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종’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 초록색 대지, 울창한 나무, 향기로운 숲, 그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새와 동물은 우리 인간에게 건강한 치유효과를 안겨줍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갖게 되는데, 상처의 적지 않은 부분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인간관계는 한편으로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을 지치게 합니다. 그런데 자연은 바로 이 지친 삶에 잔잔하지만 큰 위안을 선물합니다.
황혼이 내리는 들판
서양화에서 자연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가는 세 사람입니다. 영국의 존 콘스터블, 독일의 카스파 프리드리히, 그리고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입니다. ‘건초 마차’로 유명한 콘스터블이 소박한 전원 정경을 있는 그대로 담아 근대 풍경화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면, ‘빙해’ 같은 걸작들을 남긴 프리드리히는 웅장하고 고독한 자연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한 낭만주의 풍경화의 절정을 보여줬습니다.
밀레는 콘스터블과 프리드리히보다 더 널리 알려진 화가입니다. 그 까닭은 ‘만종’ ‘이삭 줍기’와 같은 그의 작품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피카소의 ‘게르니카’ 등과 함께 서양 회화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만종’ 복제본은 우리나라에서 오래전 식당, 미장원, 이발관 등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레는 흔히 ‘바르비종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군의 프랑스 화가들은 1830년대부터 파리 교외 퐁텐블로 숲가에 있는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 모여 살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이들을 바르비종파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루소, 코로, 도비니 등은 밀레와 함께 바르비종파를 대표하는 화가들이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와 19세기 전반 영국 풍경화로부터 영향 받은 바르비종파는 빛과 대지의 연구를 통한 자연의 재현에 주력했습니다. 바르비종파는 후에 빛의 효과를 탐구한 인상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만종’(The Angelus, 1857~59)은 밀레의 대표작이자 바르비종파의 대표작입니다. 해 저무는 들판에서 한 젊은 부부가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담은 작품입니다. 원래의 제목은 ‘삼종기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저녁 때 울리는 ‘늦은 종’이라는 의미의 ‘만종(晩鐘)’으로 불립니다. 삼종기도는 가톨릭에서 하루 세 번 일과를 잠시 멈추고 기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만종’이 갖는 아우라는 경건한 자연과 독실한 신앙의 재현에 있습니다. 황혼이 내리기 시작한 벌판은 무척 평화롭고 경건해 보입니다. 하루의 고된 노동이 끝난 다음 삼종기도를 올리는 부부의 신앙은 아주 순수하고 독실해 보입니다. 평범한 전원 풍경을 그린 작품인데도 ‘만종’이 유명해진 이유는 이러한 풍경에 밀레가 기독교 신앙을 불어넣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 서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에 대한 친밀감과 소박하고 순결한 신앙심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대지에 맞서는 영웅
‘만종’과 관련해 큰 화제를 남긴 사람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입니다. 달리는 어릴 적부터 ‘만종’ 복제본을 보고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여자의 발 주위에 있는 바구니가 원래 아이가 들어 있는 관을 그린 것이고, 부부가 이를 슬퍼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마주한 부부가 근친상간 충동을 가진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라는 기상천외한 견해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완성하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관람객의 자유입니다. 저는 달리의 주장이 기발하긴 하지만 ‘만종’이 갖는 아우라를 생각할 때 그의 해석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종’이 많은 이에게 감동을 안겨준 까닭은 이 작품이 주는 다양한 울림에 있습니다. ‘만종’은 풍경화인 동시에 종교화입니다. 또 리얼리즘 회화인 동시에 낭만주의 회화입니다. 어느 하나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여러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작품이 ‘만종’입니다. 하나의 감동이 아닌 복수의 감동을 안겨주는 게 진짜 명작이 아닐까요.
밀레는 ‘만종’을 그린 이유가 어릴 적 할머니에 대한 기억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삼종기도 종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중단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할머니 말을 생각하면서 ‘만종’을 그렸다고 합니다. 배경에 펼쳐진 들판은 아직 환한데 기도를 드리는 부부 주변에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습니다. 낮과 밤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자연의 평화로움, 인간의 유한성, 삶의 소박함, 신앙의 경건함을 모두 느끼게 해줍니다.
밀레의 작품들을 보면서 저는 자연스레 귀농(歸農)을 떠올립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인생 제2막을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귀농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귀농에는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빠른 속도와 분주한 일상으로 특징지어지는 도시의 삶은 우리에게 활력을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피곤을 안겨줍니다. 느리고 한갓진 삶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 시골로 떠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귀농은 태초적 건강 찾기
최근의 귀농 현상을 물론 낭만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합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은 고된 작업입니다. 게다가 자연이 언제나 온화한 것도 아닙니다. 관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연은 아름답고 경이롭지만, 주체의 관점에서 살아내야 하는 자연은 때때로 무섭고 두렵습니다. 예를 들어 홍수, 가뭄, 한파 등은 시골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시련을 안겨줍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귀농에 담긴 현대인의 마음입니다. 저는 오늘날 현대 문명이 주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인간의 능력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 상담과 정신의학적 약물이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률의 하락과 정신 건강의 회복에 중요한 구실을 해온 게 사실이지만, 그 불안과 우울을 포함한 현대인의 정신적 상처 및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해줄 수는 없다는 점 역시 정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갈수록 메말라가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사회생활의 기본 코드를 이룹니다. 이런 삭막한 현실에서 인간에게 참다운 치유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태고의 순수인 자연입니다. 많은 현대인이 귀농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 다시 말해 태초적 건강성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농사를 짓는 데는 상당한 수고와 불편함이 따르고 귀농의 결과가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새로운 위안과 기쁨, 그리고 치유를 얻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연으로 귀환
밀레는 정치적 이념이 두드러진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리얼리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와 비교할 때 밀레는 오히려 소박했습니다. 쿠르베가 진부한 아카데미 양식을 거부하고 삶과 사회 현실을 그림 안으로 당당하게 끌어들여 왔다면, 밀레는 산업화에 밀려 점점 사라져가는 농촌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밀레가 작품 활동을 한 시기는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7월 혁명(1830년), 2월 혁명(1848년)이 일어나고 파리코뮌(1871년)이 등장한 정치적 대격변기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해 밀레는 자연으로의 귀환과 소박한 생활의 예찬이라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추구한 셈이었습니다.
이러한 밀레 식의 대안은 적극적인 대안이 아니라 방어적인 대안입니다. 현대 문명의 도도한 물결은 거역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회화의 역사를 돌아봐도 바르비종파는 인상파로 대체되고, 도시 문명의 경쾌함과 화려함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말년에 밀레는 비평가와 대중 모두에게 따뜻한 평가를 받았지만, 밀레 풍의 그림은 회고주의적 취향으로 취급됐습니다.
하지만 현대 문명의 발전이 밀레 작품이 주는 감동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초고속화하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밀레의 작품은 새로운 평가와 사랑을 받을 만합니다.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 초록색 대지, 울창한 나무, 향기로운 숲, 그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새와 동물은 바로 우리 인간의 가장 가까운 벗입니다. 밀레의 그림은 문명에 지친 현대인에게 자연이라는 벗을 통해 깊은 위안과 평화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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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올림픽공원 안 소마미술관에서 마련한 ‘밀레 탄생 200주년 기념전’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씨 뿌리는 사람’ 앞에 서서 오랫동안 지켜봤습니다. 현대 생활이 주는 편리함에 익숙한 저로서는 귀농을 해 살아갈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지 위를 힘차게 걸어가며 씨를 뿌리는 그림 속 주인공의 당당한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연 속에서 소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보았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은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