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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산둥성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魯 - 호방하고 의리 있는 이웃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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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 황하, 공자

산둥성은 ‘제노의 땅(齊魯之地)’으로서 제나라의 하드 파워와 노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드넓은 평야에 황하와 제수(濟水)가 흐르고,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농수산업이 중국 내 1위, 인구가 9637만 명으로 2위다. 지하자원도 풍부해 금, 은, 유황, 석고 매장량이 중국 1위, 석유는 2위다. 풍부한 자원 덕에 예부터 기초산업과 교역이 발달했다. 지리적 요충이기도 해서 내륙으로는 중국의 양대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고, 해외로는 한국, 일본과 통한다.

인재도 많다. 800년 주나라의 역사를 연 강태공, 제나라를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로 만든 관중, 지략의 대명사 제갈량은 중국사 최고의 명재상이다. 뛰어난 사상가도 많아 유가의 공자와 맹자, 묵가의 북자, 병가의 손무 · 손빈 · 오기 등 제자백가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산둥에서 활약했다.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신비한 자연은 도교와 문학에도 영향을 줬다. 전진교를 발전시킨 구처기 등 전진칠자(全眞七者), 중국 최고의 재담가로 손꼽히는 동방삭, 판타지 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를 쓴 포송령도 산둥인이다.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바닷물을 맛보며 즐거워하는 중국 어린이들(위). 아래는 중국 전통 건축물과 근대 독일 건물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개성을 발산하는 칭다오.

대장부의 풍모

이처럼 산둥은 자랑거리가 많다. 그러나 호방한 산둥인은 한마디만 한다. “하나의 산, 하나의 강, 하나의 사람!” 하나의 산이란 산의 대명사 태산이요, 하나의 강이란 중화 문명의 젖줄인 황하요, 하나의 사람이란 지고무상의 성인 공자를 가리킨다. 중화의 정수가 모두 산둥에 있다는 말이다.



‘갈수록 태산’ ‘걱정이 태산’ ‘티끌 모아 태산.’

태산에 대한 말은 너무나 많아서 마치 옆 동네 산처럼 친근하다. 높은 산의 대명사인 태산은 얼마나 높을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말이 생길 만큼 높다면 해발 3000m? 5000m? 의외로 태산의 정상 높이는 1532m에 불과하다. 백두산, 한라산은 고사하고 덕유산, 태백산보다도 낮다. 북한을 제외하고 남한의 산만 따져도 1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높이다.

그렇다면 왜 태산이 산의 대명사가 됐을까.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고 만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중원인에게 황해가 시작되는 산둥반도는 세상의 끝이었다. 태산은 화북평야에 우뚝 서서 태양이 솟구치는 바다를 바라본다. 삼라만상을 기르는 태양에 소원을 빌기에 완벽한, 천연의 제단이다. 진시황이 태산에서 천하통일을 완수했음을 하늘에 고하고(封) 땅에 알리는(禪) 봉선의식을 행한 이래 한무제, 광무제, 당고종, 강희 · 건륭제 등 걸출한 황제들이 태산에서 천하의 안녕을 빌었다.

게다가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유학이 동아시아의 지배사상이 되자 태산은 중화문명의 정수가 깃든 곳으로 승화한다.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후 강희제는 “태산의 맥이 장백산에서 온다(泰山山脈自長白山來)”고 주장했다. 태산은 한족의 산이고 장백산은 여진족의 산이지만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한족과 여진족은 한집안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다. 그러면서도 근본은 장백산이듯 여진족이 우월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태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 문화적 상징이 된 ‘중국의 올림푸스’다.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했듯이, 바다를 보면 웬만한 물은 물로 보이지 않고, 성인을 만나면 웬만한 말이 말로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맹자의 말은 산둥인의 호방함을 대변한다. 산둥인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고, 바다를 봐서 큰물을 알며, 공맹의 가르침을 받아 의로움을 안다. 호연지기 가득한 대장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중국에서 산둥인은 “호방하고 의리가 있어 친구로 사귀기에 좋다”고 정평 나 있다. “남방인은 한 푼의 돈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만, 산둥인은 한 마디의 말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한다.

산둥인은 체격이 커서 대장부다운 풍모가 더욱 돋보인다. ‘산동대한(山東大漢)’답게 공자는 9척6촌, 제갈량은 8척의 장신이었다. 튼튼한 체력에 강인한 생활력을 갖춘 산둥인은 난세에는 난리를 일으키는 도적이 되기도 으뜸이고, 난리를 평정하는 군인이 되기도 으뜸이다. 평화로울 때는 척박한 땅을 앞장서 일구는 개척자이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일꾼이 된다.

후한말 청주(靑州 · 당시의 산둥)에서는 황건적이 크게 활개쳤다. 조조는 토벌한 황건적을 청주병(靑州兵)으로 조직해 휘하에 거느렸다. 청주병은 조조의 최정예 부대로 조조가 삼국시대 최대의 세력이 되도록 도왔다. 송말 산둥의 양산박에서는 송강 등 36인의 도적이 날뛰었다. 송 조정은 도적 토벌에 성공했지만, 금나라에 밀려 강남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산둥의 잔존 관군과 도적을 충의군(忠義軍)이라는 유격부대로 만들어 금나라의 후방을 교란케 한다. 훗날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 ‘수호지’의 모티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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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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