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소년의 아버지를 총살한 마이어 회장
아들의 절규 “법이 바뀌면 정의도 바뀌는가”
독일이 부역자들에게 준 면죄부 ‘드러 법’
‘진실은 드러난다’는 심오한 정의의 메시지
나치 후손이 쓴 베스트셀러 원작, 살아 있는 감동
영화 ‘콜리니 케이스’ 포스터.
파브리치오 콜리니(왼쪽)와 카스파 라이넨. [콘스탄틴 필름 제공]
구성원 내부 합의에도 이르지 못한 법이 과연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공정한 처벌을 위한 잣대가 될 수 있을까. 힘과 권력을 견제하는 법의 이면을 고발하며 법이 심판하지 못한 정의를 57년 만에 직접 구현하는 ‘콜리니 케이스’ 속으로 들어가 보자.
2001년 독일 베를린의 호텔 스위트룸에서 대기업 MMF 회장인 예안-밥티스테 마이어(만프레드 자파스카 분)가 잔인하게 살해된다. 살인자는 총을 3발이나 쏜 것도 모자라 쓰러진 피해자의 얼굴을 신발이 망가질 때까지 있는 힘껏 걷어찬다. 피해자의 살점이 사방으로 튄 살인 현장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언론은 독일연방공화국 훈장까지 받은 저명한 대기업 회장이 대낮에 총살당한 사건을 집중 보도한다. 이 대형 사건은 3개월 된 신참 국선변호사 카스파 라이넨(엘리아스 엠바렉 분)에게 배당된다.
법은 정의의 편인가?
[콘스탄틴 필름 제공]
라이넨 변호사는 피해자인 마이어 회장과 개인적으로 남다른 인연이 있어 재판을 피하려 하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어서 변호사로 선임된다. 사실 마이어 회장은 손자 필립의 친구인 터키계 라이넨 변호사를 물심양면 후원해 준 은인이었다. 덕분에 그는 변호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묵비권으로 말문을 닫아버린 콜리니와 마주한 라이넨 변호사는 연거푸 살해 동기에 대해 묻지만 콜리니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마이어 회장에 대해 “2살 때 집 나간 아버지 대신 자신을 아버지처럼 돌봐주신 분”이라고 이야기하는 변호사를 향해 콜리니는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생뚱맞은 말만 할 뿐이다. 그러고는 변호사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며 다시 말문을 닫는다. 라이넨 변호사는 빨리 자백을 받아내려 하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콜리니 때문에 고심이 깊어간다. 한데 대면하면 할수록 콜리니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빠져들고 점차 심경의 변화를 맞는다. 특히 살인 무기인 ‘발터P38’은 히틀러가 자살할 때 사용한 권총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주력으로 사용한 자동권총이다. 반동도 세고 구하기도 힘든 구닥다리 발터P38은 살인에 적합하지 않다. 증거물을 유심히 바라보던 라이넨 변호사는 마이어 회장이 서재 깊숙이 숨겨둔 같은 기종의 총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에 우연히 발견한 그 총이었다.
마이어 회장의 변호사인 리하르트 마팅거(하이너 라우터 바흐 분) 교수의 회유와 마이어 집안과의 사적 인연을 뿌리치고 라이넨은 정의의 편에 서기로 결심한다. 콜리니의 고향 이탈리아 몬테카티니로 날아가며 라이넨은 진실에 한 걸음 가까이 간다.
히틀러 추종자의 후손, 작가 폰 시라흐
영화 ‘콜리니 케이스’는 페르디난트 폰 시라흐(57)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변호사이자 소설가로 두 분야에서 모두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시라흐의 뿌리를 보면 이 소설이 더욱 눈에 띈다. 그의 조부 발두허 폰 시라흐(1904~1974)는 히틀러 추종자로, 히틀러 유겐트(나치 청년 조직)의 대장으로 나치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 군사법정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조모 헨리에타의 아버지, 즉 작가의 외증조부 하인리히 호프만(1885~1957)은 히틀러의 전속 사진사이자 절친한 친구로 나치 정부 핵심 참모였다. 히틀러의 여인인 에바 브라운을 히틀러에게 소개해 준 이도 호프만이었다.조상의 이력에 대한 작가의 고뇌 어린 속죄일까. 독자는 현장감 있는 전개와 빠른 흡입력에 몰입돼 원작은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마르코 크레즈페이트너(44) 감독은 원작의 깊이를 그대로 스크린에 재현하며 거듭되는 반전 속에 감동의 울림을 선사한다.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와 이 살인사건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지난해 이탈리아의 로마 정치사회경제연구소(EURISPES)가 펴낸 ‘이탈리아 2020 보고서’에 따르면, 이탈리아 국민의 19.8%는 파시즘 창시자인 베니토 무솔리니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사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솔리니는 독일의 히틀러와는 결이 다르다. 히틀러는 1922년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의 친위대, 소년단, 의상, 인사법, 레토릭, 연설법 등 일거수일투족을 답습했다. 이를테면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히틀러 나치즘의 ‘원조격’이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군사 분야에서는 한없이 무능했다.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하며 후퇴만 되풀이하다가 급기야 1943년 7월 시칠리아까지 연합군에 내줬다. 무솔리니는 곧바로 실각한다. 무솔리니가 없는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자, 독일은 1943년 9월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살로 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운다. 이탈리아 반도는 두 동강이 나서 남쪽은 연합군이, 북쪽은 독일군에 점령된다. 이탈리아인들은 무솔리니라는 잔인한 독재자가 사라지면 천국이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또 다른 지옥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1960년 개봉한 빅토리오 데 시카 감독,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 ‘두 여인’은 연합군 측 프랑스군인 모로코 부대에 처참하게 윤간당하는 두 모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유대인 귀도(로베르토 베니니 분) 가족의 아우슈비츠행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1938년 히틀러와 동맹을 맺은 무솔리니 정권은 독일의 반유대인법을 가져와 이탈리아 거주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빼앗기는 했지만 유대인을 타국 수용소로 보내는 데는 미온적이었다. 1943년 9월 이후 독일이 이탈리아 북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자, 유대인을 태운 많은 화물열차는 아우슈비츠로 향하게 된다.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마이어 회장의 손녀 요한나(오른쪽). [콘스탄틴 필름 제공]
잠시 재판은 휴정되고 마이어의 손녀 요한나는 라이넨 변호사에게 자신의 할아버지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이는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도피해 철저하게 숨어 살던 나치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이 잡혀 이스라엘 법정에서 한 항변과 같다. 전범으로 유대인 수용소 이송 실무책임자였음에도 그가 법정에서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말은 “상부의 명령을 따라 주어진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아이히만을 비롯한 독일군 장교들의 모순적인 자아도취 논리는 영화 ‘아이히만 쇼’(2015)와 ‘한나 아렌트’(2012)에서 잘 나타난다.
법정 방청객이 동요했지만, 마이어의 변호사인 마팅거 교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곧 새로운 반격을 시작한다. 1968년 콜리니는 누나와 함께 마이어 회장을 독일 검찰에 형사 고소한 적이 있고, 이듬해 독일 검찰은 “수사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수사를 중단했다. 즉, 이탈리아 민간인 학살에 대한 논의는 이미 종결된 사건이고, 파브리치오는 무고한 사람을 처참하게 죽인 셈이 된다. 마팅거 교수의 웃음에 라이넨은 허탈감을 감출 수 없다. 살인사건의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과거 독일군의 잔악한 악행까지 덮어지며 모든 것이 끝난 듯해 보였다.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
법정에 선 파브리치오 콜리니와 그를 변호하는 라이넨 변호사. [콘스탄틴 필름 제공]
콜리니의 복수, 심오한 정의의 메시지
라이넨 변호사는 마이어의 변호인인 마팅거 교수가 당시 법무부 수습변호사로, 드러의 행정법 개정을 위한 회의를 참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팅거 교수를 증인으로 불러 세워 1969년을 기준으로 삼은 그 법이 정의로운지 되묻는다. 과거에 용기가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 법정의 냉소적인 기운에 마팅거 교수는 1968년 ‘드러 법’이 잘못된 법질서였음을 실토하고 지금의 국제법에 따르면 마이어는 전범으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가해자 징벌을 위한 합법적 통로가 모두 막혀버린 콜리니는 직접 정의의 심판대에 오르기로 결심하고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법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진실을 감췄지만 마이어 회장은 법보다 무서운 정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 파브리치오의 복수가 면죄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심오한 정의의 메시지를 전한다.지난날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독일 정치인들은 종종 일본과 비교된다. 그래서 우리는 전후 독일이 나치 전범들을 확실하게 심판했다고 확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했던 것처럼 독일에서도 나치 전범 일부는 사회 엘리트로 남아 입맛대로 법을 제정하고 집행했다. 그들은 이 법으로 모든 범죄가 묻힐 줄 알았을 것이다. 얽히고설킨 인간사에서 과거사를 무 자르듯 단죄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 또한 후세에 냉혹하게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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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