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과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동숭동 캠퍼스 길 건너 의과대학 구내에는 외국인 교수회관이 있었는데, 저는 그곳에서 미국인 교수들의 통역이나 서류 정리 등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문과의 권중휘 교수께서 부르시더니 “한국에 국빈으로 오신 유명한 노교수께서 교수회관에 들어오시니 여러모로 도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네” 하고 교수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처음 스코필드 박사를 뵈었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머리는 백발에 한쪽 다리를 못 써 지팡이를 짚은 채 미소를 지으며 활달하게 인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 교수회관은 아래층에 거실, 식당, 부엌과 조그마한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사무실은 미국에서 오신 다른 교수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침실은 모두 2층에 있었습니다. 불편한 다리로 2층을 오르내리실 수 있을지 걱정됐는데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박사는 2층에 자리한 방을 침실 겸 사무실로 정하셨습니다.
손수 내의 빨아 입어
저는 그때부터 스코필드 박사의 통역 및 비서 업무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학교에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교수회관에서 박사와 미국 교수들을 도왔습니다. 박사께 통역이 필요했던 이유는, 1920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한 이후 근 40년이 지났기 때문에 오래전에 배운 한국어를 거의 잊으신 까닭이었습니다.
교수회관은 미국 교수들께 영어회화를 배우려는 학생들, 스코필드 박사께 성경 공부를 하러 오는 학생들, 그 밖에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늘 붐볐고, 그 교통정리를 하는 것도 제 몫이었습니다. 박사가 오시기 전, 그리고 머무는 동안을 전후해 교수회관에 체류한 미국 교수들로는 하웰 교수(Dr. A C Howell) 부부, 할로 교수(Dr. Virginia Harlow), 필립스 교수(Dr. Elizabeth Phillips), 그리고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이던 헨더슨(Gregory Henderson) 부부가 있었습니다.
박사와 제가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저는 영어로 듣고 말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박사의 말씀을 통역하고 대화하면서,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처럼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박사께서 정성을 쏟으신 고아원이나 중·고등학교에 갈 때면 늘 함께 가서 통역을 했습니다. 2층에 머물던 영국 교수가 떠나자 박사는 제게 그 방에 가끔 와 있으면서 일을 도와달라고 말씀하셨고, 덕분에 박사의 일상생활을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박사는 “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짜고 매운 한국 음식은 먹기 어렵더라”며 주로 양식을 드셨는데, 수프 같은 가벼운 음식이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셨습니다. 교수회관에는 개성에서 온 부부가 음식과 청소 등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한국 경제가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교환교수로 온 미국 교수들에게는 미8군 PX에서 장을 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식당 아주머니가 한국의 시장에서 장을 봐서 만드는 음식을 드셨습니다.

최진영 교수(오른쪽), 그리고 그의 두 딸과 담소 중인 스코필드 박사. 1967년 스코필드 박사가 최 교수의 미국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남편이 촬영한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