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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우 586칼럼

‘북한 추종 없었다’는 이인영 장관 주장 못 믿는 까닭

  •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 소장 mkw1972@hanmail.net

‘북한 추종 없었다’는 이인영 장관 주장 못 믿는 까닭

  • ● 한민전은 北이 라디오로 행동지침 내린 운동권 배후
    ● 한민전, 1987년엔 대중 지지와 공감 받을 구호와 전술 강조
    ● 전대협 운동역량 집중은 한민전의 정보처리 능력 때문
    ● 전대협 1기 의장 이인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
    ● 사면된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의 암묵적 합의
    ● 민주화 세대 부패 징후 보인 조국-윤미향 사태
*586세대 NL(민족해방 계열) 이론가이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 출신인 필자가 문재인 시대에 표하는 유감.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울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 [동아DB]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울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 [동아DB]

1986년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이 만들어진 후 서울대 운동권은 반미와 친북 성향으로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1987년 3월 치러진 선거에서 총학생회장과 단과대학 학생회장 당선자 전원이 이른바 NL(민족해방)계였다. 컨트롤하는 지하조직이 없었음에도 결과가 그렇게 됐다. 그 만큼 NL이 당시 서울대를 압도했다. 

나는 1987년에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1년 내내 거리에서 살았다. 가끔 인문대 학생회실에 있을 때면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작은 선전물 하나가 투입됐다. 한번은 선전물을 투입하던 학생과 마주쳤다. 누구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학교에서 보던 학생이었다. 선전물은 라디오방송을 정리한 문건이었다. 1985년 7월, 통일혁명당(통혁당) 후신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은 북한 해주에서 라디오 방송을 송출했다. 학생들은 이 한민전 방송의 주요 내용을 편집한 뒤 작은 선전물로 만들어 학생회실 등에 배포했다.

라디오로 행동 지침 내린 운동권 배후 ‘한민전’

한민전의 진가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그 후속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1985~86년 학생운동권은 레닌주의로 통일됐다. 레닌주의에 따라 학생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과격해졌다. 그러나 한민전은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받을 구호와 전술을 강조했다. 대중운동에 대한 한민전의 지침이 학생들과 결합되면서 학생운동이 6월의 거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87년 9월, 학생들이 ‘군부독재 타도’를 주장한 반면 한민전은 ‘후보단일화’를 강조했다. 1987년 11월, 대통령선거 패색이 짙어지던 무렵 서울대와 연세대는 김영삼, 김대중 두 김씨의 정당 농성을 지지했다. 반면 한민전은 “광주학살 살인마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며 투쟁을 호소했다. 당시 학생들은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했고 냉정해야 할 때 역량을 소진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민전 지지자가 됐다. 



운동은 고도로 조직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이다. 특히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은 방대한 조직을 정확한 시점과 목표 아래 통일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정보의 처리와 합의 과정이 선결돼야 한다. NL계열이 전대협을 결성하고 다른 부문과 정파를 압도하게 된 것은 운동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정보 처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한민전이다. 

‘던바의 숫자’라는 게 있다. 생물학적 기준으로 보면 150명 규모의 사람들만 일상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정보처리에 과부하가 걸려 관계 설정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처리할 수 없다. 공동체의 규모는 정보처리 능력에 의해 제한된다. 이를 해결한 것이 종교다. 하느님과 같은 절대자 아래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누군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대충 생략하고 그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인지 확인하면 된다. 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 여부로 관계설정에 소요되는 정보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어 공동체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래 전대협의 조직 규모와 대중운동 역량은 상당했다. 1992년 안기부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전대협의 거리 시위 역량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으면 진압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아마도 군대나 경찰과 같은 정부 기구를 빼놓고는 민간 차원에서 그런 정도의 역량을 보인 것은 전대협이 거의 유일했다.
 
한민전은 전대협 각급 기구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인 논쟁과 다양한 회의를 대폭 줄여 노선의 통일, 행동 방침 수립에 들어가는 비용을 급격히 낮춰 주었다. 정리하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은 전대협이라는 형체를 한민전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작동한 시기다.

사면된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의 암묵적 합의

필자는 요즘 민주화운동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주목할 만한 책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산하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펴낸 “한국민주화운동사3”이다. 2010년에 펴냈고 1980년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민주화운동사를 조밀하게 다루고 있다. 책의 분량만 1000쪽에 달한다. 그러나 이 책 어디에도 ‘한민전’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책은 학생들이 갖고 있던 사상 측면을 가능한 배제한 채 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과 양상만을 소개하려는 듯하다. 하지만 도를 넘었다. 이건 신중하고 세심한 배려라기보다는 왜곡에 가깝다. 

이런 의문이 남는다. 왜 한민전이 빠진 걸까? 먼저 국가보안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보안법은 2개의 레벨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적단체 가입이나 고무 찬양이다. 한총련 대의원이거나 북한 관련 책자를 갖고 있으면 이에 해당한다. 이 경우라면 연행돼 약간의 조사를 받은 후 재판에 회부된다. 이적단체 가입과 고무 찬양만 있다면 거의 대부분 1심 정도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1심 구속 기한이 6개월 이니 만큼 감옥에 오래 있어야 6개월 정도다. 

전대협, 한총련 관련 학생들 대부분이 이런 수준이다. 전대협 1기 의장을 지낸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정도를 받았다. 민주당에서 학생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정치인 다수도 비슷하다. 전대협 3기 의장 출신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특이하게 5년 실형을 선고받고 3년 6개월 정도 복역했는데, 그건 그가 임수경을 북한에 파견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적단체를 조직하거나 북한과 회합·통신 또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어떤 활동을 한 경우다. 민혁당이나 중부지역당, 구학련이나 자민통 그룹의 책임자급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하당이나 혁명조직의 구성원이라도 말단 성원이면 역시 첫 번째에 해당한다. 

1987년 6·29선언 이후 순차적으로 대규모 사면 조치가 단행됐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비전향장기수들까지 포함해 그 폭을 넓혔다. 1999년 이후 사실상 공안수, 양심수 문제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 과정에서 지하당을 표방했던 사람들이 형기를 채우지 않고 사회로 나왔고, 이들도 과거의 활동을 재현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1980~90년대 국가보안법 위반자 중 2그룹은 1990년대 후반 광범위한 사면 조치로 조기에 사회에 복귀했다. 북한과 직접 연계한 활동을 재연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합의에 기초해 그들의 행적은 과거의 일로 봉합됐다. 

문제는 첫 번째 그룹이다. 사람들은 학생운동을 했던 학생들이 젊은시절 한 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은 이들이 정치권에 진출하는 다리 구실을 했고, 김우중은 학생운동 출신들을 우대해 특별 채용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그들 상당수가 사회 지도적인 위치에 서면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0대 대학생이라면 별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고위 공직자가 되는 상황이라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민주화 세대 부패 징후 보인 조국-윤미향 사태

2020년 7월 23일 이인영 통일부장관 후보자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2020년 7월 23일 이인영 통일부장관 후보자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이인영 통일부장관의 국회 인사청문회는 이를 잘 보여준다. 탈북 외교관 출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질문에 이인영은 한사코 주사파나 북한을 추종한 일이 없다고 피해갔다. 이인영은 전대협 1기 의장이다. 이인영의 말이 맞다면 1980년대 학생운동은 순수한 민주주의, 통일운동으로 한국에서 주사파 문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첫 번째 그룹은 사회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그렇게 처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런 집단적 은폐 과정은 유력 인사뿐만 아니라 그 세대 전체가 묵시적으로 합의하고 공동으로 시행했다. 한민전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세대 전체가 동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기념사업회의 공식 기록물, 영화나 다양한 저작물 등에서, 학생운동권은 민주화를 열망하며 고난에 굴하지 않고 싸우다 가끔 급진적 사상에 경도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그런 시도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한민전이다. 한민전은 학생운동이 주도한 민주화운동이 북한과 어떤 연관을 가지며 진행됐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민전이 끼친 영향은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허위진술을 하지 않고서는 이를 부인할 방법이 없다. 

민주화세대는 산업화 세대를 물리적으로 대체하며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어느 세대든 공과 과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2019~20년 조국-윤미향 사태를 계기로 민주화 세대가 부패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민주화 세대와 싸우려면 그들이 자신들 구미에 맞게 재구성한 스토리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한민전은 민주화 세대의 본질을 밝히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복원해야할 이야기다.


민경우
● 1965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 저서 : ‘수학 공부의 재구성’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外




신동아 2021년 4월호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 소장 mkw197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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