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몇 년 사이 우리는 많은 이를 잃었다. ‘겨울 나그네’의 곽지균 감독과 드라마 ‘모래시계’의 김종학 감독, 그리고 ‘301, 302’의 박철수 감독. 곽 감독과 김 감독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박 감독은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많은 사람은 이들의 죽음을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쪽으로 생각한다. 크게는 이 사회가, 좁게는 영화계나 쇼 비즈니스계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배창호 감독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은 그래서, 영화계를 패닉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원고가 한 줄도 나아가지 못했다. 병원으로 그를 찾아 가서 만나고 온 다음에는 더더욱 그랬다. 배 감독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그의 영화에 대해서 쓰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결국 배창호를 대중의 품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려면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배창호를 잊힌 감독으로 방치해선 안 될 일이다. 그는 여전히 뛰어난 ‘작가형 감독’이며 앞으로 훨씬 오래 영화를 해야 할 인물이다.

군사독재 시절 청춘들의 일탈과 방황을 그린 영화 ‘고래사냥’

배창호 영화의 특징은 ‘예술적 순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배창호 감독은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초원의 빛’을 유별나게 좋아한다. 이 시는 영화 ‘여행’에서도 어김없이 사용됐는데, 그 시구를 떠올리면 이번 사고와 연결돼 마음속 깊은 곳을 떨리게 한다. 왜 이 사람이 이 시를 좋아했고 유창하게 외우고 다녔는지, 그 속내를 짐작하게 만든다.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남으리 / 존재의 영원함을 / 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 / 죽음마저 꿰뚫는 / 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