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문건을 감추려 했는가? 왜 문건을 삭제했는가?
‘탈원전’ 정부의 공무원이 ‘원전 지원’ 경쟁적 검토?
공개 문건 ‘고려사항’란에 핵 폐기 내용 왜 없나?
‘도보다리 USB’에 담긴 진실은…
4·27 정상회담 직후 17일간 동시다발 지원 검토
北 원전 건설 지원 검토는 김정은 요구 가능성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도보다리’까지 산책한 뒤 벤치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DB]
앞서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에 이어 당시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을 지낸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은 ‘월성 1호기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에서 이른바 청와대 ‘윗선’으로 지목돼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검찰의 공소장 공개 3일 뒤인 1월 31일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으로 대한민국의 원전을 폐쇄하면서 북한에 비밀리에 원전을 지어주려 한 여러 정황이 드러나면서 국민적 분노가 커지고 있다”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동시에 “이적행위”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공세를 높였다.
‘도보다리 USB’에 담긴 진실
검찰 수사와 야당의 공세 방향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도보다리 대화다. 당시 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건넨 USB(이동기억장치)에 북한 원전 건설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다며 USB에 담긴 내용을 공개하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청와대 발표와 언론보도, 필자의 취재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2018년 4월 27일 오후 5시 20분 평화의집에서 진행된 정상회담 환담장에서 김 위원장에게 USB를 건넨 것으로 추정된다.
청와대와 통일부는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건넨 USB에는 원자력 건설 지원과 관련한 내용이 없다”고 거듭 밝혔고, 산업부는 2018년 5월 14일에 생성된 지원방안 문건을 2월 1일 공개하면서 “남북 경제협력이 활성화될 경우를 대비해 부서별로 실무 정책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동시에 북한 원전 지원과 관련한 내용의 문건은 17건이라고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4월 27일과 5월 14일 사이, 그러니까 17일 만에 북한 원전 건설 지원과 관련한 구체적인 방안이 동시다발적으로 검토되고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산업부 공무원들은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원전 지원을 검토한 사실 자체를 숨기기 위해 관련 자료를 삭제해 버렸다. 문건 작성과 삭제에 가담한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상당 부분 삭제당하는 비극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17일간, 약 408시간 사이에 산업부 공무원들이 갑자기 대북 원전 지원을 검토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회담 내용이나 당시 활발했던 북측 실무자들과의 만남이 원전 지원 문건 검토에 영향을 줬다고밖에 볼 수 없다는 점이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직후 대북 원전 지원 검토가 시작됐다는 시기를 고려할 때 김 위원장 측의 검토 요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취임 직후부터 원전 건설 중단을 선언하고, 원전 가동이 국민 안전에 치명적인 불안을 준다고 강조한 문 대통령이 먼저 원전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을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USB에 담긴 남북 에너지 협력 내용에 원전 건설 방안은 없었다는 정부 측 인사들 주장에는 수긍이 간다. 다만 USB에 원전 건설 지원 방안은 없었지만, 풍력·조력·태양열·화력 발전소 시설 개선 내용 등 에너지 지원 계획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과 주장을 종합 판단할 때, 원전 건설 지원은 김 위원장이 먼저 끄집어냈다는 합리적 추론을 할 수 있다.
태영호 “핵 개발 후 원전 건설한 파키스탄 모델”
지난 2월 3일 필자는 북한 원전 건설과 관련한 국민의힘 정당간담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4월 27일 제1차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원전 건설안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북한은 기본적으로 핵 개발과 관련해 파키스탄 모델을 지향하는데,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나서 원자력발전소를 상당수 건설했다”고 지적했다. 핵무기 개발을 끝낸 북한이 원전 건설을 통해 전력난을 해결하려고 문재인 정부에 원전 건설을 요청했을 거라는 추론이었다.앞서 필자는 2012년 3월 한국국방연구원 재직 시절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북한 학자들과 학술회의를 한 적이 있다. 당시 학술회의에 참가한 북한 외교관들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플랜은 파키스탄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언급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이들은 지금도 고위직을 맡고 있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엄청난 제재에도 1998년에 핵무기를 개발했고, 핵실험에 성공한 3년 후인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면서 때아닌 기회를 맞았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응징 전쟁을 진행하면서 파키스탄의 군사적 협력을 얻기 위해 무려 200억 달러의 경제 지원을 약속했고, 모든 제재를 풀었다. 물론 파키스탄 핵 보유 사실은 기정사실이 됐다. 파키스탄은 현재 5기의 원전을 운영 중인데, 추가 2기를 건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원전 건설을 원할까. 미국 ‘CIA월드 팩트북’은 “2019년 기준 북한 주민 가운데 74%가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고, 시골 지역의 경우 11%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전력은 수력발전 70%, 화력발전 30%에 의존하고 있고, 전력 생산은 1990년 이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주요 생산시설에도 전력을 공급하지 못하는 북한이 전력난 극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김 위원장도 집권 이후 원전 건설에 대한 집착을 보여왔다. 2016년 5월 7차 노동당 대회에서 “‘풍부한 동력자원’에 의거하는 전력생산기지들을 대대적으로 일떠세워야 한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동시에 밀고 나가 전력 문제 해결의 전망을 열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원전 폐기·중단론자’이지만 김 위원장은 ‘원전 건설 집착론자’였던 것이다. 원전 효용성에 대한 인식은 180도 달랐다. 원전 집착론자인 김 위원장의 2016년 의지가 2018년 4월 정상회담 의제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상회담 이듬해인 2019년 김 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해 “절박한 과업은 전력 생산이다. 조·수력과 풍력, 원자력 발전 능력을 조성해 가자”고 ‘진화’했다. 지금까지 전력 생산에 있어 ‘풍부한 동력자원’이라는 인식을 넘어 매우 구체적인 전력 발전 형태를 제시한 것이다. 문 대통령의 USB에 담겼다는 조·수력이 포함되고 원자력발전소가 추가된 내용이 김 위원장 신년사에도 반영된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원전에 대한 북한의 관심과 집착은 김정은 시대에 처음 나온 것도 아니다. 아버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핵 활동 동결을 전제조건으로 2기의 경수로 원전 건설을 약속받기도 했다. 김 전 위원장은 만성적인 전력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전을 건설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김 위원장이 2019년 신년사를 통해 원전 발전을 강조하자, “비핵화가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비판적 입장을 보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2019년 4월 교체됐다.
대북 원전 지원과 관련한 본질적인 쟁점은 이제 ‘이적행위 vs 구시대 유물정치’로 프레임 전쟁이 됐다. 대북정책 관련 발언을 절제해 온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원전 지원 문건을 ‘이적행위’라고 규정하자, 문 대통령은 ‘구시대 유물정치’라며 강하게 맞받았다. 사실 구시대 유물정치라는 말은 김 위원장이 정작 들어야 할 말이다. 과거 북풍(北風)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면 북풍은 북한과 커넥션이 있는 정당만이 할 수 있다. 국민의힘은 그러한 커넥션이 없다. 구시대 유물정치론은 냉정한 진실보다는 감성에 의존한 정치 공세로 이해된다.
국민은 정치지도자들의 정치 담론을 자신의 정치적 프리즘을 통해 해석하기 때문에 정치 담론은 정치적 세 대결로 유도되고 진행되며 고착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 눈높이에서 대북 원전 지원 문건을 보면 다음 네 가지 점에서 문 정부가 당당하지 못하다.
왜 문건을 감추려고 했는가
첫째, 왜 문건을 감추려 했는지의 문제다. 국민은 문건 존재 자체를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 야당의 문제 제기 등을 통해 알게 됐다.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르면, 북한 김 위원장에 전달한 문건은 대북 반출물이다. 남북 지도자 간의 대화 내용이 아니라 북에 넘긴 물건이고, 남북한 교류협력법에 따르더라도 절차를 거쳐 국민 대다수가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둘째, 왜 문건을 삭제했는지의 문제다. 문건 삭제로 구속기소된 공무원들의 가족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다.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직을 수행했는데 구속되는 현실은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다. 누가, 왜 이들에게 문건 검토와 삭제를 지시했는가. 산업부가 검찰 공소장 공개 후 여론을 의식해 문건을 공개했지만 국민적 관심사인 ‘누가 지시했는가’는 설명하지 않았다.
셋째, 원전과 관련해 문 대통령과 현 정부와 정책 기조가 완전히 다른 모순된 정책을, 그것도 공무원들이 경쟁적으로 연구 검토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도 공직을 경험했지만, 바쁜 공무원들이 ‘남북 경제협력이 활성화될 경우를 대비해 실무 정책 아이디어 차원’에서 특정 시점에 약속이나 한 듯 검토하고, 그것도 대통령 인식이나 정책과 모순된 정책을 만들어 보고했다는 데 수긍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넷째, 공개된 문건의 ‘고려사항’란에는 북한 핵 폐기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역대 정부의 대북지원 검토 문건에는 핵심 전제 조건인 비핵화 내용이 강조돼 있다. 그런데 공개된 문건에는 고려 사항으로 “미국과 일본 등 외국과 공동으로 의사결정기구를 설치하고, 우리 정부 관련 부처가 TF로 참여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북한 핵 폐기와 관련한 내용은 빠져 있다. 그렇게 감추려 하지 않아도 될 문구가 빠진 이유는 뭘까.
투명하고 당당하게 밝혀야 하는 이유
이는 우리 국민이 2018년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전달한 USB를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2월 15일 여론조사업체 ‘입소스’가 SBS 의뢰로 2월 6~9일 전국 성인 1002명에게 ‘USB 공개 필요성’을 물은 결과 응답자의 62.7%가 ‘공개해야 한다’고 답했다(유뮤선 전화면접조사, 표본 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3.1%포인트. 자세한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안보전문가 대다수도 “북한은 현재 사실상 핵 강대국의 길을 대담하게 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한 북한에 원전 지원을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도 없다. 만약 검증된 방법으로 핵 폐기가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 원전 건설을 지원한다면 ‘말을 잘 타는 몽고군에게 새로운 말과 여물을 제공하면서 대몽항쟁을 준비하는 꼴’이 될 것이다. 당당하고 투명한 정부는 강하다. 당당하고 투명하지 않고는 역사의 눈높이에 맞는 남북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다.
만약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이나 준비 과정에서 원전 지원을 요구했다면 문 대통령은 비핵화라는 전제 조건을 당당히 주장했어야 했다. 2019년 김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원전 건설을 강조하자 그를 간접 비판한 조명균 장관은 비핵화와 무관하게 대북 원전 건설 지원을 서두르는 분위기에 일침을 놓은 것이다. 김 위원장의 원전 지원 검토 요구가 있었는지, 비핵화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요구했는지를 투명하게 밝히는 건 북한 비핵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정부는 김 위원장이 원전 건설을 먼저 요구했는지 밝혀야 한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現 국민대 석좌교수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 방문교수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