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경각심으로 ESG 유행
공시 늦어지면 '투자 리스크' 부담 커져
공개 정보 부족해 ‘그린 워싱’ 우려도
해외 투자자 많은 대기업만 자발적 공시
전문가 “2030년 공시, 세계적 추세 비해 늦다”
업계 “ESG는 장기적인 기업 전략”
현재 국내 기업들의 탄소배출량은 ESG 평가에 빠져 있다. 기업들이 탄소배출량을 공시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Gettyimages]
ESG를 글로벌 트렌드 만든 래리 핑크
ESG가 글로벌 트렌드로 떠오른 계기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다. 전문가들은 2018년 1월 18일 래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CEO)가 투자자들과 블랙록이 투자하는 기업 CEO들에게 보낸 편지가 그 시작이라 말한다. 핑크 CEO는 편지에서 “기후 리스크는 곧 투자 리스크”라며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기후 리스크 측정과 보고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필요한 지배구조에 대한 공시를 의무화하겠다”고 적었다. 공시가 잘 지켜지지 않을 경우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블랙록은 지난 4월 기준 자산운용금만 9조100억 달러(약 1경11조 원)에 달하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엔씨소프트, 한국전력 등 국내 기업 지분도 보유하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가 ‘선의’로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조신 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는 “블랙록의 최대 고객은 여러 국가의 정부가 운용하는 연기금”이라며 “연기금이 자산운용사에 사회적 책임에 충실한 기업에 투자하기를 주문하자 블랙록 같은 자산운용사들이 ESG를 중시하는 기조로 돌아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ESG 지수에 기반한 투자 실적이 기존 투자 방식보다 이익률이 더 높거나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도 축적됐다. 이는 한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사회적 책임투자 전문기관 ‘서스틴베스트’가 5월 17일 발간한 ‘2021년 1분기 ESG 펀드보고서’에 따르면, 1분기 기준 국내 ESG 펀드는 총 89개. 이 중 국내 주식형으로 운용되는 펀드 42개의 1분기 수익률은 7.71%로 코스피200의 1분기 수익률 6.68%보다 1.03%포인트 높았다.
한국에서도 ESG 바람이 거세다. 5월 26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에서 판매되는 ESG 관련 펀드 45개 설정액은 모두 1조8107억 원. 이 중 약 58%에 해당하는 1조558억 원이 최근 1년 사이에 유입됐다.
그러나 이러한 ESG 바람을 바라보는 국내 전문가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탄소배출량 공시를 의무화하지 않은 한국의 ESG는 사실상 ‘앙꼬 없는 찐빵’과 다름없기 때문. 국내 ESG 평가사에서 일하는 한 연구위원은 “사실상 국내 기업들의 기후위기 대응 활동은 ESG 평가에 빠져 있다고 봐야 한다”고 평가한다.
이 같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ESG 열풍에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비켜서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코스피 상장기업의 ESG 정보 공시를 순차적으로 의무화할 예정인데, 지배구조 정보가 담긴 ‘G’ 보고서는 2026년부터, 사회적 책임 정보가 담긴 ‘S’ 보고서와 환경 정보인 ‘E’ 보고서는 2030년부터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했다. 금융위원회는 의무기간 이전까지 공시는 자율에 맡긴다는 방침이다.
따라서 탄소배출량 등 각종 정보를 공개하는 기업은 해외투자자가 많은 대기업에 그치고, 해외투자자의 ‘압박’이 적은 대부분의 기업은 공개하고 싶은 정보만 공시하는 실정이다. 기업이 이를 악용하면 유리한 정보만을 공개해 겉으로는 친환경 기업처럼 보일 수 있는 이른바 ‘그린 워싱(greenwashing)’이 가능한 상황이다. 그린 워싱은 ‘green’과 ‘white washing(세탁)’의 합성어로, 기업들이 실질적인 친환경 경영과는 거리가 있지만 녹색경영을 표방하는 것처럼 홍보하는 것을 말한다.
‘투자 리스크’ 우려 목소리
일반적으로 ESG 투자는 자산운용사에 의해 이뤄진다. 자산운용사들은 무디스, 한국신용평가 같은 신용평가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ESG 평가사로부터 기업 정보를 제공받아 투자를 결정한다. 그러나 정보가 제대로 공시되지 않으니 평가사들의 기업 평가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평가사들은 부족한 정보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ESG를 평가할 때 자산운용사는 최종 생산자에게서만 정보를 요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완성차를 만드는 대기업뿐 아니라 자동차를 생산하는 데 쓰이는 각종 부품 생산 하도급업체, 하도급업체와 거래한 철강회사, 철강회사가 원자재를 수입한 해외 수출사의 정보 등을 모두 요구한다. 이른바 글로벌밸류체인(GVC)을 모두 훑는 것이다. 작은 기업들이 자체 데이터로 공시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자산운용사가 투자금을 회수하는 ‘투자 리스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이종오 한국사회책임포럼 사무국장은 현재 상황을 “정부가 기업을 위해 시험일을 계속해서 미뤄주고 있어 기업이 공부를 게을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이 국장은 “지배구조 보고서의 경우 의무 공시가 2017년, 2019년, 2021년 세 차례 미뤄졌고, 2026년, 2030년이 다가오면 또 어떤 이유를 대면서 공시를 미룰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차라리 정부가 2026년으로 의무 공시 일정을 앞당겨 기업들이 공시를 준비하며 투자 리스크에 대비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ESG는 장기적인 기업 전략이 핵심이다. 전략을 세울 시간은 차치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려면 ESG 보고서 작성 경험이 있는 인력과 예산이 필요한데 공시의무기간을 앞당기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말했다.
기업의 공시 정보가 부족하자 산업통상자원부는 4월 21일 ‘K-ESG 지표’를 만들었다. 산자부 발표에 따르면, K-ESG 지표는 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한국의 경영특수성을 고려한 평가 기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업계나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가령 포스코는 높은 산업재해 발생 비율과 높은 탄소배출량에도 4월 K-ESG 평가에서 A등급을 받아 논란이 일었다. 탄소배출량을 동종 기업들과 상대적으로 평가받고, 여성 임원 비율과 지배구조에 가산점을 받았기 때문인데,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K-ESG 지표’를 만든 산자부 자문위원회에 “포스코 출신 연구원이 평가 기준을 만드는 데 관여해 벌어진 일”이라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김재구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는 “2030년 공시는 세계적 추세에 비해 너무 늦다”며 “정부가 직접 기준을 제시할 게 아니라 작은 기업들이 ESG에 대해 학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산자부 관계자는 “K-ESG지표는 ESG 평가 기준을 강요하기보다는 가이드라인에 가깝다”며 “ESG 보고서 작성 준비가 안 돼 있는 중소기업이 ESG을 도우려고 만든 지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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