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700호 특집 | ‘신동아’ 강제폐간 즈음의 풍경 |

‘구인회’ 젊은 문인의 슬픈 우정과 사랑

‘짝사랑꾼’ 김유정, ‘사랑꾼’ 이상 19일 차 불귀의 객 되다

  • 입력2018-01-07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두산아트센터 제공]

    [두산아트센터 제공]

    성기웅 작·연출 ‘20세기 건담기’에서 이상(안병식, 왼쪽)이 일본 동경으로 떠나기 전 김유정(이윤재) 병문안을 간 장면. 똑같이 치질과 폐병을 앓는 두 사람이 제대로 앉지도 못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동병상련을 나누는 장면은 웃음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명장면이다.

    1936년은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20세기의 그 어떤 해도 의미심장한 일로 가득 차 있겠지만, 이해만큼 역동적인 역사가 펼쳐진 해도 드물 것이다. 그 한가운데에는 그해 여름 8월에 열린 베를린 올림픽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전 세계에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전파하겠다는 히틀러의 욕망에 따라 유치되고 준비됐다. 올림픽의 발상지 아테네로부터 성화를 봉송한다는 이벤트가 처음 시작된 것도 이때라고 한다. 새로 발명된 텔레비전이라는 근대적 기술을 통해 이 행사는 영상으로 중계됐다. 

    이 올림픽에서 조선 선수가 처음으로 메달을 땄다. 마라톤 종목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역주는 당시 개국 10주년을 맞아 청취자를 늘려가고 있던 경성라디오에 의해 중계방송됐다.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시상대에 선 두 선수의 사진을 실으며 그 가슴팍에서 일장기를 지웠다가 무기정간을 당했다. 두 신문사가 펴내던 잡지 ‘신동아’와 ‘중앙’은 강제 폐간되고 만다. 잘 알려진 이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가 파시즘으로 치달아가며 조선 사람들의 민족 감정을 경계하고 조선어 언론을 억압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었다. 

    1936년이 역사상 문제적인 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 시점을 경계로 파시즘은 폭주하기 시작한다. 이해가 저물 무렵, 소련에서는 스탈린 헌법이 제정되고, 독일과 이탈리아, 독일과 일본 사이에서는 협정이 체결된다.

    1936년 벽두의 이상과 구인회

    [두산아트센터 제공]

    [두산아트센터 제공]

    ‘20세기 건담기’에서 구인회 멤버들의 만담과 공연을 극화한 장면. 건담(健談)은 이상이 만담(漫談)의 대용어로 붙인 용어인데 구인회 문인들이 나눈 술자리 농담과 기록을 토대로 성기웅 작가가 현대적 콘서트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나는 그동안 193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연극을 만들어왔다. 특히 2017년 9월에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20세기 건담기’라는 신작을 공연함으로써, 1930년대 최고의 모던보이 소설가 구보 박태원을 주인공으로 한 네 편의 연작 연극을 발표한 셈이 됐다. 

    앞선 세 편의 연극이 1933년부터 1935년까지를 배경으로 삼았다면, 마지막 연극 ‘20세기 건담기’는 1936년 벽두에서 시작해서 1937년 4월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었다. 구보 박태원의 절친한 친구로 내 연작 연극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해온 이상(李箱)이 죽음을 맞은 것이 바로 1937년 4월이다. 

    전작(前作)들이 구보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의 사생활, 당대의 풍속 같은 것을 다룬 것에 견주어, ‘20세기 건담기’에서 나는 당대의 거시적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시인 이상은 1936년 가을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2월 불령선인(不逞鮮人), 즉 의심스러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유치장에서 병이 깊어져 결국 죽음에 이른다. 계급주의 문학에 반대했던 이른바 순(純)문학단체 구인회(九人會)의 일원이었고, 실제로도 정치의식이나 민족의식 같은 건 무척 옅었음에 틀림없는 이상이 아이러니하게도 무척 정치적인 죽음을 맞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담은 희곡을 쓰고 그걸 무대화하기 위해 나는 그동안 모아둔 1936년 즈음의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했다. 이 한 해 동안 시대의 격동과 젊은 예술가들의 삶 사이에 생긴 대조적인 경향은 점차 짙어져 간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이상과 김유정, 두 젊은 문인은 죽음으로 다가간다. 

    늘 불우했던 이상이지만, 1935년 한 해는 특히 이상에게 최악의 해였다. 한때 사랑한 카페 여급 권영희는 매일신보 기자이던 친구 정인택의 아내가 되었다.(권영희는 우여곡절 끝에 1956년 평양에서 구보와 재혼을 하고, 반신불수에 실명을 겪는 구보를 도와 그의 유작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을 돕는다) 종로2가에서 경영하던 다방 제비는 결국 문을 닫았고, 카페 쓰루(鶴), 69, 무기(麥) 따위의 이름을 단 새로운 가게들도 거의 문도 못 열어보고 폐업해야 했다. 문필 활동에서도 여전히 별다른 인정을 못 받고 있었다. 그해 가을 이상은 이북 지역으로 방랑을 떠났다가 돌아온다. 

    1936년 벽두에 이상은 오랜만에 출퇴근 생활을 한다. 일급 1원 30전을 받으며 창문사 출판부에서 교정 일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속한 문학인 서클 구인회의 동인잡지 ‘시와 소설’ 창간호를 편집하는 일에 몰두한다. 창문사는 이상의 죽마고우인 화가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였다.(이상과 척추장애인이었던 화가 구본웅의 우정에 관해서는 ‘신동아’ 2002년 11월호에 실린 구본웅의 당조카 구광모의 글 ‘友人像’과 ‘女人像’- 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시와 소설’이란 잡지를 창문사 출판부에서 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이상을 비롯한 문인들을 돕는 후원자 노릇을 한 구본웅의 후의 덕분이었다. 

    한국문학사에서 무척 중요하게 언급되는 구인회는 1933년 8월에 소설가 이태준, 시인 정지용을 비롯한 문인 혹은 예술가 아홉 명이 모여 만든 단체였다. 이들은 카프(KAPF)의 계급주의 문학을 배격하며 이른바 순(純)문학을 표방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소설가 이효석과 영화감독 김유영 등이 탈퇴한 자리를 신진 문인이던 구보 박태원과 이상이 채우게 된다. 1902년생인 정지용, 1904년생인 이태준은 1910년생인 구보와 이상에게 선배이자 멘토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구인회의 ‘젊은 피’, 이상과 구보

    구인회의 일원으로 발탁된 것에 두 사람은 무척 기뻐했다. 아마도 주류 문단에 말석을 차지하며 진입했다는 감격을 느꼈을 법하다. 반면에 이들의 친구인 소설가 안회남은 자신이 거기 끼지 못한 것에 울분을 터뜨리며 구인회를 비판하는 대열에 서게 된다. 당시 구인회가 비판받은 까닭 중 하나는 신문사와 잡지사를 다니는 작가들이 끼리끼리 뭉쳐 지면을 독식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934년 여름, 조선중앙일보 문예부장이던 이태준의 의뢰로 이상은 연작시 ‘오감도’를, 구보는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과 박태원의 처지가 구인회의 다른 선배들과 달랐던 점은 출근할 직장이 없다는 데 있었다. 1936년 초의 시점으로 따져보자면, 시인 려수 박팔양은 조선중앙일보에 재직 중이었고, 이상과 구보가 무척 믿고 따르던 시인 겸 평론가 김기림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두 번째 유학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태준은 조선중앙일보 문예부장에서 퇴직했지만 같은 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해 전에 받던 월급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잡지 ‘가톨릭청년’을 맡아 편집하던 정지용은 휘문고보 교사였고, 월파 김상용은 이화여전 영문과 교수였다. 

    이렇게 다들 바쁜 처지고 보니 구인회 모임은 출석보다 결석이 많았고, ‘변변히 이야기도 못 하고 흐지부지 헤어지는’ 수가 많았다고 한다. 동인잡지의 창간호를 내는 일도 거의 이상 혼자 동분서주하는 형국이었다. 그래도 이상은 기꺼이 이 일을 도맡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적은 편집후기에는 그런 이상의 고충과 보람이 드러난다. 

    3월 13일을 발행일로 해서 ‘시와 소설’의 창간호는 세상에 나온다. 마침표 없이 아주 긴 한 문장으로 일관한 구보 박태원의 실험적 소설 ‘방란장 주인’이 눈에 띄고, 구인회 회원 외에 시인 백석의 시도 실려 있다. 재단법인 아단문고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접속하면 그 전문을 볼 수 있다. 총 41페이지의 얇은 이 책은 그러나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고 만다.

    이상과 김유정의 동병상련

    ‘시와 소설’ 창간호를 만들던 1936년 초에 구인회에 새로 입회한 사람이 두 사람 더 있는데, 바로 소설가 김유정과 평론가 김환태다. ‘봄봄’ ‘동백꽃’ 같은 토속적인 단편소설로 잘 알려진 김유정은 당시 막 자리 잡아가던 신춘문예 제도가 낳은 문단의 ‘앙팡 테리블’이었다. 1935년 벽두, 단편소설 ‘소낙비’와 ‘노다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는 1등 당선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는 가작 입선을 하는 기염을 토한 김유정은 어떤 유파로도 분류할 수 없는 독창적인 문학 세계로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모으고 있었다. 

    김유정은 낯을 무척 가렸지만 두 살 어린 이상하고는 유독 잘 어울렸다. 둘 다 가난한 데다 폐병과 치질을 앓고 있었던 동병상련도 두 사람의 우정을 부채질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이 쓴 글 ‘소설체로 본 김유정론’을 보면 둘이 함께 술을 마시며 벌인 기행(奇行)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김유정에게는 또 다른 병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짝사랑의 상사병이었다. 기왕에 김유정은 연희전문을 다니던 시절, 훗날 판소리 명창이 된 기생 박녹주를 지독히 짝사랑한 전력이 있다. 자전적 소설인 ‘두꺼비’나 ‘생의 반려’에도 드러나 있듯이 그의 구애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처절하다. 때론 혈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고 하는데,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폭력적인 스토커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김유정이 이해 봄, 다시 한번 가공할 운명적인 짝사랑에 빠진다. 당시 조선에는 월간잡지 창간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아일보에서 1931년 종합 월간잡지 ‘신동아’를 창간한 데 이어 조선중앙일보가 1933년 ‘중앙’을 창간하고, 1935년 11월에 조선일보에서 새 잡지 ‘조광’을 펴내기 시작해 잡지 발행 붐에 불이 붙었다. 작가들로서는 일간신문보다도 원고료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지면이 주어진 셈이었다. 

    김유정은 갓 창간한 여성잡지 ‘여성’의 1936년 5월호에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짧은 글을 싣는데, 바로 그 옆 페이지에 ‘어떠한 남편을 맞이할까’란 글을 쓰고 사진을 실은 여인이 있었다. 박봉자란 이름의 그 여인은 알고 보니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이었다. 미래의 남편감으로 “나무 장작개비같이 딱딱한 변호사와 사업가는 다 싫고 이해 많은 문학가”를 꼽는 이 미모의 여인에게 김유정은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박녹주에게 그랬듯이 수도 없이 연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짝사랑꾼 김유정

    [두산아트센터 제공]

    [두산아트센터 제공]

    잡지 ‘여성’ 1936년 5월호에 실린 김유정의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란 글과 인물사진(왼쪽) 그리고 그 맞은편 페이지에 실린 박봉자의 ‘어떠한 남편을 맞이할까’ 글과 인물사진. 김유정은 이를 계기로 시인 박용철의 여동생인 박봉자를 열렬히 짝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숙명적으로 사람을 싫어”하며 “상당한 폐결핵”임을 토로하는 음울한 남자의 짝사랑을 선뜻 받아들일 여자가 얼마나 있을까. 박봉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대로 실은 것으로 보이는 김유정의 글 ‘병상의 생각’(‘조광’ 1937년 3월호)을 보면 연애편지라기엔 걸맞지 않은 힐난과 궤변이 넘쳐난다. 

    “근대식으로 제작되어진 한 덩어리의 예술품- 내가 이렇게 당신을 불렀던 것도 얼마쯤 당신을 대접하여 있는 걸 알아야 될 겝니다. 당신은 행복인 듯 싶이 불행한, 참으로 불행한 사람의 하나입니다. (중략) 당신에게는 생명이 전혀 없습니다. 그 몸에서 화장과 의장, 혹은 장신구를 벗겨내고 보면 거기에 남는 것은 벌건, 다만 벌건, 그렇고도 먹지 못하는 한 육괴(肉塊)에 더 되지 않을 겝니다.” 

    그런 김유정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이 날아든 것은 그해 6월쯤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바로 박봉자가 구인회의 새 동료인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김환태와 김유정이 얼마나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아무튼지 가까운 동료 문인에게 짝사랑하던 여인을 빼앗긴 설움은 일종의 배신감으로 이어진 것 같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박용철, 김환태에 비해 무일푼의 병자였던 자신의 처지를 깊이 비관했을 법도 하다.

    사랑꾼 이상

    어떤 기록에 따르면 그 소식을 듣고 김유정은 박봉자에게 쓰던 서른한 통째의 연서를 부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7월에는 정릉의 절간으로 들어가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김환태문학관의 자료에 따르면 김환태와 박봉자는 이 해 6월 1일에 결혼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저런 사실에 비추어보건대 그 기록은 의아한 데가 있다. 10월 초 이상이 일본에서 유학하던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에 김환태가 종교예배당에서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진으로도 남아 있는 그 결혼식은 9월 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상 역시 그 해 봄, 정릉 인근의 한적한 곳에 파묻혀 요양 생활을 한 것 같다. ‘시와 소설’ 창간호를 낸 직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은 김유정과 다르게 행복한 연애에 빠진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다니던 여학생이었고, 죽마고우 구본웅의 인척인 변동림이 그 상대자였다. 변동림이 훗날 화가 김환기와 재혼한 후에 펴낸 에세이집 ‘월하의 마음’에 따르면 이상과 변동림은 교외의 숲을 거닐며 데이트를 했다고 한다. 

    1936년 3월까지만 해도 정릉은 서울이 아니었다. 옛 한양의 사대문 안과 많이 다르지 않던 서울의 행정구역이 동북쪽으로 돈암동과 정릉 일대까지, 남서쪽으로는 한강 건너 영등포 일대까지 넓어진 건 4월 1일의 일이었다. 일제는 서울, 당시 명칭으로 경성을 교통과 통신, 위생의 체계가 잘 갖추어진 이른바 근대적 도시로 개발하고자 했다. 

    일제가 그렇게 ‘일본 제국 제7의 도시’라고 선전했던 경성에는 새로운 근대적 문물이 쏟아져 들어와 생활의 감각을 바꿔놓고 있었다. 구보와 이상 같은 모던보이 예술가들은 그런 변화에 호기심을 느끼고 편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도시의 풍속을 문장으로 담으려 했고, 새로운 가치관과 그로 인한 혼돈 속에 자신의 몸을 맡기려 했다. 연애와 결혼에서도 그들은 종래의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했다. 이상의 경우는 이해 4월에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엽기적 치정극 ‘아베 사다 사건’에 크게 흥분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이한 자신의 연애 행각을 그대로 적은 실화인지 픽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글들을 작품으로 발표했다. 

    이상이 남긴 많은 작품에서 변동림은 발칙하고 도발적인 모던걸로 그려진다. 무학의 작부 출신이던 첫 동거녀 금홍이와 달리 변동림은 현대적인 교양으로 이상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고, 6월쯤부터는 시내로 나와 지금의 을지로 부근에서 사실상의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의 신혼 생활은 기대만큼 마냥 행복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결혼한 지 서너 달이 채 안 된 새신랑임에도 불구하고, 또 9월 ‘조광’에 발표한 단편소설 ‘날개’가 거의 난생처음으로 찬사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을 떠나 외국에 가보기로 마음먹는다. 

    따지고 보면 이상과 김유정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동료 문인은 일본 유학을 경험한 이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 잡지에 일본어로 시와 일러스트를 발표한 별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먼 서양으로 떠나겠다고 호언을 내뱉기 시작했지만, 가난한 그에게 그건 허언에 불과했다. 재산가의 자제나 벼락부자가 아닌 이상, 당시 조선 청년이 외유와 유학을 떠날 수 있는 곳은 도쿄밖에 없었다. 결국 이상은 도쿄를 잠시 들러 뉴욕 같은 곳으로 가겠다는 구실로, 어딘가 학교에 적을 두는 것도 아닌 목적이 불분명한 도쿄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9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김유정과 이상

    하지만 도항허가증이 쉽사리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이미 조선이 일본 제국이 되어버린 1910년 9월에 태어나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출생신고를 한 그였지만, 몇 년 동안을 조선총독부 건축과에서 근무한 그였지만, 이른바 내지(內地)로 불리던 일본 본토는 그가 원하는 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시절은 하 수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연초에 일어난 극우 군사 쿠데타인 2·26사건이 일제 파시즘의 행로를 예고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황국 신민화 정책이 가동되어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었다. 해외에서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이 현실이 됐고,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구보나 이상, 김유정, 김환태 같은 당시의 젊은 문인들은, 특히 비정치적인 예술지상주의를 신봉하던 그들은 당시의 정치 동향을 얼마나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박태원에게 1936년은 생활고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이어간 해다. 1월에 첫딸을 본 그는 그동안 얹혀살던 형 집에서 독립해 경제 문제에 맞닥뜨린다. 직장이 따로 없는 전업 작가로서 그가 나무 값, 쌀값을 벌 수 있는 수단은 부지런히 원고지를 채워나가는 일밖에 없었다. 그중 ‘조광’ 8월호에 연재하기 시작한 장편소설 ‘천변풍경’은 한국 문학사에 명작으로 남게 된다. 

    평론가 김환태는 평론가답게 시대의 풍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구인회에 가입할 즈음이던 1936년 초에 도산 안창호와 연루되어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약 두 달 동안 갇혔던 것에 이어 일제 말 사상 사건으로 다시 한번 옥고를 치른다. 1944년에 죽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뜬 것은 그의 처남이던 시인 박용철이다. 전라도의 천석지기 아들이었지만 폐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5월에 요절한다. 

    김유정의 문학 세계는 신변의 범위를 넘어선 적이 없다. 물론 그런 그의 소설들은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이 처한 애달픈 처지, 물질만능주의의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 준다. 하지만 그 자신은 단지 감상적인 개인주의자였던 것 같다. 더러 발표한 에세이에서도 그는 가난과 질병, 짝사랑 같은 사생활의 고통을 호소하기만 한다. 

    일본 도쿄로 떠나기 직전, 이상이 김유정을 찾아간 에피소드는 우습고도 슬프다. ‘실화’라는 글에서 이상은 스스로 그 일을 자조적으로 폭로한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이상이 김유정더러 동반자살을 하자고 조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김유정은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라며 이상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리고 서럽게 운다.
     
    연말, 병이 깊어진 김유정을 위해 동료 문인 김문집이 구명 운동을 벌이고, 그 덕에 김유정은 치료비와 생활비를 조금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듬해 3월 29일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그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도쿄로 떠났던 이상이 체포되어 니시간다(西神田)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것은 1937년 2월 12일, 음력 설 다음 날이었다. 술집에서 꽤 유창한 일본어로 불온한 발언을 해대다 신고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4일 후 풀려난 그는 이미 많이 병들어 있었다. 그리고 4월 17일, 도쿄제국대학 병실에서 숨을 거둔다. 

    이상이 죽고 열흘 후인 4월 26일은 독일 공군이 게르니카 공습을 일으킨 날이다. 그리고 석 달 후인 7월, 일본은 중일전쟁을 도발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