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호

연극 ‘브라보 엄사장’… “웃다 보니 우리였네”

‘철면피’ 사장과 아둔한 추종자들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0-05-04 10: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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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승경의 Into the Arte] 연극 ‘브라보 엄사장’

    • ‘미꾸라지’ 엄 사장의 배꼽 빠지는 세태 풍자

    • 코로나19로 무관중 연극…비대면 실황 공연

    • ‘지미집’ 등 6대 카메라, 생동감 ‘생생’

    • ‘파격 대명사’ 한태숙, ‘관록’ 박근형 손잡아

    [경기아트센터 꺅!티비 유튜브채널]

    [경기아트센터 꺅!티비 유튜브채널]

    3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홀로 봄비를 맞으며 바티칸 광장을 가로지른 후 예수 십자가상 앞에서 기도하는 엄숙한 장면이 전 세계에 중계됐다. 1522년 페스트가 로마를 강타하자, 가톨릭 신자들은 이 목재 십자가상을 들고 로마 구석구석을 돌며 기도했다. 520년 로마 대화재에서도 불타지 않은 이 십자가상이 페스트에서도 보호해 줄 거라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이윽고 거짓말처럼 페스트 확산이 멈추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대화재에도 거뜬하게 살아남은 십자가가 삶에 대한 의지를 심어준 덕분이 아니었을까.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공연장에 가기가 꺼려진다면 안방 공연을 감상하는 건 어떨까. 목재 십자가상 일화처럼 강렬한 구원을 기대할 순 없지만 사회적 격리에 따른 ‘문화 갈증’을 어느 정도 씻어줄 듯하다.

    연극의 3요소 빠진 연극

    무관중 유튜브 생중계로 공연을 진행한 ‘브라보 엄사장’.  [경기도립극단 제공]

    무관중 유튜브 생중계로 공연을 진행한 ‘브라보 엄사장’. [경기도립극단 제공]

    올해로 창설 30주년을 맞은 경기아트센터(대표 이우종)는 지난해 말 산하 예술단체인 경기도극단 예술감독으로 한태숙 연출가를 임명했다. ‘파격의 대명사’로 불리는 한 감독은 연출가 박근형의 신작 ‘브라보 엄사장’으로 첫 공연에 나섰다. 

    가부장적 인습과 편견에 사로잡힌 현 사회를 풍자하는 ‘박근형표’ 블랙코미디는 늘 인기다. 더구나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을 박근형 극본과 연출로 연극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말한 게 회자되면서 신작에 대한 기대도 컸다. 

    당초 이 연극은 3월 초·중순 공연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취소됐다. 그러자 경기아트센터는 무관중 연극으로 진행하면서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연 실황을 생중계하기로 결정했다. 혈세를 쏟아부어 제작된 일부 국·공립 극장 공연이 코로나19로 중단되면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어물쩡 넘어가는 현실에서 ‘브라보 엄사장’의 무관중 공연 소식은 더욱 반갑게 들린다. 



    사실 무대 공연을 무관객 생중계로 선보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배우, 관객, 희곡은 연극의 3요소이자 필수 조건이다. 관객과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연기에 몰입하는 배우들에게 관객이 없는 연극은 ‘김 빠진 사이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브라보 엄사장’은 관객만 없을 뿐 공연장 연극의 생동감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지미집(Jimmy Jib·크레인 같은 구조물 끝에 카메라를 설치해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무인 카메라) 등 6대의 카메라와 모니터, 방송 송출 프로그램 등 연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비들을 갖췄다. 배우들은 관객을 응시하듯 카메라와 눈을 맞췄다. 물론 무대 전체를 감상하는 연극을 카메라 클로즈업 장면에 담는 데 한계가 있겠지만, 실시간 관객 채팅방에는 “고맙다”는 응원 댓글이 이어졌다.

    오 여사와 엄 사장의 울릉도 트위스트

    막이 오르면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로 시작하는 ‘울릉도 트위스트’(이시스터즈가 1969년 발표한 곡)가 조명이 켜지지 않은 무대에서 울려 퍼진다. 무대는 울릉도의 한 ‘부동산’이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중개업소가 관광지 개발붐을 타고 ‘대박’이 나자 엄 사장(김길찬 분)은 지역 유지 반열에 오른다. 그는 내친김에 국회의원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달려는 욕심을 부린다. 엄 사장은 자신의 인생 역정을 포장해 줄 자서전 집필을 서두르지만 도무지 진척이 안 된다. 그러던 중 우울증 치료차 오빠가 있는 울릉도에 요양을 온 신춘문예 당선 작가 출신의 오 여사(이슬비 분)에게 접근하지만 오 여사는 자서전 대필(代筆)을 거절한다. 이즈음 오 여사의 오빠 오동식(한범희 분)이 문제를 일으켜 수감되자 엄 사장은 오빠를 위한 탄원서를 써주면서 오 여사의 환심을 사고, 그녀는 기꺼이 대필을 맡는다. 

    그러나 대필 작업이 마무리돼 갈 무렵, 엄 사장은 엉큼한 속내를 드러내며 오 여사를 감금해 성추행한다. 출소한 오동식은 동생이 당한 수치스러운 모욕을 되갚아주려 하지만 엄 사장은 오히려 오 여사를 꽃뱀으로 몰고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브라보 엄사장’도 박근형 연극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웃음을 유발하는 반어와 풍자가 넘쳐난다. 임산부인 호수다방 황 마담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나, 토지의 작가가 박경리가 아니라 (화가인) 천경자라고 이구동성 떠드는 장면, 경찰 이 순경이 근무시간에 상관이 운영하는 다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장면 등 웃음보 터지는 시대 풍자가 돋보인다. 다시 극 후반으로 돌아가 보자. 

    엄 사장의 출판기념회 날 오동식은 심부름센터 직원들을 경찰로 둔갑시켜 엄 사장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뒤 동생 성추행 사실을 자백받는다. 엄 사장은 이 일로 심한 충격을 받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회의원 공천에서도 배제된다. 그러나 아지트인 ‘호수다방’에 모인 엄 사장 지인과 추종자들은 범법 행위를 한 엄 사장을 오히려 위로하고 독려한다. 그 순간 당이 국회의원 공천 재심사에 들어가면서 엄 사장은 기사회생한다. 엄 사장은 국회의원이 되려는 야망을 드러내면서 비장한 결단을 내린다. 결국 박근형은 극을 통해 철면피 엄 사장과 아둔한 그의 추종자들이 바로 우리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들

    포즈를 취하고 있는 ‘브라보 엄사장’의 출연진. [경기아트센터 꺅!티비 유튜브채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브라보 엄사장’의 출연진. [경기아트센터 꺅!티비 유튜브채널]

    연극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군지 명확히 구분된다. 과연 현실도 그러할까. ‘브라보 엄사장’의 열린 결말에 대한 관람평은 각양각색이다.

    이 연극은 마치 카메라에 담길 것을 예상한 것처럼 ‘난해한 미학’을 빼버렸다. 묵직한 다중적 메시지를 유연하게 전달해 이해가 잘 된다. 공연이 끝나면 울릉도 트위스트의 경쾌한 가락이 귓속을 맴돈다. 다만 연극에 등장하는 지명과 단체, 인명 등이 ‘허구’라고 밝혔지만, 극중 울릉도는 현실과 거리감이 커 사실감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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