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 한 미나리 재배단지에서 농민들이 싱그러운 미나리를 수확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3월 초 영화 ‘미나리’가 개봉한다.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1세대의 현지 정착기를 다룬 작품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가난한 동양 이방인이 그곳에서 얼마나 고달프고, 쓸쓸하고, 기댈 곳 없었을까 싶은 애잔함이 앞선다. ‘미나리’라는 제목이 안 된 마음을 더 부추긴다. 사람들이 밟기 꺼리는 축축한 습지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 가느다란 줄기를 아무리 길게 뻗어도 영 힘이 없어 결국 땅에 누워 자라는 미나리.
길고 가는 줄기에 부드러운 이파리가 나풀나풀 달린 미나리는 깨끗이 씻어 날로 먹으면 가장 맛있다. [GettyImage]
그렇지만 습지를 떠나 시장에 나오는 순간 미나리는 어엿한 봄의 주연이 된다. 미나리 자리를 대신할 채소는 없다. 생생한 아삭함, 버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독특한 향, 달고 시원한 가운데 살금살금 피어나는 매운맛. 길고 가는 미나리 줄기에는 부드러운 이파리가 나풀나풀 달려 있는데 그중 버릴 게 하나도 없다. 깨끗이 씻어 날로 먹으면 가장 맛있다. 아삭함이 남을 정도로 조리하면 우적우적 많이 먹을 수 있으니 또 좋다.
맑은 복국에 미나리 듬뿍
미나리를 넣고 담근 물김치. 미나리는 봄철 밥상에서 주연으로도, 조연으로도 손색이 없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맑은 복국, 생선 매운탕, 해물찜이나 아구찜 등에 미나리를 넣지 않으면 씹는 맛과 향이 쏙 빠진다. 부재료라기에는 존재감이 너무 크다. 오이무침, 봄동 겉절이, 비빔밥, 비빔국수, 묵무침 등에도 생생한 미나리를 조금만 넣으면 어떤 양념보다 앞서 나가 입맛을 돋운다. 단, 새콤 달콤 매콤한 맛은 미나리 개성을 가릴 수 있으니 지나치게 자극적인 양념은 피하는 게 좋다.
밀가루나 감자가루 반죽에 미나리 듬뿍 넣고 전을 부치면 맛있고, 미나리를 잘게 썰어 양념간장에 넣어도 잘 어울린다. 장아찌 담글 때 미나리를 조금씩 함께 넣으면 향도 맛도 좋아진다. 김치 담글 때 미나리를 조금씩 넣기도 하는데, 미나리만 갖고 열무처럼 시원하게 김치를 담그면 초여름까지 먹을 개운한 밥반찬이 된다.
미나리를 듬뿍 얹은 매운탕. 미나리는 매운 국물 요리와 잘 어울린다. [GettyImage]
나물이나 볶음은 말할 것도 없다. 조금 색다르게 먹고 싶다면 칼국수나 수제비, 잔치국수에 고명으로 조금씩 얹어 본다. 유부초밥을 만들 때 양념한 밥에 미나리를 쫑쫑 썰어 섞거나 김밥을 쌀 때 다른 재료와 함께 넣어도 산뜻하고 맛있다.
미나리는 논미나리와 밭미나리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길고 부드러우며 습지에서 자라는 건 논미나리다. 밭미나리는 돌미나리라고도 하는데 물기 없는 땅에서 자란다. 논미나리보다 줄기가 짧고, 잎이 많이 달렸으며 향이 강하고 아삭한 맛이 더 좋다.
미나리계의 슈퍼스타 한재미나리
엇비슷해 보이는 미나리 중에도 슈퍼스타가 있다. ‘한재미나리’다. 경북 청도군 한재마을(청도읍 초현리·음지리·평양리·상리 일대)에서 나오는 미나리로, 깨끗한 물이 흐르는 습지에서 자란다. 미나리는 대체로 속이 비었는데 한재미나리는 마늘종처럼 속이 차 있다. 그렇다고 줄기 껍질이 질긴 것도 아니다. 가볍게 베어 물면 톡 끊기는 아삭거림이 좋고 향이 풍성하며, 촉촉하고 상쾌한 맛이 가득하다. 논미나리와 밭미나리 성질을 같이 갖고 있어 남다르게 사랑 받는 것 같다.
여느 때 같으면 지금쯤 한재마을은 외지 사람으로 가득 찬다. 갓 수확한 미나리를 구하려는 인파가 몰린다. 근처 식당에서는 음식마다 미나리를 곁들여 먹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특히 구운 돼지고기나 삶은 고기에 미나리를 곁들여 먹는 게 이 지역에서는 봄날의 의식처럼 전해지고 있다. 아쉽게도 지금은 사람 이동이 조심스러운 때이니만큼 미나리가 전국으로 바쁘게 이동하고 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