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호

영화 ‘마이클 콜린스’ vs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황승경의 Into the Arte]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보는 두 가지 시선

  • 황승경 공연 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1-04-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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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은 우리를 바칠 정도로 가치 있는 거 맞지?”

    • 1916년 4월 ‘부활절 봉기’의 실패와 독립전쟁

    • ‘통일 방법론’ 다른 독립 세력 간 내전…우리와 닮은꼴

    • 아일랜드-영국의 현재가 韓日 관계에 던지는 시사점

    [Warner Bros 제공, Sixteen Films 제공]

    [Warner Bros 제공, Sixteen Films 제공]

    지난해 12월 31일, 영국은 EU에서 분리(브렉시트)됐다. 1973년 유럽연합(EU)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한 이후 47년간의 동거생활도 마침표를 찍었다. 앞서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로 EU 탈퇴를 결정(51.9% 찬성)할 때, 영국 내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아일랜드와 자유롭게 교역할 수 없게 된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는 아일랜드와의 통일국민투표를 요구할 정도로 저항이 거셌고, 결국 ‘북아일랜드 협약’(Northern Ireland Protocol)에 따라 북아일랜드는 EU 단일시장에 남게 됐다.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와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자국 영토인 북아일랜드를 EU시장에 잔류시키는 묘수를 낸 것. 그러나 올해부터 영국 본토에서 북아일랜드로 건너가는 상품에 통관 및 검역절차가 적용되면서 식료품 공급에 차질이 생기는 등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폭력주의자에서 숭고한 민족주의자로

    ‘마이클 콜린스’ 스틸컷. [Warner Bros 제공]

    ‘마이클 콜린스’ 스틸컷. [Warner Bros 제공]

    격동의 2021년을 숨죽이고 바라보는 이들은 아일랜드인들이다. 1169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1133~1189)에 의해 정복당한 뒤 갖은 수탈과 박해를 당했고, 750년 넘게 저항을 이어갔지만 번번이 독립에 실패한 아일랜드. 지금은 피와 눈물로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식민 지배와 내전을 겪으며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로 조국이 두 동강 났다는 점에서도 우리와 닮았다. 아일랜드 독립 과정을 다른 시각에서 해석한 두 영화를 보면 그래서 더욱 애잔하다.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마이클 콜린스(1996)’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이 그 영화다. 

    아일랜드 독립영웅 마이클 콜린스(1890~1922)의 전기 영화인 ‘마이클 콜린스’는 1916년 4월 발발한 부활절 봉기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격동의 6년을 담았다. 독립선언서를 제창하는 지도자들 사이에 젊은 콜린스(리암 니슨 분)도 독립을 부르짖으며 항거한다. 

    아일랜드 부활절 봉기는 3년 후 일어난 3·1운동과 비교된다. 3·1운동은 비폭력 평화 만세운동이었다면, 아일랜드의 부활절봉기는 철저하게 계획된 무장투쟁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영국의 위기는 아일랜드에 기회’라며 자력으로 독립할 타이밍을 엿보는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각기 다른 노선을 걷던 항영(抗英) 단체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 영국의 적군이던 독일 해군에 무기를 조달받아 무력으로 독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독일에서 출발한 무기선이 영국 해군에 발각돼 침몰하자 아일랜드 독립군 지도부는 피눈물을 삼키며 다음 봉기를 기약해야 했다. 

    1916년 4월 24일, 미처 작전이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지 못한 1000여 명의 아일랜드 독립군은 중앙우체국과 전략장소들을 점거하며 거사는 진행된다. 신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을 상대하기에 독립군은 역부족이었다. 독이 오른 영국군은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아일랜드 민간인의 희생이 컸다. 독립군은 민간인 희생을 줄이려 무조건 항복을 외쳤다. 영국 정부는 지도자급 16명을 즉결 처형하는 등 잔인하게 대처했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영국군의 총탄에 쓰러지면서도 숭고하게 독립을 외치며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자 상황은 급반전한다. 

    극단적 폭력주의자라고 비난받았던 이들의 비장한 최후는 사그라져가는 아일랜드인들의 독립열망을 다시 타오르게 했고, 아일랜드 민족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는 ‘1916년의 부활절’이라는 시를 창작해 부활절 봉기를 되새기며 세계에 알렸다. 


    ‘마이클 콜린스’ 스틸컷. [Warner Bros 제공]

    ‘마이클 콜린스’ 스틸컷. [Warner Bros 제공]

    지도자급이 모두 한 순간에 사라진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투옥된 콜린스는 집안 대대로 민족주의자였다. 콜린스가 출옥하자 그는 일약 지휘부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한다. 영국정부가 부활절 봉기의 중추 세력이라고 오인한 신페인(아일랜드어로 ‘우리 스스로’라는 뜻)당은 오히려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됐고, 영국에 대한 저항 세력은 신페인당으로 규합했다. 1917년 콜린스도 신페인당에 입당했다. 

    1918년 영국 총선거에서 73명의 의원을 배출한 신페인당은 아일랜드 다수당이 됐고, 콜린스도 하원의원에 당선돼 본격적인 정치 행보에 들어선다. 신페인당 의원들은 우선 영국본토에서의 취임선서를 거부하고 따로 아일랜드 의회를 만들어 아일랜드공화국 독자노선을 걷는다. 

    ‘부활절 봉기’로 총살 위기에 처했지만 미국 시민권자여서 가까스로 처형을 면한 이몬 데 바레라(1882~1975·엘렌 릭먼 분)는 아일랜드공화국 의회 의장이 돼 외교전을 펼친다. 그러나 아일랜드공화국은 세계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부활절 봉기’의 실패를 경험한 콜린스는 아일랜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독립은 ‘빨리 공격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라고 여겼다. 콜린스가 이끈 아일랜드공화국군(IRA·Irish Republican Army)은 본격적인 무장 독립전쟁에 돌입했고, 신출귀몰한 그의 대활약은 영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IRA는 군사적으로 열세였지만 1919년 초부터 1921년 7월까지 IRA군 사망자는 550명, 영국군은 1000명 이상 발생했다. 

    당시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도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관심 있게 보도했다. 동아·조선일보뿐 아니라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까지 저마다 논조는 달랐지만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특히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거의 매일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의 자치에서부터 전투 과정을 다뤘고, 역사·사회적으로 분석한 기사만 150여 건이었다. 이는 결국 총독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같은 해 9월 25일(176호) 동아일보는 정간을 당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 정간의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아일랜드 기사를 조장해 ‘반역자를 찬양’한다고 명시했다.

    “우리를 바칠 정도로 가치 있는 거 맞지?”

    [Sixteen Films 제공]

    [Sixteen Films 제공]

    영화 ‘마이클 콜린스’가 아일랜드공화국 정부와 IRA 활약상을 담았다면,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IRA 군인 형제에게 몰아친 독립전쟁과 내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형 테디(페드릭 들러니 분)는 체포돼 손톱을 뽑히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독립열망에 찬 민족주의자다. 동생 데미안(킬리언 머피 분)은 전문직 의사였지만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의 잔악한 민간인 탄압에 분노해 IRA에 투신한다. 그러나 같은 동네에서 친동생처럼 자란 크리스는 강압에 의해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했고, 데미안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크리스를 총으로 단죄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문한다. 

    “조국은 우리를 바칠 정도로 가치 있는 거 맞지?” 

    크리스의 무덤에서 선 크리스의 엄마는 데미안에게 “너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구나”라고 말한다. 

    다시 영화 ‘마이클 콜린스’로 돌아가 보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팽배해진 반전(反戰) 여론에 떠밀린 영국 정부는 1920년 7월 아일랜드공화국에 휴전을 제안한다. 당시 공화국의회 의장이던 데 바레라는 콜린스를 협상대표로 보내지만 그들이 생각한 독립의 방식은 달랐다. 

    콜린스는 소모전이 더는 무리라는 걸 절감하고 단계적인 독립을 주장했다. 동시에 휴전을 받아들이자고 아일랜드공화국 의회에 요청했다. 이로인해 아일랜드 32개주 가운데 북쪽 얼스터지역을 제외한 26개 주가 자치국인 아일랜드자유국이 됐지만, 데 바레라를 비롯한 많은 공화국 동지들은 피를 감내하고라도 자치국이 아닌 완전한 독립을 원했다.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로 영국을 겨눈 총부리는 동족을 향하면서 상잔의 비극이 시작된다. 

    콜린스는 아일랜드 내전 진압을 명분으로 영국군이 아일랜드로 진입하면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걸 직감하고는 이를 막으려고 자신의 고향이자 휴전 반대파의 본거지인 남부 코크 지역으로 향한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1922년 9월 선조 대대로 반영 활동을 펼친 자신의 뿌리가 숨 쉬는 고향에서 그는 반대파에게 암살당한다. 그의 사후 1년 동안 아일랜드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독립전쟁보다 더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영웅인가 배신자인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스틸컷. [Sixteen Films 제공]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스틸컷. [Sixteen Films 제공]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형 테드 동생 데미안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정반대의 노선을 걷는다. 테드는 불완전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차근차근 독립을 이뤄가야 한다고 봤지만, 데미안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쪽짜리’ 독립은 용납하지 않았다. 아일랜드는 예전 독립전쟁을 할 때처럼 내전에 돌입한다. 아일랜드의 비극적인 독립과정이 우리나라 역사와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결국 데미안은 테드의 부대에 잡히고, 형의 부탁에도 신념을 바꾸지 않은 채 사형장에서 처형당한다. 테드가 동생의 약혼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그녀는 테드를 향해 “더는 보고 싶지 않다”며 소리친다. 이는 독립전쟁 중 데미안이 크리스의 엄마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증오와 반목이 반복되는 역사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1996년 영화 ‘마이클 콜린스’가 개봉됐을 때 영국에서는 개봉을 반대하며 살인자를 미화했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아일랜드 출신 닐 조던(71) 감독은 아일랜드 독립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콜린스를 영웅으로 그린다. 반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영국인 감독 켄 로치(85)는 콜린스를 ‘영국군과 별다르지 않은 배신자’로 묘사한다.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로치 감독은 독립서사와 맞물린 이면을 보이며 슬쩍 계급문제로 치환한다. 

    당시 아일랜드는 산업화는커녕 봉건적 식민 경제체제에 머물러 경제적으로는 매우 열악했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공화국 법정은 IRA에 무기 대금을 지원하는 고리대금업자가 500%의 이자를 받으며 민중을 핍박하는 모습을 그린다. 동생 데미안은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부당한 악덕업자를 비난하지만, 형 테드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이기려면 무기가 필요하기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영화는 휴전이 되고 아일랜드가 자치국이 돼도 여전히 약탈당하는 민중을 조명한다. 영화 제목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861년 로버트 조이스(1836~1883)가 노랫말 형식으로 창작한 시 구절에서 차용했다. 민족시인 조이스는 1789년 반란 당시 남부 웩스퍼드 전투에 참전한 저항군인의 아픔을 애절하게 그리고 있다. 아일랜드가 인구의 4분의 1(약 100만 명)이 굶어 죽은 감자대기근(1845~1850)을 겪는데도 수수방관한 영국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한 시기에 나온 시를 영국인 로치 감독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색다르게 해석했다. 

    식민 지배 동안 낙후된 경제력을 복원한 아일랜드는 2003년 영국 경제 수준을 따라잡았고, 지금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8만 달러에 육박해 영국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2011년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은 아일랜드를 방문해 과거사에 대한 유감을 밝히며 손을 내밀었고, 2014년 아일랜드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 영국을 국빈 방문해 의회에서 화합과 존중의 새로운 100년을 기약했다. 아일랜드의 발전상과 영국과의 관계는 우리의 미래와 대일 외교에 던지는 시사점이기도 하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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