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호

“文 경제정책, 학자 개인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게 패인”

학현학파 류덕현 교수의 ‘소주성’ 실패 원인 분석

  • 오홍석 기자

    lumiere@donga.com

    입력2021-07-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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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뛰어난 학자 발탁해 실패…소모품처럼 쓰다 버려

    • 분배정책인 소득주도에 왜 ‘성장’ 붙였나

    • 文 정부, 시장수용성 고려 않고 지나치게 개입

    • 자산 불평등 간과…불평등 원인 잘못 진단

    • 성장률 수치보다 삶의 질 개선에 집중해야

    • 재정건전성 자체가 목표가 돼서는 안 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교수들은 특정 사안에 뚜렷한 입장을 갖고 있다. 류덕현(52)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결이 좀 다르다. 질문을 하면 “이 부분은 맞고 이 부분은 아쉽다”고 답한다. 명확하게 결론 내리지 않는다. 그의 말은 ‘사이다 발언’ 같이 명쾌하고 자극적이지는 않다. 그런 그가 지난 5월 14일 각종 언론매체에 등장했다. 이날 서울 종로구 사회경제연구소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다.

    흔히 한국 경제학계는 3개의 학파로 분류한다. 서강학파, 조순학파, 학현학파다. 이 중 서강학파는 성장을 중시한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 등 주로 1970~80년대 경제정책을 주도한 관료들이 대표적이다. 조순학파는 ‘한국의 케인스’라 불리는 조순 전 경제부총리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이다. 류 교수는 학현학파다.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의 호를 딴 이 학파는 경제민주화와 분배를 중시한다.

    심포지엄에서 류 교수는 동료 소장파 교수들과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의 실패 원인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크게 성장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책과 시장수용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지나친 개입을 지적했다. 이 자리에는 문재인 정부 들어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과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장을 지낸 홍장표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당시 부경대 교수)도 참석했다.

    5월 27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 교무처장실 벽면에 걸린 보드판에는 알 수 없는 수식이 가득 차 있었다. 교무처장을 겸하고 있는 류 교수는 보드판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자신이 진단한 한국 경제 상황을 설명했다.

    성장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주성

    - 토론회에서 소주성 정책을 주도한 선배들을 비판했는데.

    “불평등을 개선하자는 소주성의 취지는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잘한 부분도 있고 잘못한 부분도 있다. 원래 잘하려던 분야를 잘못하고 있으니 공과(功過)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는 의미에서 문제 제기를 했다.”



    - 비판의 요지는 뭔가.

    “소주성은 새로울 게 없는 정책이다. 이전 정부도 불평등을 완화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가계 부담을 줄이려 노력했다. 문 정부는 복지를 좀 더 두텁게 했지만 소주성을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그래서 실패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성장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성장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무슨 뜻인가.

    “한국은 이제 과거 개발시대 같은 고성장은 어렵다. 이렇게 양극화가 심한 상태에는 성장해도 분배가 악화하기만 한다. 불평등 완화를 목표로 한 경제정책에 (소득주도)‘성장’이라 이름 붙인 것부터 안타깝다. 성장이라 이름 붙이다 보니 성장 수치에 목맸다. 수치가 마음에 들지 않자 임기 막바지에는 ‘토건(土建) 경제를 하지 않겠다’던 약속마저 뒤집었다. 현 정부가 그토록 혐오하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류 교수는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에스테르 뒤플로 부부 교수의 2019년 저서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을 인용해 설명했다. 이들은 실증적 근거를 바탕으로 주류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성장 공식을 부정하고 경제학이 가진 도구로는 경제성장 원리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들이 성장 원리를 찾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국민의 후생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렇다면 성장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니다. 외형적인, 수치로 나타나는 성장에 목매지 말자는 얘기다. 한국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3만 달러(약 3350만 원)다. 그러면 4인 가족 기준 12만 달러(약 1억3400만 원)의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다. GDP가 높다고 국민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는다. 뒤플로 부부의 주장처럼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사람에 투자해야 한다. 이 분야야말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지점이다. 장기적 시각으로 어떻게 좋은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 것인지, 어떻게 불평등을 개선해 나갈 것인지 고민하자는 이야기다.”

    정부와 시장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은 달라

    류 교수는 문 정부가 시장수용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개입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시장 자율에 맡기면 신자유주의자로 분류하고, 정부 개입에 찬성하면 (시장경제에 불균형이 생기면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믿는)케인지언이나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자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분류하는 이분법을 ‘낡았다’고 표현했다. 시장이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은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복지·교육 제도 개편과 사회기반시설(SOC) 확충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가장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불필요한 논쟁을 촉발해 개혁 동력이 소진됐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이 무리였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 4년간 최저임금은 평균 7.4% 올랐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2, 3년차에 평균 14.6% 올렸다. 시장의 수용성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다. 최저임금 인상 자체는 동의하지만 공약으로 못 박을 필요가 있었을까. 차라리 최저임금은 천천히 올리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에 정부가 지원금을 보태 사용자의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 비판을 들은 홍장표 원장 등 선배들 반응은 어땠나.

    “분위기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홍 원장은 ‘소득불평등이 문재인 정부 들어 개선됐고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답했다.”

    - 홍 원장의 답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통계를 보면 정부 개입으로 소득분배가 개선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애초에 문 정부가 불평등의 원인을 잘못 진단했다.”

    - 잘못 진단했다?

    “소득불평등에 집중하고 자산 불평등은 간과한 것이다. 2010년 이후 순 자산 지니계수(자산의 분포 상태를 가늠하는 지표로 0과 1사이에서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함을 뜻함) 추이를 살펴보면, 2011년 0.628을 기록한 후 내려오다 2016년을 기점으로 반등했다. 이 점을 포착하지 못했다. 이제 벌어진 자산 격차는 단기간에 해결하기 힘들 만큼 심각해졌다.”

    - 반대로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 라인’은 학현학파 중심으로 갖춰져 다양성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오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학현학파라고 해도 김상조(전 대통령정책실장), 홍장표, 원승연(금융감독원 부원장) 이외에 중요한 자리에서 경제정책을 결정한 사람은 없다. 다양성이 문제라기보다는 문 정부가 인사의 ‘개인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게 패인이지 않나 싶다.”

    - 개인기에 의존했다는 게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미국은 연구소나 학교에 정당별 정책 담당 라인이 있다. 정부는 학자, 정치인, 시민운동가가 포함된 집단지성에 기반해 정책을 결정한다. 라인 안에서 경험이 전수되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 정권이 들어서면 이 인재풀에서 인물을 발탁한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집권하는 것이다. 한국은 개인기가 뛰어난 학자를 발탁해 실패하고 소모품처럼 쓰다 버린다. 개인기가 뛰어나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돼 있다.”

    복지제도 개편 위해 재정건전성 개념 재고해야

    류덕현 중앙대 교수의 ‘재정 트라일레마’(세 가지 선택지 중 두 가지만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따르면 한국은 낮은 복지수준과 낮은 조세부담률을 대가로 건전한 재정건전성을 유지해 왔다. [강부경 기자]

    류덕현 중앙대 교수의 ‘재정 트라일레마’(세 가지 선택지 중 두 가지만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따르면 한국은 낮은 복지수준과 낮은 조세부담률을 대가로 건전한 재정건전성을 유지해 왔다. [강부경 기자]

    류 교수에게 소주성 이후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보드판에 삼각형을 그렸다. ‘재정 트라일레마’(세 가지 선택지 중 두 가지만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를 이용해 한국의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높은 복지 수준, 낮은 국채 비율, 낮은 조세부담률’을 동시에 충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것이다. 예를 들어 스웨덴은 높은 복지 수준, 낮은 국채 비율을 가지고 있다. 대신 국민이 세금을 많이 낸다. 일본은 높은 복지 수준, 낮은 조세부담률을 가지고 있다. 대신 나라가 빚이 많다. 한국의 빛나는 재정건전성은 낮은 복지 수준, 낮은 조세부담률의 결과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소득분배 악화의 피해가 더욱 더 심해졌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국채 비율과 조세부담률 조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50%에 육박해 국가부채가 과도하다는 지적도 있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명확한 재정 상태를 보여주지 못한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의 분모인 GDP는 1년간 국민이 창출한 소득이다. 분자는 과거로부터 지속해서 축적돼 온 부채다. 부채는 하루아침에 갚는 게 아니어서 미래가치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니 분모인 GDP도 미래 성장률을 대입해 국가부채를 계산해야 한다. 성장률까지 고려하면 한국의 재정은 건전한 편에 속한다. 더불어 한국은 국가부채 이자를 1년에 20조 원 정도 낸다. GDP 대비 1%도 안 되는, 우리 경제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외국인 국채 보유 비율도 14.1%로 매우 낮다.”

    - 문재인 정부는 올해 네 번 추경을 했다. 잘한 선택이라고 보는가.

    “코로나19 이후 ‘V자 반등’을 이어나가려면 확장 재정 기조를 이어나가야 한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경제정책의 목표는 경제를 회복시키고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재정건전성 자체가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차기 정부는 어떤 경제 과제를 최우선으로 둬야 하나?

    “이제 성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제정책에서 탈피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내세운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게’는 여전히 시대정신이다.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위해 사회안전망 확충, 복지제도 확대를 위한 제도 개혁과 개선에 힘써야 한다.”

    #류덕현 #소득주도성장 #학현학파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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