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을 마치고 한자리에 앉은 부활 멤버들. 왼쪽부터 보컬 김동명, 베이스 서재혁, 드럼 채제민, 기타 김태원.
“좀 더 강렬하게 쳐봐!”
검은 선글라스의 꽁지머리 사내가 중저음으로 내뱉었다. 굵지 않지만 위엄이 서린 목소리. 록밴드 부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김태원(50)이다. ‘지적’을 받은 드러머 채제민(46)이 “내일 아무래도 튈 것 같은데…” 하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옆에서 베이시스트 서재혁(40)이 씨익 웃는다.
기독교인들이 부활주일 예배를 본 4월 5일 밤 8시. 서울시내 한 지하 음악 스튜디오를 찾았다. 부활이 ‘불후의 명곡’(KBS 2TV)에 출연해 부를 곡을 연습 중이었다. 다음 날 오후 방송 녹화 일정이 잡혀 있단다. 방송사 관계자들이 한쪽에 모여앉아 모니터한다.
한솔 작사·작곡 ‘홀로 아리랑’을 록 분위기로 편곡했다.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어느 순간 날카롭고도 차진 초강력 고음이 실내를 뒤흔든다. 꾹꾹 다지고 눌러놓았던 보컬리스트 김동명(32)의 야성(野聲)이 곡 후반부에 기어이 폭발한 것이다. 마지막 가사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목을 찢듯 내지른 ‘가보자’가 천장을 찌르고 사방 벽을 때린다. 소리의 조각들이 유리알처럼 영롱하다. 보석으로 거듭나기 직전의 원석(原石)이랄까. 단단하고 명징하다. 이런 보컬을 만난다는 건 밴드의 행운이다.
‘국가대표 록밴드’ 부활이 30주년을 맞았다. ‘30년 밴드’는 국내에서 드문 일이다. 시나위가 엇비슷한데 부활만큼 지속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다. 그간 거쳐간 보컬만 9명이다. 김종서 이승철 김재기 박완규 정동하… 내로라하는 로커들이 이 밴드에서 단련되고 이름을 떨쳤다. 지난해 합류한 김동명은 제10대 보컬이다.
연습이 끝나자 ‘불후의 명곡’에 함께 출연하는 다른 팀이 스튜디오를 차지했다. 대기실에서 부활 멤버들과 한자리에 앉았다.
보컬 김동명에게 “녹화 전날 그렇게 질러대도 괜찮으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수줍은 표정이지만, ‘뭐 이 정도쯤이야’ 하는 자신감이 배어난다. 김태원이 “어차피 한 번 딱 지르니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이 곡에서 가장 높은 음이 ‘4옥타브 D’라고 한다. 노래 좀 해본 사람은 안다. 이 음, 아무나 못 올라간다. “(목소리가) 고래 심줄 같다”고 평하자, 김태원이 “죽이는 표현”이라고 흡족해한다.
지난해 하반기 내놓은 14집 앨범의 첫 번째 싱글 ‘사랑하고 있다’는 김동명의 독특한 창법과 음색이 돋보인다. 기자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 곡을 반복해 들었다. 깔끔하고 경쾌하면서도 세련됐다. 그런데 왜 안 떴지?
“우리가 돈이 없어 홍보를 못 했다. 좀 띄워달라(웃음).”(김태원)
“부활 곡은 원래 한참 지나야 뜬다(웃음).”(채제민)
김동명에게 팀 만족도를 물었다.
“국내 최고 팀에서 중심 역할을 맡아 큰 영광이다. 부활 역사에 누(累)가 되지 않게 하겠다.”
채제민은 1998년부터 함께해온 고참이다. 그의 드럼은 다이내믹하면서도 섬세하다.
▼ 연습 중 한 번 실수하던데.
“태원 형이 갑자기 리듬을 바꿔 주문하는 바람에 급하게 치다 틀렸다. 잠깐 방심하면 타이밍 놓친다.”
▼ 너무 까다로운 주문을 한 게 아닌가.
“부활이 원래 리듬이 강하다. 리듬 연구를 많이 한다. 20년 같이했다. 금방 이해하고 따라온다.”(김태원)
김태원은 10대 보컬 김동명이 ‘사랑할수록’을 부른 고(故) 김재기와 가장 비슷하다고 흐뭇해한다.
▼ 김재기의 ‘사랑할수록’을 이승철, 박완규 등 다른 보컬이 부른 것과 비교하며 들어봤다. 노래야 다들 잘하지만, 감성이 확연히 다르더라.
“김재기나 나나 그때 힘들었다. 그 친구는 가난하고 나는 폐인이었다. 이 노래에는 꿈을 이루고자 하는 처절함이 배어 있다. 100억 원짜리 컴퓨터로 작업해도 그 필(feel)이 안 나온다. 부활 보컬 중 김동명이 (김재기와) 가장 비슷하다.”
▼ 김재기는 고음에서 부드럽게 뽑아 올린다. 로커들은 대체로 내지르지 않나.
“맞다. 차원이 다르다.”
부활에서 김태원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이다. 김태원 없는 부활은 상상할 수도 없다.
▼ 기타의 카리스마가 워낙 강해 다른 파트가 눌리는 것 아닌가.
“기어 다닌다(웃음). 펴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채제민)
“얹혀 가는 것 같아 죄송할 따름이다(웃음).”(서재혁)
“내가 많이 의지한다.”(김태원)
분위기 좋다. “국내 밴드의 전설이 됐다”고 치켜세우자, 김태원이 “아직은 전설이랄 것 없다. 앞으로 만들어야지”라면서 자세를 낮춘다.
‘불후의 명곡’에서 선보일 ‘홀로 아리랑’의 주 편곡자는 장지원이다. 좀 전에 스튜디오에서 연습할 때 건반을 치면서 전체적으로 합주를 이끌던, 모자 쓴 사내다. 25년 전 인연을 맺어 콘서트 할 때마다 객원 멤버로 같이한다고 한다. 그는 연습이 끝난 뒤에도 김태원과 편곡에 대해 상의했다.
▼ 좌절하거나 음악적 회의에 빠진 적은?
“자주 그랬다. 하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음악은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그래서 가난해도 행복했다. 더러 나락에 떨어지기도 했지만.”(김태원)
▼ 후배 음악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음악의 길은 힘들다. 하지만 꿋꿋이 자기 길 가다보면 언젠가 좋은 기회가 찾아오니 힘내서 열심히 하길 바란다.”(채제민)
“팝페라 가수 카이가 라디오에 나와 이런 얘길 하더라. 음악을 해서 부와 명성을 얻겠다는 사람은 당장 그만두라고. 확률이 너무 낮다. 우리만 해도 운이 좋은 경우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하는 데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계속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서재혁)
김동명에게 물었다. 어떤 음악을 하고 싶냐고.
“마음을 치유하는 음악, 믿음과 희망을 주는 음악을 꼭 하고 싶다.”
“이 친구가 되게 순수하다. 공연장에 관객 한 명만 있어도 노래하겠다고 한다. 그럼 우린 망한다(웃음).”(채제민)
다시 팀의 정신적 지주 김태원에게 물었다.
▼ 부활이 30년 동안 추구해온 음악은 무엇인가.
“시간이다.”
▼ 음악적 가치관의 뼈대를 묻는 거다.
“그 가치관도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처음부터 정한 건 없다. 시간을 통해 변화하고 만들어지고 주제가 바뀌었다. 부족한 건 지우고 아름다운 건 키웠다. 10년 후 어떻게 바뀔지를 말하는 건 오만이다. 그저 아름다운 방향으로 갈 뿐이다.”
부활 30주년 기념 콘서트는 5월 16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 ‘희야’ ‘사랑할수록’ ‘네버엔딩 스토리’ 등 불후의 명곡들이 울려 퍼지고, 역대 보컬들과의 컬래버레이션이 펼쳐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