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호

김종인 “노무현은 노력으로, 문재인은 우연으로 대통령 돼”

깐깐한 경세가의 한국현대사 大해부 ‘김종인,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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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1-01-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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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 백선엽은 ‘영웅’

    • 좌파가 이승만 폄하하려 김구 띄워

    • 北에 환상은 금물, 언젠가 궤멸할 것

    • 기회 오면 통일에 전력 쏟아 부어야

    • 국민의힘에 대한 국민의 회의론 존재

    • 한국 보수는 보수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

    • 과거 국민의힘은 기득권·돈 많은 사람만 옹호

    • 文 겨냥 ‘겉으론 민주주의, 실제로는 新독재’

    • 경제 난장판 만든 장하성, 무능한 데다 양심도 없어

    • 김동연 개인적으로 잘 알아…‘소주성’ 찬성 안 해



    1월 25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000년생 곽효민 양과 ‘김종인, 대화: 스물 효민 묻고, 여든 종인 답하다’를 출간했다. 이에 앞서 1월 22일 김 위원장이 ‘신동아’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도균 객원기자]

    1월 25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000년생 곽효민 양과 ‘김종인, 대화: 스물 효민 묻고, 여든 종인 답하다’를 출간했다. 이에 앞서 1월 22일 김 위원장이 ‘신동아’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도균 객원기자]

    금요일인 1월 22일 오후 4시. 김종인(81)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당사에 없었다. 대신 서울 광화문 개인 사무실에서 곧 출간될 ‘김종인, 대화’에 관해 인터뷰를 시작할 참이었다. 지난해 나온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1963년을 기점으로 서술이 시작됐다. ‘김종인, 대화’는 출발선이 해방 전후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에 대한 평가를 피해갈 수 없다. 그는 해방 전후사에 대해 “그전에는 혼자만 생각했지, 공개적으로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작심한 듯 말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김구 선생이 해방 이전까지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한 업적은 평가할 만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는 데는 별로 기여한 바가 없어요. 소위 좌파(左派)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승만을 폄하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김구를 띄우는 거지.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고.” 

    이 장면은 기이하다. 그는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의 손자다. 생전의 가인은 우남(雩南·이승만의 호)과 수차례 불화했다. 김 위원장이 ‘김종인, 대화’에서 꺼낸 표현을 빌자면 우남은 가인에게 “몹쓸 일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우남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그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딱 세 사람만이 “대통령직에 대해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갖고 준비를 한 인물”이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나머지 대통령들은 준비 없이 집권했다는 뜻이 된다. 이렇듯 ‘김종인, 대화’를 읽다보면 김 위원장이 현대사(現代史) 논쟁의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팔순의 정객과 2000년생 대학생과의 대담집이라는 형식에도 눈길이 간다. 이 기사는 그의 책과 그와의 인터뷰를 부지런히 오간 결과물이다. 얘기는 다시 이승만으로 돌아간다.




    이승만의 탁월한 현실감각

    -2016년 1월 28일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에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해 “자기 스스로 건국 하면서 만든 민주주의 기본적인 원칙을 소위 3선 개헌이라든가 부정선거로 파괴, 결국 불미스럽게 퇴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건 사실이죠. 해방 전 업적이나 정부 수립 과정, 6‧25 사변을 극복하는 데까지는 이 전 대통령의 업적이 대단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양반이 권력에 대한 욕심 탓에 1954년 ‘사사오입(四捨五入·자유당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동원한 논리) 개헌’을 했고, 1956년 3대 대통령으로 출마했잖아요. 그때부터 이 전 대통령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거예요.” 

    -‘김종인, 대화’에서는 이 전 대통령이 재선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더군요. 

    “재선까지만 했으면 그 양반이 우리나라의 국부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 이후에 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이 전 대통령의 장점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김종인, 대화’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승만은 다른 건 몰라도 이념과 외교,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탁월한 현실감각을 지닌 사람이에요. 이것이 회피할 수 없는 미래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통일정부’ 같은 이상주의(혹은 좌익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빨리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그의 세계관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이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김구는 이상주의자다. 반면 이승만은 국제질서의 역학에 맞춰 건국의 설계도를 제작한 현실주의자다. 이것은 마치 ‘명분론 대 실리론’의 오랜 대립을 떠올리게 한다. 실현 가능한 변화를 지향하는 김 위원장으로서는 후자를 택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의 두 패러다임, 즉 외교독립과 무장투쟁의 공과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김종인, 대화’에서 일제 치하 당시 이승만의 외교성과를 높이 평가했더군요. 

    “이승만이 카이로회담(1943년 11월) 같은 데 가서 코리아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된 계기를 만든 건 틀림없는 사실이잖아요.” 

    -하지만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개별적 독립투쟁은 있었지만 (조선 사회가) 집단적인 무력투쟁을 한 적은 없어요. 2차 세계대전 직전 만주에 독립군이 형성됐지만, 그 자체가 대한민국 독립으로 이어진 건 아니잖아요.” 

    -김원웅 광복회장은 지난해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승만은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폭력적으로 해체하고 친일파와 결탁했다. 대한민국은 민족 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고,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친일파 청산과 관련해 프랑스와 비교를 많이 하는데, 프랑스는 4년 간 히틀러 체제 하에 있었어요. 짧은 기간에도 히틀러 체제에 협력한 사람들은 쉽게 청산이 가능해요. 우리는 36년간 식민지 생활을 했어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 관헌이 된 사람도 있어요. (물론)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해산해버리는 바람에 민족반역자 처벌이 어려워졌어요. 또 이 전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순사 출신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니 그 사람들(친일파)이 득세하는 세상이 된 거지. 지금 와서 (비판적으로) 말할 수는 있지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잖아요.”


    북한은 궤멸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냥 은유적 표현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낸 사람이 아니라, 백선엽 장군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영웅’ 그 자체”라고도 했다. 

    -지난해 백 장군이 별세했을 때 여당 일각에서는 그의 친일 행적을 거론하면서 현충원 안장에 반대했습니다. 

    “백 장군이 일제 치하에서 만주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서 짧은 기간 복무했던 사실을 놓고 친일이라고 하는데, 그보다는 국군을 창설하고 6·25 때 세운 공적을 더 평가해야지. 1950년 7~8월 당시 대한민국은 없어질 뻔한 나라에요. 그때 백 장군 같은 사람들의 공적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는 거요.” 

    그는 민주당 비대위원장이던 2016년 2월 9일 “언젠가는 북한 체제가 궤멸하고 통일의 날이 올 거라고 확신한다”고 말한 바 있다. 북한과의 대화를 추구하는 민주당의 기류와는 동떨어진 발언이었다. 

    -여태 ‘북한 궤멸론’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까. 

    “북한에 대해 쓸 데 없는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어디를 겨누고 있는지 냉정히 평가해야 해요. 흔히 미국을 겨냥한다고 하는데, 북한이 과연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있겠어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남한을 상대로 만드는 거예요. 과거 소련이 미사일과 핵탄두가 없어서 몰락한 게 아니라고. 그런 걸 만드느라 백성의 경제적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몰락한 거요. 북한도 마찬가지예요. 굶주려 죽는 사람이 있는데도 핵과 미사일만 개발하는 국가는 언젠가 궤멸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김종인, 대화’에서 통일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더군요. 

    “통일의 기회가 오면 우리가 준비가 안됐다고 못하겠다고 그럴 거예요? 기회가 오면 무조건 통일을 하는데 전력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어요.” 

    이 대목에서 김 위원장을 ‘통일론자’라고 오해해선 곤란하다. 그는 ‘김종인, 대화’에서 1960년 4·19 직후 학생사회 일각이 ‘판문점 남북학생회담 개최’를 촉구한 것을 놓고 “몽상적인 통일을 주장하고 나섰다”고 했다. 지금 그는 한반도 위기관리 프로세스의 하나로 통일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흡수통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까. 

    “한 체제가 무너지지 않고서는 통일이 안돼요.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 되고 싶어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자기네 체제로는 백성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고 또 국민 스스로 서독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 통일이 된 거지. 우리나라도 그런 상황이 오지 않으면 통일이 안돼요.”


    외양은 김종인黨, 속살은 자유한국당

    2020년 7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에서 시정연설을 마친 후 국회의장 접견실에서 김종인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020년 7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에서 시정연설을 마친 후 국회의장 접견실에서 김종인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김 위원장은 ‘민주 vs 반민주’ 혹은 ‘진보 vs 보수’ 따위의 진영 구도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그는 ‘김종인, 대화’에서 “특정 이념에 경도된 정당은 이미 대중정당이 아니다”라면서 “아직까지도 좌파니 우파니 하면서 시대착오적 명분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또 “밖에서 어떻게 부르든, 정당은 기본적으로 ‘중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원론적으로야 맞는 말이지만 세력을 모으는 데는 불리한 위치 설정이다. 지역구 여론과 열성 지지층을 무시할 수 없는 의원들로서는 선뜻 ‘중도 깃발’ 아래 모이기도 어렵다. ‘외양은 김종인당(黨), 속살은 자유한국당.’ 최근 국민의힘을 놓고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국민의힘은 입으로는 대중정당을 외치지만 당내 의원들이 입법으로 뒷받침을 안 하니 여전히 이념정당에 머물러 있는 셈 아닙니까. 

    “국민의힘의 정강정책을 내가 송두리째 바꿨는데 국민에게 별로 어필이 안돼요. 정강정책을 바꿨으면 당 소속 의원들이 거기에 합당한 의정활동을 해야 국민에게 (변화했다는) 뜻이 반영될 것 아니에요? 그게 안 되니 국민의힘에 대한 국민의 회의론이 존재하고 있는 거라고.” 

    -왜 의원들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요.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 과거에는 우리나라 정당들을 보수, 진보가 아니라 여아로 나눴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운동권을 많이 공천했는데, 그 사람들이 (정치권에) 와서 스스로 진보라고 표현을 한 거예요. 그러니 이쪽 사람들은 ‘우리는 보수다’가 돼버린 거지. 지금 한국 보수는 보수가 무엇을 뜻하는 지도 몰라요. 보수가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망할 수밖에 없어요.” 

    -‘김종인, 대화’에는 보수가 먼저 개혁을 해야 한다고 했던데요. 

    “보수가 생명력을 지켜나가려면 사회를 안정시켜야 해요. 사회가 불안하면 자기네가 무너지는데 미리 개혁을 해야지.” 

    그는 ‘김종인, 대화’에서 기본소득의 도입 의의를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한 챕터의 제목이 ‘노동: 미래를 향한 선제적 개혁, 기본소득’이다. 그는 “기본소득은 좌파나 사회주의적 발상이 아니다. 보수주의자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기본소득 도입을 검토하고 실현 가능성을 타진해 봐야 한다”고 했다. 

    -기본소득이 보수의 개혁론입니까.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로봇과 AI(인공지능)가 인력을 대체하면 사람은 있는데 일자리가 없으니 소득이 없어져요. 먹고 살게 없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요? 소비가 안 되면 아무리 물건을 싸게 생산해도 팔리지를 않아요. 그래서 일정한 소비를 보장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줘야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국민의힘 안에도 기본소득론자들이 있다. 김세연 전 의원은 정부의 행정 서비스를 무인화·자동화하고 기존 복지제도를 통폐합해 비용을 아껴 기본소득 재원으로 쓰자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복지제도를 통폐합해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자, 이번 기회에 누더기 같은 복지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자’는 주장은 이상은 좋지만 현실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방법”이라고 했다. 복지 수혜자의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는 거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좌파다. 그런데 그는 전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기본소득을 제공하자는 이재명 경기지사 등의 주장과도 선을 긋는다. “세금 부담이 곱절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소득이 반드시 보편적으로 지급될 필요도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그는 우파다. 그는 재정의 역할을 중시하되 부채 증가 우려가 있는 확장재정 대신 재정 개편에 초점을 둔다. ‘김종인, 대화’의 한 토막이다. 

    “20~30대 청년들에게 기본소득을 준다고 하면 50조 원가량 예산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전체 예산이 연간 500조 원이 넘어요. 거기서 10%만 정리하면 50조 원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그렇지, 영국은 2009년에 예산의 20%를 확 줄인 적이 있습니다.”


    개혁보수? 쓸 데 없는 소리

    그와 문답을 나누다보면 국민의힘에 대한 애증(愛憎)이 느껴진다. 수차례 “우리 당”이라고 표현하다가도 이내 “바뀌는 게 없다”며 답답한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최근 당내 의원들에게 마르코 루비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 쓴 ‘공공선(公共善) 자본주의’ 보고서를 나눠줬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좌클릭’이라는 표현이 나왔다고 하던데요. 

    “일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요.” 

    -‘루비오 보고서’가 급진적 내용은 아닌데요. 

    “전혀 급진적인 내용이 아니지.” 

    -‘김종인, 대화’에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다룬 책 ‘피크재팬’도 추천했던데, 이 책 역시 당내 의원들에게 나눠주지 않았습니까. 반응이 있던가요. 

    “모르겠어요. 읽어나 봤는지. 조금이라도 사고를 변화시키려고 (책과 보고서를) 나눠주는 건데, 줘도 안 읽고 처박아 버리면 (변화했는지 안했는지) 모르는 거지.” 

    그는 ‘김종인, 대화’에서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말을 인용한다.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가 그저 시장경제에만 몰두했다면 (사회주의에)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실리주의를 명확히 드러낸 표현이지만, 한편으로는 보수정당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측과는 불화를 겪을 소지가 크다. 

    -‘김종인, 대화’에서 순수한 모형의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순수한 모형의 자본주의는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럼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은 있지도 않은 순수한 자본주의의 모형에 다다르려는 건가요. 

    “자본주의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자본주의는 스스로 상황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고 (체제를) 수정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국민의힘에는 시장경제만 주구장창 외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시장의 원리는 경쟁 아니요? 경쟁의 원리에 따르면 가장 능력 있는 사람만 생존할 수 있어요. 그런데 국가에는 능력 있는 사람 뿐 아니라 노약자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고 장애인도 있잖아요. 무조건 맹목적인 경쟁만 갖고는 사회가 폭발해버릴 수밖에 없어요.” 

    -비대위원장 취임 후 ‘약자와의 동행’을 내걸었는데, 지금은 잊힌 것 같은데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률이 높아서 매년 국민의 생활이 향상됐어요. 생계가 나아지니 항상 여당이 집권할 수밖에 없던 것 아니에요? IMF 사태 이후 중산층이 무너지고 양극화가 심화했어요. 이번에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양극의 간극이 더 벌어졌어요. 양극화를 그대로 용납하면 우리 사회가 안정적으로 갈 수가 없어요.” 

    -민생경제가 어려우면 야당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는데, 많은 국민은 ‘국민의힘이 아직 정신 못 차렸다’고 생각합니다. 

    “역대 총선에서 야당이 수도권에서 이렇게까지 참패를 한 적이 없어요. 국민의힘은 근본적으로 위기에 봉착해있다고. 시대변화에 따라 근본적으로 사고를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과거에 국민의힘은 기득권층과 돈 많은 사람만 옹호하는 얘기만 한 것 아니에요? 거기서 탈피하고 약자를 새로운 (지지) 기반으로 두자는 취지에서 ‘약자와의 동행’을 얘기한 거예요.” 

    그는 ‘김종인, 대화’에서 “보수니 진보니 좌파니 우파니 하는 말을 즐기는 정치인이 있다면 아무런 실속이 없는 사람이라고 봐도 틀림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국민의힘 내에는 이른바 ‘개혁보수’를 주창하는 그룹이 중요한 세력으로 있지 않습니까. 

    “무슨 개혁보수가 어디 있고 안보보수가 어디 있고…. 다 쓸 데 없는 소리라고. (탁자를 치며) 실질적인 행동을 무엇을 할 것인지를 두고 얘기를 해야지.”


    삼권분립 무시하는 신新독재, 연성 독재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월 22일 “국민의힘은 근본적으로 위기에 봉착해있다. 시대변화에 따라 근본적으로 사고를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했다. [김도균 객원기자]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월 22일 “국민의힘은 근본적으로 위기에 봉착해있다. 시대변화에 따라 근본적으로 사고를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했다. [김도균 객원기자]

    ‘김종인, 대화’에는 논쟁이 될 법한 표현이 나온다. 이런 내용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의회의 견제와 비판 기능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대통령의 권력을 보필하는 ‘유정회 국회’처럼 돼버렸어요. 국회의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있어요. 삼권분립이라는 의미 자체를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또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지대한 반감을 갖고 있거든요.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지금 자기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박정희 정권과 본질상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겉으로는 민주주의자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당파주의로 일관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 즉 신(新)독재, 연성 독재를 견제하는 일이 앞으로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박정희 정권은 구(舊) 독재이자 강성 독재이고 문재인 정권은 신(新)독재이자 연성 독재를 하고 있다는 취지로 읽혔습니다. 

    “지금 민주당에는 반대 의견이 존재하지 않잖아요. 금태섭 전 의원 같은 사람은 공수처법 할 적에 기권했다고 해서 공천 탈락 시켰잖아요. 반대 목소리가 없는 조직이나 정부는 결코 안정적이지 못해요. 그래서 박정희의 유신 체제도 종국적으로는 붕괴돼버린 거요.” 

    -여당에서는 신(新)독재나 연성 독재라는 표현이 너무 과하다고 보지 않겠습니까. 

    “반대 의견을 전혀 참조하지 않고 모든 걸 일사분란하게 자기 멋대로 하는 걸 독재라고 하는 것 아니에요?”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에서는 독재와 싸우겠다면서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럼 그 방식에도 명분이 있는 건데요. 

    “국민의힘에서 과거 상당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정권 탈환의 의지가 없다고 얘기해요. 무기력하다고. 박정희 시절 때는 야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도 없고, 정보(미디어가)도 발달하지 않았으니 크게 아우성치지 않으면 상당수 국민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지를 못했다고. 지금은 국민의 교육 수준이 높고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세상인데 야당이 극한투쟁을 안 해도 국민이 판단을 더 잘해요. 오히려 야당이 극한투쟁을 하면 국민이 짜증을 낼 수밖에 없는 시대에요.” 

    그는 ‘김종인, 대화’에서 대통령의 자질로 ‘개방에 대한 인식’, ‘안보에 대한 관점’, ‘다양성에 대한 이해’, ‘경제에 대한 지식’, ‘교육에 대한 의지’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세부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은 훨씬 더 많을 텐데, 그는 대표적으로 ‘관료 장악 능력’을 들었다. 즉 “대통령이 관료를 장악하지 못하면 정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동연과 개인적으로 잘 안다

    ‘김종인, 대화’에는 격한 성토의 대상이 한 명 나온다. 단, 실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문맥을 보면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주도한 경영학 교수는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있으면서 자기 이론으로 온 국민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경제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는 거기에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고 지금은 주중대사로 가 있습니다. 무능한 데다 양심도 없습니다.” 

    -장하성 대사만이 아니라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사령탑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김 전 부총리는 이 정부에 들어가서 부총리를 해야겠으니 청와대에서 정한 방향에 따라갔을 뿐이지.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찬성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영혼 없는 관료’ 아닙니까. 

    “관료는 영혼이 있으면 안돼요.(웃음) 정권은 자꾸 바뀌는데 영혼이 있으면 생존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런데도 김 전 부총리는 야권 서울시장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지 않았습니까. 

    “최근에는 여권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려 했다는 것 아니에요?” 

    -김 전 부총리가 여권도 만나고 야권도 만난 것 같던데요. 

    “몰라요. 야권에서는 만난 사람이 없을 걸?” 

    -김 위원장이 김 전 부총리를 염두에 뒀다는 보도가 상당히 많이 나왔는데요. 

    “내가 (예전부터) 개인적으로는 잘 알아요.” 

    -김 전 부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세력교체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제3지대를 염두에 둔 것처럼 읽혔습니다. 

    “낡은 세대가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가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세력교체를 얘기한 건데,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 국민의힘을 어떻게 정상적으로 만드느냐 밖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는 ‘김종인, 대화’에서 “노무현 정부는 재벌과 친하게 지냈다”면서 “노 전 대통령은 그것을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로 부르면서 합리화했다”고 평했다. 

    -최근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그나마 유연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노 전 대통령은 본인이 처음부터 대통령이 되려고 노력한 사람이고, 나에게도 도와달라고 찾아오기도 했어요. 문 대통령은 우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밀려서 (주위에서) 떠받쳐주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사람이잖아요. 차이가 있지.” 

    -한미 FTA 등 지지층이 반대하는 정책도 밀어붙이는 강단이 있었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IMF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했어요. 2002년 당시 노무현 후보는 출생배경이나 성장과정이 서민으로 보이니 국민이 선택했다고. 그런데 대통령 되고 나서 보니 누가 새로운 생각을 (주입)해줬는지 모르지만 깜빡이는 왼쪽으로 켜고 우회전했다는 것 아니에요? 서민들은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생활이 향상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거꾸로 있는 사람만 덕을 봤잖아요. 그러니 (국민이) 경제를 아는 사람이 나오면 삶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이명박 씨가 공짜로 대통령이 된 거지. 나는 노 전 대통령에게 (집권에 대한) 설계가 있었다고 보지는 않아요.”


    ‘주류 속 이방인’

    설계는 김 위원장이 정치인을 논할 때 자주 쓰는 단어다. ‘김종인, 대화’의 말미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내가 60년 동안 한국 정치를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 정치판에는 추종자는 많은데 주체적 설계자는 없다는 점이에요. 정치를 희망하는 젊은이들은 죄다 누구를 따라다닐 궁리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당의 현역 국회의원이 180명인데 사실 그 당은 정치인이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김종인, 대화’의 후반부는 그가 내놓은 설계도처럼 읽힌다. 전매특허인 경제 뿐 아니라 외교와 개헌까지 두루 논하니 마치 새 정부의 청사진처럼 보인다. 김 위원장은 “나도 이제 편하게 살아야지”라고 짐짓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와 마지막으로 이런 문답을 나눴다. 

    -‘김종인, 대화’를 다 읽고 나니 김 위원장이 ‘주류 속 이방인’ 아닌가 싶었습니다. 

    “내가 왜 주류 속 이방인이요?” 

    -집안이나 그간 살아온 과정을 보면 분명 주류 라인에 있는데, 주류 안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오지 않았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한테 의존해본 적이 없어요. 정치인은 누구 부하 노릇을 하면 안 돼. 누구의 패(牌)가 되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항상 종속된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런 정치인은 되지 말라는 거지.”

    *인터뷰 내용 중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내년 3월 9일 치러질 제20대 대통령 선거, 개헌, 차기 지도자의 조건, ‘윤석열 대망론’ 등 현안에 대한 내용은 1월 25일 공개된 ‘[단독] 김종인 “몇몇 사람이 안철수 부추겨서 날 흔들어”’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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