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호

“범죄 성향이 있나봐 부자만 보면 훔쳐서 가난한 이에게 주고 싶거든”

‘민족대표 34인’ 스코필드 박사 이야기

  • 최진영 | 중앙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입력2015-04-23 17: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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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1889~1970)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4월 12일은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린 스코필드 박사의 45주기였다. 그리고 내년이면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꼭 100년이 된다. 1916년 처음 한국을 찾은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 · 1운동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미움을 사 1920년 본국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후 세계 각국에 일제의 잔학행위를 알리는 데 힘썼고, 195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초빙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여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최진영 중앙대 명예교수가 4월 10일 열린 스코필드 박사 서거 45주기 추모기념식에서 그를 기리는 글을 발표했다. 최 교수는 1958년부터 3년간 스코필드 박사의 통역과 비서 업무를 맡았고, 그가 서거할 때까지 서신을 주고받았다. 최 교수는 “그의 수많은 업적은 여러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정 많고 위트 넘치는 인간적 면모는 덜 알려진 것 같아 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1958년,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과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동숭동 캠퍼스 길 건너 의과대학 구내에는 외국인 교수회관이 있었는데, 저는 그곳에서 미국인 교수들의 통역이나 서류 정리 등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문과의 권중휘 교수께서 부르시더니 “한국에 국빈으로 오신 유명한 노교수께서 교수회관에 들어오시니 여러모로 도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네” 하고 교수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처음 스코필드 박사를 뵈었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머리는 백발에 한쪽 다리를 못 써 지팡이를 짚은 채 미소를 지으며 활달하게 인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 교수회관은 아래층에 거실, 식당, 부엌과 조그마한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사무실은 미국에서 오신 다른 교수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침실은 모두 2층에 있었습니다. 불편한 다리로 2층을 오르내리실 수 있을지 걱정됐는데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박사는 2층에 자리한 방을 침실 겸 사무실로 정하셨습니다.



    손수 내의 빨아 입어

    저는 그때부터 스코필드 박사의 통역 및 비서 업무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학교에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교수회관에서 박사와 미국 교수들을 도왔습니다. 박사께 통역이 필요했던 이유는, 1920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한 이후 근 40년이 지났기 때문에 오래전에 배운 한국어를 거의 잊으신 까닭이었습니다.

    교수회관은 미국 교수들께 영어회화를 배우려는 학생들, 스코필드 박사께 성경 공부를 하러 오는 학생들, 그 밖에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늘 붐볐고, 그 교통정리를 하는 것도 제 몫이었습니다. 박사가 오시기 전, 그리고 머무는 동안을 전후해 교수회관에 체류한 미국 교수들로는 하웰 교수(Dr. A C Howell) 부부, 할로 교수(Dr. Virginia Harlow), 필립스 교수(Dr. Elizabeth Phillips), 그리고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이던 헨더슨(Gregory Henderson) 부부가 있었습니다.

    박사와 제가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저는 영어로 듣고 말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박사의 말씀을 통역하고 대화하면서,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처럼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박사께서 정성을 쏟으신 고아원이나 중·고등학교에 갈 때면 늘 함께 가서 통역을 했습니다. 2층에 머물던 영국 교수가 떠나자 박사는 제게 그 방에 가끔 와 있으면서 일을 도와달라고 말씀하셨고, 덕분에 박사의 일상생활을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박사는 “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짜고 매운 한국 음식은 먹기 어렵더라”며 주로 양식을 드셨는데, 수프 같은 가벼운 음식이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셨습니다. 교수회관에는 개성에서 온 부부가 음식과 청소 등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한국 경제가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교환교수로 온 미국 교수들에게는 미8군 PX에서 장을 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식당 아주머니가 한국의 시장에서 장을 봐서 만드는 음식을 드셨습니다.

    “범죄 성향이 있나봐 부자만 보면 훔쳐서 가난한 이에게 주고 싶거든”

    최진영 교수(오른쪽), 그리고 그의 두 딸과 담소 중인 스코필드 박사. 1967년 스코필드 박사가 최 교수의 미국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남편이 촬영한 사진이다.



    “운찬은 앞으로 큰일 할 학생”

    제가 몹시 놀랐던 것은 박사께서 당신의 몸에 닿았던 내의는 절대로 세탁물로 내어놓지 않고 매일 밤 손수 목욕실에서 세탁하신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듣지 않으셨답니다. 또한 계절의 변화에도 개의치 않고 항상 푸른빛 도는 회색 양복 한 벌에 낡아서 베이지색이 되다시피 한 흰 셔츠를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매셨습니다. 어쩌다가 새 양복을 선물 받아도 다른 일에 쓰시는지,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박사의 일상에서 첫째가는 일은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세계 각처로 후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하루에도 수십 통씩 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타이프를 치거나 우편 업무를 도와드렸습니다. 그다음으로 하는 것이, 열심히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보태주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박사께서 처음으로 ‘정운찬’이라는 학생의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집이 어렵지만 명석해 앞으로 큰일을 할 학생”이라며 학비를 보태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운찬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고, 그 후 20여 년이 지나 각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수가 된 후 스코필드 박사 추모위원회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됐습니다.

    몇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인터뷰 | 최진영 교수 인터뷰

    “신랄한 비판정신 뒤엔 ‘유쾌한 할아버지’ 계셨죠”


    “범죄 성향이 있나봐 부자만 보면 훔쳐서 가난한 이에게 주고 싶거든”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최진영(78)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신여성’이었다. 서울사대 부속 중·고교를 다닐 때 이미 영어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후 제1회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발탁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여성이, 그것도 미혼으로 유학 가는 예가 매우 드물 때였다.

    “학창 시절에 영어에 푹 빠져 있었어요. 틈나는 대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켜고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를 들었죠. 이인호 KBS 이사장과는 중학교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절친한 친구 사이예요. 가끔 외국 분들이 학교를 방문하면 선생님들이 저와 인호만 남겨놓고 도망가곤 했지요(웃음).”

    영어 실력은 스코필드 박사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최 교수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한국에서 지내는 스코필드 박사의 말벗이 됐다. 칠순에 가까운 박사는 손이 떨려 필체가 흔들릴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최 교수가 대신 타이핑을 했다. 세계 각국의 친구들에게 한국의 고아를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지만, 가장 정성을 쏟은 일은 고아를 돕는 것이었어요. 늘 ‘어린 고아가 가장 약자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라고 하셨어요. 기독교적인 가치관에서였겠지만, 친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새어머니와 관계가 썩 좋지 않은 탓에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것 역시 이유였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자기 관리가 투철한 신사였다. 불편한 한쪽 다리 탓에 장화를 신었는데, 절대로 남 앞에선 신발을 벗지 않았다. 옷은 낡았어도 항상 깨끗하게 관리했다. 늘 잘 웃었고 농담도 즐겨 했다. 성경공부 하러 온 학생들과 종종 셔레이드 게임을 하며 어울렸다.

    “한번은 제게 ‘President’라는 단어가 주어졌어요. 칠판에 한반도를 그리고 삼팔선을 그은 다음 남한을 가리키며 엄지를 치켜세웠어요. 그러자 학생들이 금방 ‘President’라고 외쳤죠. 그때 박사가 아주 크게 웃으셨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최 교수가 미국 유학을 떠나자 스코필드 박사는 ‘My granddaughter Jeanie’에게 자신의 일상과 한국의 상황 등에 대해 편지를 써 보냈다. 부정부패가 심각한 한국을 걱정했고, 갓 출범한 군사정부가 이왕에 사회 질서와 경제 기반을 다잡아주길 희망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해 있으니 조심하라고도 당부했다. 최 교수는 유학 중에 만난 남편과 결혼해 미국에서 아이들을 낳았다. 어머니가 된 ‘Jeanie’에게 스코필드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들의 감성이 미와 선과 진을 향해 가도록 인도하면, 나중에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고 플라톤의 말을 인용해 조언했다.

    ‘남을 위해 살라’

    스코필드 박사는 1969년부터 급격하게 몸이 쇠약해졌다. 최 교수는 1969년이 끝날 무렵 받은 편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당시 뉴욕으로 이사하면서 미처 새 주소를 알려드리지 못했는데, 편지에 ‘나는 아프다. 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다오’라고 적혀 있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사망 열흘 전인 1970년 4월 2일에 최 교수에게 대필로 쓴 마지막 편지를 보내왔다. ‘오늘 너의 편지를 받고 매우 반가웠다. 나는 이제 여든하나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쇠퇴해 있다….’ 최 교수는 “내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할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라며 “박사는 내게 큰 복이었고, 많은 은혜를 주셨다”고 했다.

    최 교수는 스코필드 박사의 생애에 대해 “한 사람이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그것도 남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놀랍다”며 “그러한 인생의 자취가 내게도 많은 영향을 줬다”고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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