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로 우리 귀에 익숙한 캔터베리엔 피비린내 나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이 끝내 삼키지 못한 중세 영국의 흔적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로만 가톨릭, 도미니칸, 프란치스코 등 여러 가톨릭 종파가 캔터베리로 흘러들었고, 성당과 수도원 등 유적을 남겼다. 옛 로마인들의 무덤이었다는 언덕에서 캔터베리 성당을 바라본다. 영국의 겨울은 음산하지만 아름답다.
지난 1월 켄트대학교에서 주관한 세계유산 관련 콘퍼런스에 참석한 것은 무엇보다 콘퍼런스 내용이 중요해서였다. 하지만 세계유산도시 캔터베리에서, 게다가 대성당 경내 호텔(Cathedral Lodge)에서 콘퍼런스가 열린다는 데 대한 호기심이 컸던 게 사실이다. 영국의 겨울은 특유의 잿빛 대기에 낮보다 밤이 긴 음산한 시즌이다. 꽃 피고 새 지저귀는 때였으면 더 아름다웠을 테지만, 험한 계절을 직접 체험하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몰아치는 비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캔터베리 인근 마을 도버(Dover)에서 딜(Deal)을 거쳐 샌드위치(Sandwich)까지 해안가 성(城館, Castle)과 역사마을을 탐방했고, 파버샴에 있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회사 셰퍼드 앤드 님므(Shepheard and Neame near Faversham)도 방문했다. 하지만 지면 사정상 세계유산도시 캔터베리를 집중 소개한다.
캔터베리 대성당
Cathedral and Metropolitical Church of Christ at Canterbury
캔터베리 대성당은 영국성공회의 총본산으로 잉글랜드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시설 중 하나다. 공식 명칭은 ‘캔터베리 크라이스트처치 주교좌 대성당’. 처음 건축이 시작된 때는 597년이라지만 지금은 당시의 모습이 전무하다. 이후의 성당 건립은 상자 기사와 같이 대략 5단계로 구분된다.
성당은 애초에 로만 가톨릭이었으나 영국성공회로 종파가 변경된 뒤 1070년 봉헌돼 1834년 최종 개축된 것으로 간주된다. 시간의 흔적이 쌓이면서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이 경이롭게 혼합된 건축물이 됐다. 동쪽 로마네스크 양식의 지하묘실과 초기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12세기 성가대석, 14세기 신랑(身廊·nave, 교회당의 내부 중앙 부분), 중세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대표적인 건축유산이다.
캔터베리 대성당과 역시 캔터베리에 있는 세인트 마틴 교회, 세인트 오거스틴 수도원 유적 세 곳이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이 세 기념물은 종교개혁 이전 영국 기독교의 이정표이자 대영제국 종교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들 기념물은 세계유산 등재 당시 뛰어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판단하는 평가 기준 중 (i) (ii) (vi)를 충족시킨 것으로 인정됐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i) 캔터베리 대성당, 특히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동쪽 구역은 독특한 예술적 창작품이다.
(ii) 세인트 오거스틴 베네딕트회 수도원이 구심점이 되어 중세 영국 왕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동시에 켄트와 노섬브리아(Nothumbria) 경계 너머까지 기독교가 퍼져나갔다.
(vi) 위 세 곳의 건축유산은 유형 유산으로 앵글로-색슨 왕국에 기독교를 소개한 역사와 직접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캔터베리 대성당은 한때 ‘위험에 처한 유산 목록’에 기록될 뻔한 위기를 극복하고 대대적인 모금이 이뤄져 유지·관리를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동남쪽 익랑(翼廊·transept, 십자형 교회당의 팔에 해당하는 부분)은 지금도 보수 중이다.
나는 콘퍼런스 마지막 날 오후에 ‘이븐송(Evensong)’이라는 저녁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보수 중인 익랑에 설치된 임시 통행로를 거쳐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예배당에는 여러 번 들어갔지만 이븐송 참석은 처음이었다. 성가대 합창 덕분에 대성당 공간의 규모를 훨씬 잘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촬영이 금지돼 아쉬웠다.
세인트 오거스틴 수도원, 세인트 마틴 교회
St. Augustine’s Abbey, St. Martin’s Church
세인트 오거스틴 수도원은 아마도 현재 캔터베리 대성당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보존되어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세인트 오거스틴 수도원 유적만이 캔터베리 대성당과 세인트 마틴 교회의 사이에 남아 있다. 세인트 오거스틴 수도원은 베네딕트회 수도원으로 598년 설립돼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게 봉헌됐다. 영국 베네딕트회의 진정한 발상지인 초기 시설은 노르만족 침입 이후 978년 복원됐지만, 1538년 헨리 8세가 수도회 공동체를 해산시킨 이후 수도회 건물들은 사실상 모두 사라졌다.
세인트 마틴 교회는 도시 성벽 외곽에 있는데,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구 교회이자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범(汎)영어권 최초의 교회다. 세인트 마틴 교회의 대부분은 8세기 이전에 건축됐다.
이 교회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켄트의 색슨 왕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로마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를 보낸 597년 이전에는 켄트의 베르타 왕비(Bertha of Kent) 개인 채플이었다. 베르타 왕비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 기독교를 보급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이유로 성자로 추대됐다. 에델베르트 왕(Athelberht of Kent)과 베르타 왕비의 동상이 성벽과 세인트 오거스틴 수도원 입구 사이의 정원(Lady Wootton’s Green)에 놓여 있다. 나는 처음 봤을 때 왜 수도원 앞에 여인상을 세워놓았나 의아했었다.
캔터베리에서 머물 숙소를 정할 때 이 도시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인터넷을 통해 그저 대중교통시설에서 가까운 곳을 택했다. 캔터베리 기차역은 동역과 서역이 있다. 지도상으로는 서쪽 기차역에서 걸을 만한 거리라는 점에 착안해 집 한 채를 빌렸다. 대성당 경내의 호텔보다 저렴하면서 거실과 부엌 등까지 갖춰 덜 답답할 것 같아서였다. ‘코티지(cottage)’라고 해서 전원풍의 영국식 주택을 상상했는데, 도시 지역이라 그런지 여러 가구가 줄지어 있는 2층짜리 연립주택 로하우스 중 한 채였다. 그래도 작은 뒷마당이 있어 쾌적했다.
이 숙소는 블랙프라이어즈 가(Blackfriars street)에 있었다. 지명의 의미가 궁금해서 이리저리 답사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캔터베리 블랙프라이어즈는 오래전 켄트 지역의 도미니칸 종파였다. 1237년 헨리 2세가 도미니칸 종파에 교회와 수도원을 지을 땅을 하사했는데 바로 그 땅이 내가 우연하게 택한 숙소가 있는 동네였다.
이들 도미니칸 종파는 16세기에 종교탄압을 받아 교구의 주 건물군이 직물공장으로 바뀌고 나머지 건물들도 그 후 서서히 멸실됐다. 스타우어 강 동쪽에 있던 당시 식당 건물은 아직 남아 있으나, 그 건물도 17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집회용 시설로 사용되다가 이후 창고로 쓰였다. 현재는 한 사립학교의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이트프라이어즈 쇼핑센터
Whitefriars Canterbury
도시 동남쪽에는 ‘화이트프라이어즈’라는 커다란 쇼핑센터가 있다. 이곳도 원래는 수도원이었는데 16세기 헨리 8세에 의해 해산됐다. 그 후 개인 소유로 넘어가 아름다운 정원과 과수원으로 사용되다가 19세기 말에 학교로 사용됐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거의 파괴됐다. 1950~1970년 상업 및 업무용으로 개발됐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1990년대 들어서는 고고학 발굴 및 역사 보존에 좀 더 만전을 기하면서 새로운 상업적 요구에 부응하는 개발을 하게 됐다. 1999년에 공사를 시작해 2005년 9월 켄트 주 동쪽에서는 최대 규모인 쇼핑센터로 완공됐다. 고층건물이 아니다 뿐이지, 성곽도시 안쪽조차 개발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서울이나 캔터베리나 마찬가지다.
그레이프라이어즈 채플, 프란치스칸 정원
Greyfriars Chapel · Fransciscan Garden
성곽 안 서남쪽에서는 오래된 주거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주거지를 지나 스타우어 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예쁘게 다듬어진 골목길과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다. 그레이프라이어즈 채플과 프란치스칸 정원이다. 잉글랜드 최초의 프란치스코 종파가 캔터베리에 처음 도착한 것은 1224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San Franscisco d’Assisi·1181~1226)가 살아 있을 때의 일이다. 이들은 1267년부터 1235년까지 교황에게 땅을 얻어 건물들을 지었다.
캔터베리 대성당의 대표적 건축유산인 중세 스테인드글라스.
수도사들은 종파마다 복장이 다르다. 크게 4개 종파(Friars-four great orders)가 있는데, 우선 도미니칸 종파는 해빗(Habits)이라는 백색 계열 수도복 위에 검정색 카파(cappa·소매 없는 외투)를 걸치므로 블랙프라이어즈(The Domnicans, black)라고 한다. 칼멜 수도회는 흰색 카파를 걸치므로 화이트 프라이어즈(The Camelites, white), 프란치스칸들은 회색 카파를 걸치므로 그레이 프라이어즈(The Franciscans, grey)라고 한다. 비슷한 해빗을 입는 어거스티니안 프라이어즈(The Augustinians)와도 구분한다.
우리나라 불교계 스님들이 회색 장삼(長衫) 위에 걸쳐 입는 장방형의 가사(袈裟)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조계종 스님들은 적갈색 가사, 태고종 스님들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붉은 홍가사를 입는다.
프리메이슨리 박물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석공 출신 장인들.
Kent Museum of Freemasonry
프란치스칸 정원에서 서쪽 문 방향으로 걷다보면 프리메이슨리 박물관이 나온다. 호기심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결국은 프리메이슨리 심볼이 새겨진 셔츠용 커프링크스(cufflinks)를 한 세트 사서 지금도 애용한다.
프리메이슨리는 종교나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자선단체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조직 중 하나다. 회원 개개인에게 수준 높은 인격을 요구하고 본인이 프리메이슨리 회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규칙이라고 한다. 애초 중세 유럽에서 성당이나 교회를 짓던 석공들의 길드에 의해 조직됐으나 훗날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친목을 도모하는 사교클럽과 같은 형태로 발전했다. 프리메이슨리 상징물 중에 컴퍼스와 자가 있는데, 이것이 프리메이슨리가 석공 길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한다. 컴퍼스는 진리를, 직각자는 도덕을, 역시 상징물인 흙손과 몽둥이는 각각 결속과 우애, 지식과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박물관은 1933년 지역 장인에 의해 개관됐는데, 지금껏 끊임없이 수정, 보완, 개선되고 있으며 자원봉사로 운영된다고 한다. 스스로를 석공 출신이라고 밝히는 장인들이 전시물들을 자세하게 소개해줬다. 박물관에는 석공이 사용하는 각종 도구와 그림 여러 점이 전시돼 있다.
캔터베리 성곽, 캔터베리 성, 데인 존 마운드
Canterbury City Walls, Canterbury Castle, Dane John Mound
캔터베리 최초의 성곽은 3세기경 로마인들이 건립했으며 약 130에이커의 땅을 에워쌌다고 한다. 130에이커는 53ha 정도니 창덕궁 면적(56ha)보다 약간 작은 규모다. 성곽 높이는 대개 2.25m이고 수석과 모르타르로 축조했다. 성곽은 토담 위에 약 6m 높이로 건립되고 그 주변에 해자(垓字)를 두른 것으로 알려졌다. 성문은 애초에 5개였는데 현재까지 남은 것은 서문(西門, West Gate) 하나다. 성곽도시 서울은 서쪽 돈의문이 헐린 반면 캔터베리는 유일하게 서문만 남았다. 이 서문은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 가장 규모가 큰 성문(城門)이라고 한다.
보통 건축이나 문화재 관련 콘퍼런스에는 답사 일정이 포함돼 있기 마련인데, 이번 콘퍼런스는 세계유산 보존 관련 법규에 관한 소규모 전문가 회의여서 공식 답사 일정이 없었다. 참석자도 건축가와 법조인이 반반이었다. 따라서 틈날 때마다 도시를 걷다보니 어떤 곳은 아주 새벽에, 또 어떤 곳은 저녁에 들르게 됐다. 어쩌면 가장 먼저 찾아봤어야 할 성관 시설인 아성(牙城, keep)을 런던으로 떠나는 아침에야 놓칠세라 찾았다. 아성은 석조로 된 중심 탑으로 중세 서유럽 성 안에 지어진 요새화한 탑을 말한다.
캔터베리 성은 로체스터 성, 도버 성과 함께 헨리 1세(1068~1135) 때 건립된 켄트 지역 3대 오리지널 성관 중 하나다. 이 세 성관 모두 하스팅 전투(Battle of Hastings, 1066) 후 도버에서 런던까지의 로마 길 위에 건립됐는데, 이 중요한 경로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성(Castle)과 궁전(Palace)의 차이는 요새냐 아니냐에 있다. 요새화했으면 성이다.
데인 존 마운드(Dane John Mound)는 원래 1~4세기경 로마인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었다. 11세기 노르만에 점령됐을 당시 중심 탑이 목조인 모트-앤-베일리로 축조됐다가 12세기 무렵 목조를 허물고 석조로 다시 만든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모트-앤-베일리란 높이 쌓은 흙 위에 목조나 석조로 된 중심탑(keep)을 세운 모트(Motte) 부분과, 해자나 말뚝으로 에워싸인 공간인 베일리(bailey, enclosed courtyard)가 함께 조성되는 요새의 구조를 뜻한다.
데인 존 마운드는 1790~1803년 당시 소유자가 성벽 남동쪽에 조성했는데, 얼마 안 돼 캔터베리 시가 소유하고 관리하게 됐다. ‘데인 존’이란 이름은 아마도 요새를 의미하는 돈존(donjon)을 현지 발음으로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높은 언덕에서 캔터베리 대성당을 바라본다. 그리고 라임나무로 우거진 수목 터널을 통과해 화이트프라이어즈 쇼핑몰과 버터마켓을 거쳐 블랙프라이어즈 가로 되돌아온다. 캔터베리의 마지막 아침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주 출입구에서 바라본 캔터베리 대성당.
2 캔터베리 대성당의 크라이스트 처치 게이트. 현재 방문객 주 출입구로 쓰인다.
3 Lady Wootton‘s Green에서 바라본 캔터베리 성곽과 캔터베리 대성당.
4 세인트 오거스틴 수도원 유적.
5 프란치스코 종파가 세운 그레이프라이어즈 채플.
6 캔터베리 대성당 내 신랑(nave)의 천장.
7 데인 존 마운드에서 바라본 캔터베리 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