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권력, 미래 권력 오가며 동시 관리”
- “대권 포석으로 반기문 동생 경남기업 상임고문 앉혀”
- “이완구와 부부동반 골프…반기문 밀다가 멀어져”
- “사면 때 친노에 다리 놔준 사람들 있어”
이 메모의 ‘각주’에 해당하는 그의 50분짜리 생전 육성도 세상에 나왔다. 이 인터뷰를 딴 신문사는 포커판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같은 특종 뉴스를 연일 보도한다. 여기에 물린 ‘선수’들은 ‘트위터 계정 삭제’(홍준표)나 ‘전화 스토킹’(이완구) 같은 ‘멘붕’ 정신상태를 드러낸다. 그 어떤 드라마 작가도 상상하지 못한 충격적이고, 기상천외하고,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 현실에서 전개된다.
“한동안 나라 문 닫을 뻔”
한 여권 인사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한다. “메모지의 이병기, 이완구 뒤에도 숫자가 적혀 있었으면 한동안 나라 문 닫을 뻔했다”고. 당장 드러난 폭로만으로도 현직 대통령 측의 불법 대통령선거자금 수수가 의심되는 판이다.
검찰은 특별수사팀을 꾸려 수사에 나섰다. 그러나 고약한 것이, 검찰도 ‘하명 수사’니 ‘별건 수사’니 하는 논란으로 이 사달을 낸 ‘플레이어’ 중 하나다. 그러니 1라운드도 안 끝났는데 벌써 특별검사로 바꾸자는 말이 나온다.
야당은 연일 로비 실체를 규명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자기네 집권시절의 악취 나는 ‘성완종 사면’은 방어하기 바쁘다. 좌우, 위아래에 폭넓게 걸쳐져 향후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고 정치권 전체의 리더십이 흔들흔들한다.
성 전 회장의 정치적 삶이 어떠했기에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됐는지를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발견된 하나의 키워드는 ‘충청’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많은 이야기가 가지를 뻗었다. 성 전 회장 및 그의 형제들과 두루 친분이 있는 충청권 인사 A씨와 대화를 나눴다.
▼ 성 회장은 집념이 강한 분인 것 같아요.
“남이 하면 안 되는 일을 어렵게 어렵게 결국은 되게 만드는 사람?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는 사람? 충청지역에선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요. 좋게 보는 쪽은 ‘추진력이 대단한 사나이’로 봅니다. 자살 소식을 듣고도 ‘의지가 강한 사람이 오죽하면 그랬을까’라고 해요. 죽기 전날 기자회견도 마치 ‘태진아 기자회견’처럼 울면서 하던데 동정이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나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쪽은 ‘수단방법 안 가리는 사람’으로 봐요. 충남 서산 출신인 성 전 회장은 충청도 지연(地緣)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 즉 충청 인맥을 중시했어요. 기본적으로 이런 인맥으로, 로비의 힘으로,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본 거죠. 그러나 이번에 그렇게 믿은 인맥에서 모든 게 막히니까 극단적 선택을 한 것 같아요.”
▼ 성 전 회장은 32세에 대아건설 사장이 되고 2003년 경남기업을 인수하면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했죠. 그러나 언제부터 정치권과 연이 닿았는지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사정은 내가 좀 알아요. 그는 사업 초창기인 1980년대 초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육사 11기 동기생으로 실세이던 안교덕 당시 민정당 의원을 만나면서 정치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어요. 이어 오장섭 전 의원 같은 충남 출신 청년 기업인들과 함께 민정당 재정위원 등으로 활동했죠.”
이와 관련해 다른 충청 출신 인사 B씨는 “성 전 회장은 민정당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을 알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친한 사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 실장은 1985년 2월부터 1988년 3월까지 민정당 총재 보좌역으로 활동했다. A씨는 “성 전 회장은 정권과 정권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정치인들을 만났다”고 했다. 이어지는 A씨와의 대화다.
90년대 김기춘과 ‘한가람회’ 활동
4월 12일 김진태 검찰총장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물론이죠.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그 당시의 ‘문고리 권력’으로 불리던 H 청와대 수석,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실세’ P 수석과 두루 접촉한 것으로 압니다.”
▼ 김종필(JP)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충청 기업인으로서 JP의 후원자로 알려졌고요. 2002년 자민련에 불법정치자금 16억 원을 건넨 혐의로 구속 기소되기도 했죠. JP와 함께 정치를 하고 싶어 했어요. 2004년 17대 총선 땐 JP 특보단장으로 비례대표 2번을 받았지만 낙선했어요. 이번에도 궁지에 몰리자 JP에게 구명을 요청했고 JP가 몇 곳에 전화를 돌린 것으로 압니다.”
성 전 회장의 지인들에 따르면, 그의 정 · 관계 로비는 1992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4대 총선 때 한준수 당시 충남 연기군수는 이종국 충남지사 등이 포함된 관권선거를 폭로하는 양심선언을 했다. 이후 검찰 수사과정에서 대아건설 수표가 나왔고 성 전 회장이 자금 출처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성 전 회장은 메모와 인터뷰에서 2006년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 10만 달러를 줬다고 했다. 김 전 실장은 수수 사실을 부인했다. 취재 결과, 두 사람은 1990년대 중반 ‘한가람회’라는 모임에 함께 참여했다. 고건 전 국무총리, 송자 전 연세대 총장 등 각계 인사 100여 명이 회원이었다. 당시 김 전 실장은 국회의원, 성 전 회장은 대아건설 회장이었다.
이에 대해 김 전 실장은 “내가 한가람회 모임에 참여한 건 사실이다. 그 모임은 영호남 출신 인사들이 지역화합 하자며 만든 것인데 충청 출신인 성 전 회장이 왜 참여했는지 모르겠다. 모임에서 그를 만난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의 인맥은 2000년 ‘충청포럼’을 창립하면서 절정에 올랐다. 이 포럼엔 서울에서 활동하는 충청 출신 유력 기업인, 고위 공무원, 정치인, 언론인 300여 명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 전 회장은 포럼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나 황우석 박사 같은 저명인사를 초청했다.
A씨는 성 전 회장의 씀씀이와 관련해 “기자들과 점심할 땐 주로 우동 같은 분식을 먹는다. 직원들과 회식할 때도 선술집을 주로 찾는다. 술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베팅할 땐 통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A씨에 따르면, 성 전 회장이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을 때 보여준 주된 특성은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을 넘나들며 동시에 관리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노무현 정부 땐 노 정부 실세들 및 박근혜·이명박 캠프 실세들과 동시에 잘 지냈고, 이명박 정부 땐 박근혜 캠프 실세들과 잘 지냈으며, 이와 별개로 차기 대권 물망에 오르는 충청 출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측과도 잘 지내왔다”는 것이다. A씨는 “그는 로비의 귀재였다. 대부분의 행동에 정치색이 끼어 있었다. ‘언론장학생’도 만들었고 사업과 정치를 현란하게 연결했다”고 술회했다.
“成 특별사면은 친노 작품”
성 전 회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두 차례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는 2002년 자민련에 불법정치자금 16억 원을 준 혐의로 2004년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뒤 항소하지 않아 형이 확정됐다. 이후 2005년 5월 대통령 특별사면에 포함됐다.
이어 그는 2007년 행담도 개발사업 비리 사건 당시 김재복 행담도개발 사장에게 120억 원을 무이자로 빌려줬다가 배임증재 혐의로 기소돼 1,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후 한 달 만인 같은 해 12월 또 대통령 특별사면에 포함됐다.
‘성 전 회장이 항소하지 않고 형을 빨리 확정하면 노무현 정권이 사면해주는 거래가 두 번이나 이뤄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한 정부에서 두 번씩이나 대통령 사면을 받는 것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 아니냐’는 국회 대정부질문에 “잘 없는 일”이라고 답했다.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당시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과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의 특별사면인 만큼 그 내용을 소상히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문 대표를 겨냥했다.
이와 관련해, 성 전 회장을 아는 또 다른 충청권 인사 C씨는 “노무현 정부 시절 성 전 회장이 두 번 사면을 받은 데엔 충청 출신 친노 인사 D씨의 힘이 작용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C씨는 “그 시절 성 전 회장은 충청 출신 친노 인사들과 친했다. 성 전 회장이 이들 중 D씨에게 부탁해 D씨가 해결해준 것으로 안다. 성 전 회장과 D씨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C씨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성 전 회장은 충남 홍성 출신 홍문표 의원, 서산 출신 박태권 전 충남지사를 통해 이 전 대통령 측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2007년 대선 무렵 이명박 후보가 헬기로 서산을 방문하자 성 전 회장은 헬기장을 찾아 영접했다고 한다. 그는 이 전 대통령 실세들의 아지트였던 서울 롯데호텔에도 자주 들렀다고 한다. C씨는 “성 전 회장이 자신의 주장대로 친박 인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성 전 회장이 친이와 친박 사이를 오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은 자살 전 메모에는 ‘이완구’라는 이름 석 자만 썼으나 경향신문 인터뷰에선 “이완구 총리에게 3000만 원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번(2013년 4월 부여·청양) 재·보궐선거 때 선거사무소에 가서 이 양반한테 3000만 원을 현금으로 주고 왔다. (이 총리가 당시 회계처리를 했느냐는 질문에) “뭘 처리해요. 꿀꺽 먹었지”라고 했다.
“‘내 손에 반기문 있다’ 식으로”
반면 이 총리는 “만약 내가 망인(성 전 회장)으로부터 돈 받은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이 총리는 성 전 회장이 자살한 뒤 그의 측근에게 15차례 전화를 걸어 “성 회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 총리와 성 전 회장의 관계에 대해 성 전 회장의 지인인 충청 출신 E씨는 “애증이 오락가락한 사이였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E씨의 말이다.
“이 총리가 경찰 간부이던 시절부터 두 사람은 친했다. 골프도 같이 쳤다. 부인들을 동반해 라운딩을 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서로 필요할 때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받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후 이 총리가 충남지사일 때 경남기업 컨소시엄은 충남도가 발주한 안면도 개발사업 입찰에서 2위를 해 탈락했다. 그러자 성 전 회장이 충남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총리 측은 이 총리와 성 전 회장의 부부동반 골프 라운딩 사실 여부를 묻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성 전 회장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청와대와 총리실에서 (경남기업에 대한 수사를) 주도하는 것 아닙니까?”라며 이 총리를 수사의 배후로 지목했다. 이와 관련해 박완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혹자는 성 전 회장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 출마와 관련해 적극적 역할을 자처해 이완구 총리에게 찍혔다는 말을 한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 총리는 이 질문에 “말씀이 지나친 것 같다. 저는 대권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성 전 회장과 가까운 충청지역 언론인 F씨는 “반기문 사무총장의 동생과 이 총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고 말했다.
먼저 반 사무총장의 동생과 관련해, F씨는 “‘성 전 회장이 대권 포석으로 반기문 사무총장의 동생 반기상 씨를 7년 가까이 경남기업 상임고문으로 데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지역사회에서 나돌았다”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의 지인들에 따르면, 그는 경남기업 경영진 자리를 ‘정치권 인맥관리’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형인 김의재 전 의원은 경남기업에서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다.
또한 F씨는 “성 전 회장은 야당 중진들을 만나 ‘반기문과 야당의 연대’나 ‘뉴 DJ플랜’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 전 회장이 반 사무총장의 동생을 볼모로 삼아 마치 ‘내 손안에 반기문이 있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여권에 비쳤다고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등 일부 언론에선 반 상임고문이 최근까지 재직 중인 것으로 보도한다. 그러나 성 전 회장 사후 경남기업엔 연락이 잘 되지 않아 반 상임고문의 거취를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반 상임고문 측은 F씨 등의 증언 내용이 담긴 질의에 답해오지 않았다.
‘비열한 친박들’?
성 전 회장은 권력욕이 남달랐다고 한다. 지인들에 따르면, 그의 막냇동생인 성인종 엔바이오컨스 대표는 정치지망생이다. 성 전 회장이 지난해 6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어렵게 얻은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자 성 대표는 같은 해 7·30 재선거 때 형의 지역구인 충남 서산·태안 출마를 선언하고 예비후보등록을 마쳤다. 그런데 성 전 회장은 지역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지 “동생의 출마를 언론보도로 알았다”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성 대표는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여권 인사 G씨는 “검찰수사 중에 성 전 회장의 비리 혐의가 언론에 누설돼 대서특필됐다. 친박 실세들은 ‘이분(성완종) 우리가 쳐넣을 테니 나서지 마세요~’라는 시그널로 받아들였을 거다. 그러니 성 전 회장이 억울함을 호소해도 나 몰라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G씨는 “성 전 회장은 ‘비열한 친박들’이라고 땅을 쳤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G씨와의 대화 내용이다.
▼ 성 전 회장이 자살하기 전에 혹시 연락이 있었나요.
“있었어요. 저의 지인이 성 전 회장 아들의 부탁이라며 제게 찾아왔어요. 청와대 민정에 이야기해 성 전 회장 구명 좀 해달라고.”
▼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사정을 들어보니 안됐다 싶었는데 그땐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어요.”
▼ 성 전 회장은 검찰이 별건 수사한다고 억울해했죠.
“뒷말 안 나게 깔끔하게 수사하는 실력은 옛날 검사들이 나은 것 같아요.”
▼ 인맥에 의지할 게 아니라 변호사 사서 법으로 맞서면 되지 않나요.
“그런 루틴(routine)한 레벨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했을 거고.”
▼ 성 전 회장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불법자금을 준 성 전 회장도 문제라는 시각이 있는데요.
“법과 제도를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리’라는 것도 있으니까. 성 전 회장이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는 돼요. 실종신고 시간과 사망 추정 시간 사이에 몇 시간 갭이 있는 것 같아요. 산길을 걸으며 온갖 회한이 교차했겠죠. 그 몇 시간 동안 성 전 회장은 친박 실세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기다렸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