴)’도 아니고 덕 본 것도 없어
- ‘개인’에 충성하지 않으니 배척하더라
- 애국하는 데 좌우가 따로 있나
2013년 8월 처음으로 복수 후보가 출마해 김명환 전 해병대 사령관이 회장(14대)에 당선됐다. 하지만 김 회장은 재임 1년 만에 인사청탁, 금품비리 의혹에 휩싸여 지난해 9월 사퇴했다. 이후 회장대행 체제로 운영되다 올 2월 25일 보궐선거를 치렀다.
4명이 출마한 이 선거는 청와대 낙점설, ‘박심(朴心)’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결국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지낸 허준영(63) 전 경찰청장이 당선됐다. 당선 직후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대의원들 도움으로 선출됐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취임식 다음 날인 3월 25일 자총 회장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트레이드마크인 ‘올백’ 스타일 머리와 여유로운 표정, 느릿느릿한 말투는 여전했다. 주황색 넥타이가 눈길을 끌었다. 주황색은 의욕 넘치고 사교성 강한 사람이 좋아한다고 했던가.
“나는 ‘알부남’인데…”
▼ 어제 취임식을 치렀다. 소감이 어떤가.
“(당선 이후) 한 달 일하고 보니 새로운 기분이 든다. 앞으로 보람 있게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취임식장에 사람이 차고 넘쳤다.”
그가 사진기자에게 “웃는 모습만 찍어달라”고 농담을 건넸다. “내가 ‘알부남(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인데 강성 이미지만 부각돼서….”
선거 과정이 워낙 치열했던 탓인지 후유증이 심하다. 32표 차이(181표 대 149표)로 2위를 한 이동복 전 의원이 법원에 회장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사유는 선거법 위반.
“억지라고 본다. 선거 과정에서도 그쪽에서 고발을 많이 했다. 우리도 고발할 거리가 많았지만 연맹의 명예를 고려해 자제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전체적으로 문제없다고 결론 내린 사안이다.”
허 회장은 “선거를 치르면서 선거법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선거 날짜 지정, 선거인단 및 선거관리위원회 구성 등에 불합리만 면이 많더라. 선거인단이 454명이었다. 2월 25일이 선거일인데 2월 14일부터 선거운동이 가능했다. 그것도 직접 만나선 안 되고 전화나 e메일로 해야 했다. 선거인단 명부를 2월 14일 공개했다. 내가 귀동냥으로 들은 인원보다 두 배가 많아 애를 먹었다.”
▼ 다른 후보들 사정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다른 후보들은 알고 있더라. 나만 모르게 했다.”
▼ 청와대 뜻이 작용했나.
“선거 과정에서 이동복 씨가 지방 대의원들한테 ‘내가 (청와대에서) 낙점 받았다’고 공공연히 얘기했다. 녹음해놓은 게 있다. 청와대에 정식 채널로 알아봤더니 ‘우린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만약 낙점한 게 사실이라면 나한테 귀띔했겠지. 내가 평생 공직에 있던 사람인데 (청와대 뜻이 그렇다면) 출마를 강행할 리 없지 않은가. 이씨는 자민련 출신이고, 나는 이 정부 탄생에 기여한 사람이다.”
이동복 씨는 1996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현재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자유민주주의시민연합 공동의장이다.
이명박 정부 때 코레일 사장을 지낸 허 회장은 2012년 제19대 총선 때 새누리당 후보로 서울 노원병에 출마했다. 애초 강남을에서 출마할 생각으로 예비후보 등록까지 했으나 당의 지시에 따라 ‘불리한’ 지역구로 옮겨간 것이다. 노원병 선거에선 노회찬 통합진보당 후보에게 패했다.
허 회장은 2012년 대통령선거 때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본부 사회안전본부장을 맡았다. 이듬해 2월 노회찬 의원이 안기부 X파일 사건에 대한 대법원 유죄판결로 의원직을 잃는 바람에 노원병 보궐선거가 실시됐다(노 의원은 2005년 발생한 안기부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이른바 ‘삼성 떡값’을 받았다는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했다가 명예훼손으로 기소됐다). 새누리당 후보로 재출마한 허 회장은 무소속 안철수 의원에게 석패했다.
“정치 생각 안 한다”
▼ 자유총연맹 회장선거에 출마할 때 청와대와 교감이 있었나.
“현 정부 실력자들과 의논은 했다. 다들 내가 적격이라고 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를 수호하는 연맹의 이념이 내 삶의 궤적과 일치했다. 연맹 회장은 무보수 명예직이다. 청렴한 사람이 필요한 자리다. 합동연설회 때 월급 안 받아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아내한테 월급 안 가져와도 된다는 허락 받고 나왔다’고 답했다.”
▼ 돈 많이 벌어놨나.
“그냥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을 정도다.”
▼ 활동비는 받아야 하지 않나.
“현재 카드로 쓸 수 있는 활동비가 월 200만 원이다. 현찰로 쓸 수 있는 게 300만 원인데, 이걸 안 받기로 했으니 카드 활동비를 조금 올려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경찰청장을 지낸 그는 “역대 회장 중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한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며 ‘검증된 사람’임을 강조했다.
▼ 여전히 정치에 뜻을 두는 것 아닌가.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다. 지금은 국회보다 전국을 무대로 삼아 활동하는 이 자리가 나한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정치 생각은 안 한다. 여기서 보람 있게 일하고 싶다.”
▼ 국회의원 선거 두 번 치르면서 정치판에 실망이나 환멸을 느꼈을 법한데.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과 정치를 했던 사람은 다르더라. 나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봉사를 중시한다. 그래서 어느 개인에 대한 충성이 내키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 경찰청장에서 물러난 후 열린우리당에서 경북도지사 출마를 권유했는데 거절했다. 내가 국민을 위해 일한 거지 정권을 위해 충성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내 정체성과 맞는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 권력 주변에서 나를 친박(親朴)으로 몰아 입각도 못하게 했다.”
‘안철수의 대통령’
▼ 친박이 맞나.
“아니다. 2007년 이명박, 박근혜 후보가 당내 경선을 벌일 때 중립을 지켰다. 이 후보로 결정된 뒤에는 대선캠프 행정안전본부장을 맡아 도왔다. 그런데 어떤 개인에 대한 충성을 보이지 않으면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더라. 친박도 그렇다. 내가 ‘친박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은가.”
▼ 그래서 피해를 봤다는 얘긴가.
“피해를 봤다기보다는 덕을 본 게 없다.”
▼ 기질 때문인가.
“기질이라기보다, 하여간 공직자와 정치인의 자세는 다른 것 같다. 안철수와 맞붙을 때 주변에서 ‘안철수 바람을 차단하려면 박 대통령과 찍은 사진으로 유세차를 도배해야 한다’고 권했다. 나는 반대했다. 대통령 되기 전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만, 대통령이 된 이상 그건 옳지 않다고.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니 안철수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선거에 이기려 이용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 (이용한다 해도) 실제로 도움도 안 됐을 것 같다. 대통령 인기가 별로라서.
“그런 계산을 떠나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기종은 확실한 종북”
허 회장의 임기는 내년 2월까지다. 김명환 전 회장 전임자인 박창달 전 회장의 잔여 임기를 채우는 것이기 때문. 연임이 가능하다.
박 전 회장은 세 차례 회장을 맡았다. 2009년 3월 비리혐의로 회장직에서 물러난 권정달 씨의 뒤를 이어 회장(11대)에 오른 후 12, 13대 회장으로 연임한 것. 2013년 2월 13대 회장에 당선된 박 전 회장은 그해 6월 공금횡령 의혹이 불거지자 자진사퇴했다. 두 달 뒤 보궐선거에서 첫 경선을 통해 김명환 전 해병대사령관이 당선됐는데, 그가 다시 중도 사퇴하는 바람에 재보궐선거를 하게 된 것이다.
▼ 취임식에서 “종북(從北) 세력을 두더지 잡듯이 분쇄하는 일은 중단 없이 계속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전체 맥락을 봐야 한다. 우리는 지금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 급급해선 안 된다. 그 싸움은 이미 끝났다.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자유민주주의 완성이다. 안전한 자유를 누리고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안보를 튼튼히 하고 공공의식을 업그레이드 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
다만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서, 주한 미국대사를 칼로 찌르는 종북 세력을 방치해선 안 된다. 그런 세력을 놔두고는 자유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마이뉴스에서 일부분만 부각해 보도하는 바람에….”
▼ 천안함 사고 원인에 대한 정부 공식 발표를 인정하지 않거나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 중에도 종북 세력이 있다고 보나.
“그런 사람들은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의 경우 그 정도면 충분히 (북한 소행이라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본다. 그런 걸 자꾸 왜곡하고….”
▼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부와 다른 주장을 하거나 비판을 할 수 있다. 설사 틀린 주장이라도. 무조건 종북과 연결하는 건 무리라는 시각도 있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딱 떨어지는 증거가 있을 때나 종북이지. 자기 의견이야 얼마든지 발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난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이 아니다.”
▼ 미국대사를 습격한 김기종은 확실한 종북으로 보는 건가.
“그렇다. 있어선 안 될 일이다.”
▼ 자유총연맹에 대해 심하게 표현해 ‘비리총연맹’이라고도 한다. 구조적 비리가 있고, 역대 회장 중에는 배임·횡령 등으로 조직에 피해를 끼쳐 실형을 산 사람도 있다. 허 회장에게 조직 혁신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렇다. 내가 (경찰청장 임명 때) 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한 거나 철도노조의 불합리한 파업 관행을 바로잡은 게 다 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회계와 예산을 유리알같이 투명하게 집행할 것이다.
또한 예산을 전국 각 지부에 우선적으로 배정해 현장 활동이 활기를 띠게 할 것이다. 그간 집행부에서 턱도 없는 사업에 손댔다가 연맹에 큰 손해를 입힌 적이 몇 번 있다. 앞으로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철저히 검토한 후 집행하겠다.”
그는 코레일 사장 재직 때의 경험을 들려줬다.
“철도공사 사장이 된 지 얼마 안 돼 현대건설로부터 1조2000억 원에 공항철도를 인수했다. 노조가 엄청 반대했지만 전문가 검토를 거쳐 인수를 결정했다. 외부에서 공항철도 사장을 노려 로비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 차단하고 내가 무보수로 사장을 겸직했다. 지금 공항철도를 되팔려고 하는데 1조8000억 원에 협상 중이다. 5년 만에 6000억 원 벌게 된 셈이다.”
자총에 대한 정부 지원금은 많이 줄어든 상태다. 과거 20억 원까지 받았으나 지난해는 6억 원으로 줄었다고 한다.
▼ ‘낙하산 인사’로 들어온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들, 거의 다 나갔다.”
▼ 인사와 관련해 외부 청탁이 꽤 있을 텐데.
“알다시피 내가 그런 면에 강점이 있지 않나. 경찰청장 할 때도 소신껏 했지 않나.”
▼ 청와대에서 요청하면 거절하기 쉽지 않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잘 설명하겠다.”
허준영 회장은 “자유총연맹은 애국단체”라며 “애국하는 데 좌우가 따로 있냐”고 말했다.
“목표는 자유민주주의 완성”
▼ 가장 역점을 두는 분야는.
“자유민주주의 완성이 목표다. 이를 위해 먼저 회원 수를 늘릴 것이다. 지금 150만 회원이라 하지만 허수가 많다. 그리고 젊은 조직을 만들겠다. 젊은 회원 30만 명 확보가 목표다. 젊은이들이 매력과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겠다. 청년들과 계속 모임을 갖고 의논 중이다.”
▼ 자총이 보수성이 강한 단체인 만큼 젊은 층을 끌어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나는 보수-진보로 나누는 걸 반대한다. 보수라고 칭하면 괜히 반대세력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나는 스스로를 ‘진수’라고 표현한다. ‘진보적 보수’라는 뜻이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애국단체’라고 하고 싶다. 애국하자는 데 좌우가 따로 있나.”
▼ 종북좌빨 못지않게 극우꼴통도 문제라는 게 세간의 인식이다. 우리 사회를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국민, 애국 이런 차원에서 봐야 한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에 파벌이 많은데 그런 걸로 편 가르기를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딸만 둘인 그는 3월 중순 둘째딸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했다. 첫째딸은 지난해 결혼했다.
▼ 노래를 잘하는데, 축가를 부르진 않았나.
“그럴 생각도 했다. 하지만 부르다가 울까봐 포기했다.”
그의 노래 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국내외 정통 가곡을 즐긴다.
“큰딸 결혼할 때는 안 울었다. 그런데 둘째딸 보낼 때는 마지막에 눈물이 나더라. 그걸 큰딸이 보고 ‘왜 나 결혼할 때는 안 울었느냐’고 따지더라. ‘너 할 때는 다음에 울 기회가 있다 싶어 참은 거다’라고 말해줬다.”
그는 “참 좋은 사돈을 만났다”고 흐뭇해했다. ‘감성’과 ‘강성’ 사이의,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 허준영이 흔들 자총 개혁의 깃발은 어떤 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