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한 믿음·추론에 기초한 기획
‘반핵·반미·반전’ 엮은 정세인식
미국은 침략, 북한은 평화애호?
中에 대한 태도 언급 없는 反美
南을 한 수 아래로 보는 北
1월 11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8차 노동당 대회를 통해 당 ‘총비서’로 추대됐다고 보도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2017년까지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활용한 고강도 군사 시위를 진행했다. 2017년 무렵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미국을 위협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2018년 열린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이를 배경으로 이뤄졌다.
2018년 당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한다는 정황은 어디에도 없었다. 필자는 주사파(주체사상파) 운동권으로 지난 30년 동안 북한을 지켜봤다. 북한은 수십 년 간 핵과 미사일을 개발했다. 결국 2017년 무렵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미국을 위협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즉 북한이 기껏 이룩한 군사적 성과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북핵 및 미사일 포기-대북 경제지원’이라는 딜(deal)이 가능하려면 북한이 핵을 포기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했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4월 남북정상회담 등 일련의 과정에서 이에 대한 북한의 명료한 의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막연히 ‘경제지원을 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과 판타지가 난무했다. 즉 막연한 믿음과 추론에 기초해 원자력 발전소 추진 같은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기획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인사들은 물론 많은 국민이 객관적인 존재로서의 북한이 아니라, 믿고 싶어 하는 가공의 북한에 기초해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북한이 아니라 믿고 싶은 북한에 대해 알아보자.
믿고 싶은 북한
산업통상자원부가 2월 1일 공개한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 문건. A4용지 6쪽 분량의 이 문건에는 북한 옛 KEDO 부지에 원전을 건설하는 안 등 3개의 원전 건설 방안이 담겼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흥미 있는 것은 핵에 대한 반대(반핵)가 반미·반전과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맥락이 있다. 하나의 키워드는 ‘식민지’다. 미소 냉전 체제에서 미국과 소련은 군사적으로 대립했는데. 미국이 소련을 봉쇄하기 위해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 주변 지역에 핵을 배치했다.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대표적인 핵 기지가 서독과 한국이었다. 이에 대해 주사파는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미국의 핵 정책을 무조건 수용하면서 핵을 배치했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러므로 핵은 한국의 식민성을 보여주는 핵심 징표였다.
다른 키워드는 ‘전쟁’이다. 1980년대 초반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공격적인 대소 전략을 폈다. 그 중 하나가 ‘역스윙 전략’이다. 중동 등에서 전쟁이 터지면 전장을 한정하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중동에서 전쟁이 발발할 시 북한에 대한 핵공격을 실행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가능했다. 이를 근거로 1980년대 후반 주사파 운동권에서는 미국이 핵을 사용해 북침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봤다.
1991년 냉전이 붕괴되면서 미국 핵이 가진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이를 배경으로 역사적인 변화가 줄을 이어 나타났다. 1991년 9월 27일 미국이 단거리 핵 폐기를 선언했고, 같은 해 12월 18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에 핵이 없다고 선언했다. 이어 12월 31일 남북은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가서명을 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반핵·반미·반전’을 하나로 엮고 이를 민족의 운명을 위협하는 근본 요인으로 봤던 주사파의 정세 인식은 힘을 잃었다. 그러나 핵에 대한 공포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핵이 정책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절대악’이라는 인식이 확산했고 이런 생각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원자력 발전소 폐기 정책의 기반이 된다.
北은 핵 개발 의사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6월 12일 청와대 세종실에서 국무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만나는 장면의 생중계 화면을 지켜보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실제 있던 일을 소개하겠다. 2002년 대선 정국이 한창이던 무렵 북핵 위기가 발발했다. 다시 미국의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해 이를 추궁하자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고 했다.
필자는 당시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사무처장으로 다양한 형태의 통일 강연을 하고 다녔다. 그때마다 북한의 목표가 핵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그런데 다수의 사람들이 북한은 핵을 개발할 의도도 의사도 없는데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거짓 선전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미국과 북한은 국제 정치의 플레이어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적절한 무력과 정치력을 갖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속성 같은 것 말이다. 즉 북한도 핵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는 국가로 봐야 했다. 이는 생명력을 가진 존재가 먹고 배설하고 호흡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운동권은 북한을 두고 ‘원래부터 평화애호 국가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핵을 개발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핵 또는 북한이라는 국가 자체를 신비화한 셈이다. 운동권은 오랫동안 미국은 침략적이고 북한은 평화애호적이라는 생각을 이어왔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개발한다면 그이는 정치적 거래를 위한 도구일 뿐이고, 그러므로 언제라도 적절한 보상만 주어지면 포기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4월 남북정상회담 등 일련의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국민의 생각이 딱 그와 같았다. 그들은 북한의 고강도 군사공세 조차 평화와 협상을 위한 수단이고 북한에 충분한 경제지원이 이뤄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봤다. 즉 문재인 정부는 믿고 싶어 하는 북한을 염두에 두고 협상을 한 것이다.
동화 같은 판타지
최근 우연히 유튜브에서 운동권 조직이 주최한 통일행사를 지켜본 적이 있다. 분량은 2시간 안팎 분량이었다. 그들은 2021년 시점에서 반미투쟁의 일상화를 과제로 제시했다. 행사를 보는 내내 의문에 휩싸였다. 행사 주최 측 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에 대한 의구심이기도 했다.첫 번째 의문은 이렇다. 반미는 알겠는데, 중국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1990년대의 어느 시점이라면 반미는 그나마 말이 된다. 당시 미국은 유일 패권국이었고 중국은 여전히 개발도상국 상태에 있었다. 북한은 식량난에 시달릴 때였다. 그러나 2020년대에 반미를 주장하려면 중국에 대한 질문을 비켜갈 수 없다.
가정해보자. 만약 반미 운동이 성과를 거둬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친중’으로 이어진다. 아마도 한반도는 중국의 영향력 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반미건 반중이건 공히 정치노선이다. 국민이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럼에도 논리적인 정합성은 갖고 있어야 한다.
즉 반미는 이해하지만 중국에 대한 태도가 결여된 반미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다. 반미투쟁의 일상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반미와 이에 따른 주한미군 철수가 친중으로 이어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30년 전 ‘반핵·반미·반전’을 주장할 때 품은 인식을 2020년대의 국제질서에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문은 북핵에 관한 것이다. 지난 1월 제8차 노동당 대회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들은 다양한 무기를 열거하며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여줬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조국통일 관련 언급이다. 북한은 “강력한 국방력에 의거하여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앞당기려는 우리 당의 확고부동한 입장”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주사파 또는 운동권은 언제나 통일은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동화 같은 판타지다. 역사와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안다. 그럼에도 속내와 달리 우리는 언제나 평화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북한의 당 대회에서 평화라는 말이 사라졌다. 그들은 ‘강력한 국방력’이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열쇠라고 내놓고 주장했다.
오늘날 북한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지만 경제적으로 극도로 궁핍한 체제다. 이런 상태라면 그들은 군사력을 가지고 무언가를 시도할 것이다. 형태는 군사적 충돌일 수도 있고 군사력을 활용한 정치 협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군사력을 갖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핵을 포기하거나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는 평화협상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망상
글을 맺으며 필자의 경험 하나를 다시 소개한다. 필자는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으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경유하여 북한과 전화 및 팩스 교환을 한 바 있다. 남북을 오가는 민간급 체육·문화행사를 중계하는 게 주요 업무였다.업무를 본지 1~2년 지나면서 의아했던 경험이 있다. 북한이 남한을 우습게보고 있다는 점이다. 심하게 말하면 그들은 남한은 한 수 아래로 본다. 물론 내 경험이 한정돼 있고 내 느낌이 틀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랬다. 즉 북한이 남한의 우위를 인정하고 남한 주도의 협상과 통일을 인정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점이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꿈같은 이야기다. 2018~2019년 이어진 남북정상회담 국면이 끝난 뒤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보인 날선 태도는 이를 방증한다.
남한의 요구대로 순순히 응하는 북한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30년 전 인식에 뿌리를 둔 신화에 불과하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기는커녕 군사적 용도 또는 정치적 협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이어진 북한과 핵에 대한 망상을 끝낼 때가 됐다.
● 1965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 저서 : ‘수학 공부의 재구성’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