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명사에세이

새해, 전자방(田子方)을 그리며

  • 입력2018-01-1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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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초반. 내가 국역연수원(현재의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한국고전번역교육원)에 막 입학해 한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할 때에 경험한 일이다. 1974년 5월의 어느 날 ‘통감절요(通鑑節要)’ 시간에 맛본 감동은 칠순을 앞둔 지금도 생생하다. 

    위나라 태자 위격(魏擊)이 외출하다가 노상에서 아버지의 스승인 전자방(田子方)을 만났다. 즉시 수레에서 내려 예를 갖춰 인사했으나 자방은 답례하지 않았다. 위격이 노하여 전자방에게 물었다. 

    “부귀한 자가 거만하게 굴 수 있습니까, 아니면 빈천한 자가 거만하게 굴 수 있습니까.” 

    전자방이 답했다. 

    “오직 빈천한 사람만이 거만하게 굴 수 있지요. 부귀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거만하게 굴겠습니까. 나라의 임금이 거만을 떨면 나라를 잃게 되고, 대부가 거만을 떨면 봉지(封地)를 잃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사람이 임금으로 대접받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봉지를 잃은 대부가 대부로 대접받았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선비는 빈천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행함이 임금과 맞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떠날 뿐입니다. 어디 간들 빈천한 신분이야 못 얻겠습니까(安往而不得貧賤哉).” 



    그제야 위격이 사과했다. 

    ‘통감절요’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간추려 엮은 역사서다. 한문을 배우는 이들이 문리(文理)를 터득하기 위해 거치는 기초 교재의 하나다. 끝까지 배우는 경우는 별로 없고 두 권을 떼면 대체로 기초적 문리는 얻는다. 나는 방은(放隱) 성락훈(成樂薰) 선생에게 이 책을 배웠다. 대부분 한기(漢紀)에서 끝내는 수업을 당기(唐紀)까지 한 것을 보면, 선생이 한문 교육에서 통감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부귀한 사람이 어찌 감히 거만하게 굴겠는가”

    전자방은 중국 전국시대 초기 위(魏)나라 사람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에게 배웠다. 높은 도덕과 학문으로 제후들에게 명성을 날렸다. 전국 초기 맹주인 위문후(魏文侯)는 그를 스승으로 삼아 국정을 자문했다. 그에게서 처신상의 구차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선비의 한 전형을 본다. 

    ‘설원(說苑)’에는 전자방에 관한 이런 일화도 전한다. 

    한번은 전자방이 위문후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태자 위격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문후를 뵈었다. 빈객과 대신들이 모두 일어나 예를 표했으나, 전자방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문후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고, 태자도 같았다. 전자방이 말했다. 

    “태자를 위해서 좌석에서 일어나자니 예에 맞지 않고, 태자를 위해 일어나지 않으니 죄를 지은 꼴이 되었네요. 참고로 초공왕(楚恭王)이 태자 시절에 있었던 일을 하나 말씀드리지요.” 

    이는 다음과 같다. 태자가 길에서 대부 공윤(工尹)을 만났고, 공윤은 공경의 의미에서 종종걸음질로 길가의 남의 집 문안으로 피하니, 태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 집 문 안으로 들어가 그를 찾아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비를 공경하는 자, 그 아들까지 공경하지 않는다”


    오직 빈천(貧賤)한 사람만이 
    거만하게 굴 수 있지.
    부귀(富貴)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거만하게 굴겠습니까.


    “대부께서는 어찌하여 이리 행동하십니까. 나는 ‘아비를 공경하는 자는 그 아들까지 공경하지 않는다. 그 아들까지 공경하면 그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敬其父者 不兼其子 兼其子者 不祥莫大焉)’고 들었습니다. 대부께서는 어째서 이리 행동하십니까.” 

    공윤이 대답했다. 

    “이전에는 태자의 외모만 알았는데, 이제는 태자의 마음까지 알았습니다. 내가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 앞으로는 당신이 ‘피하는 나를 찾으러’ 어디를 갈 일이 있겠습니까.” 

    위문후가 자방이 한 이야기를 듣고는 “훌륭하다”고 했다. 태자 위격은 전자방이 일러준 초태자의 말을 배송(背誦)했고 세 번을 되뇐 뒤에 전자방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전자방의 두 고사는 2400여 년 전의 옛일이다. 힘센 자의 ‘갑질’은 그제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훌륭한 군주로 칭송받는 위문후와 그가 존경하는 스승인 전자방의 경우에도 그러했으니 여타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전자방이 들려준 ‘아비를 공경하는 자는 그 아들까지 공경하지 않는다. 그 아들까지 공경하면 그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는 말은 그 의미가 심장(深長)하다. 전부터 전해오는 미담이었을 터이나, 당시에도 이를 말하는 이는 별로 없었던 같다. 아비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 아비와 그 자식을 동일시(同一視)하고 같은 대우를 할 경우에 맞게 되는 결과가 얼마나 불행한 사태를 부르는지를 전자방은 예측하고 몸으로 막고 나섰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교도가 효과를 본 것일까. 태자 위격(위무후)은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위했고, 그의 아들은 맹자(孟子)를 초빙해 국정을 자문했던 위혜왕(魏惠王, 양혜왕·梁惠王으로도 알려졌다)으로, 50년간 국정을 담당하면서 위나라 초기의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전자방을 알게 된 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에 박힌 그의 언행은 나의 뇌리에 생생하다. 아마도 사회에 만연한 ‘힘 있는 이’들의 갑질에, 그처럼 정면승부한 사례를 보지 못한 데서 받은 충격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수시로 본다. 부모가 사회적 지도자이면, 그것이 정계이든 재계이든 그 어느 분야이든, 그를 따르는 이들이 그의 자식까지도 본인이 모시는 지도자에 준해서 대접하고,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를. 하지만 그 이후의 일도 보게 된다. 그들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맞았고, 또 맞게 되는지를. 

    사회 각계 힘 있는 자들의 갑질은 요즘도 극성을 부린다. 갑질 없는 사회의 도래를 바라는 마음에서, 강력한 기득권 그룹의 일원이면서도 갑들을 향해 용감히 맞서 이긴 전자방 같은 인물의 출현을 대망(待望)한다. 새해에는 그러한 세상에 더 가까워지기를.


    신승운
    ● 1951년 경기도 양평 출생
    ● 성균관대 문학박사
    ● 한국고전번역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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