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모호성’ 벗어난 점 눈길
안보동맹에서 경제동맹·첨단기술 동맹으로
‘낀 외교’ ‘전술적 타협’ 해석도
美 동아시아 전략, 3국 간 ‘세력균형’
現 미·중관계, 1930년대 미·일관계와 유사
韓中 ‘상하관계’ 조장하는 구조적 요인
5월 21일(현지 시간)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 미국 워싱턴 백악관 국빈만찬장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과 확대 회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신냉전의 국면에서 미국은 일본과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다른 강대국이 패권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해 보여줬던 패턴의 하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일본, 중국, 러시아의 관계에 개입해 3국 간 ‘세력균형’을 유지해 왔다. 그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보면 그 패턴을 알 수 있다.
친구와 적 오가는 미국의 동맹史
미국은 1890년대에 영국을 추월해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미국은 1898년 하와이를 병합하고 스페인과 치른 전쟁에서 이겨 필리핀을 취득하면서 명실상부한 태평양 국가로 떠올랐다. 이후 미국은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1890년대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상황은 역동적이었다. 중국은 1842년 아편전쟁 이래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세력 팽창을 기도하는 중이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 부국강병을 꾀하면서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야심을 보이고 있었다. 러시아는 1900년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 사건을 구실로 만주를 점령했다. 이에 미국은 ‘문호개방정책’ 위반이라는 이유로 러시아에 항의했다. 미국은 중국 내에서 자국의 권익을 확보하는 한편,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의 팽창 야욕을 막으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해 온 영국과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대륙 세력인 러시아가 만주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양 세력인 일본과 영국의 편에 섰다. 러일전쟁의 승자는 일본이었고,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 간 강화회담을 미국 포츠머스에서 주선했다. 또 1905년 9월 일본에 유리한 강화조약이 맺어지도록 유도했다. 그 직전인 1905년 7월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했다.
하지만 1905년 이후 일본은 러시아를 대신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최대 위협이 됐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미국 정부는 1932년 ‘스팀슨주의’를 발표해 “일본이 힘을 통해 현상 유지를 파괴하려는 것을 인정치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이 1937년 중국 전역을 침략했고, 이에 미국은 1941년 일본에 중국에서 철수하라고 최후 통첩했다. 결국 1941년 미일 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간 냉전이 격화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주적은 소련이 됐다. 1950년 2월에는 중소동맹 조약이 체결됐다. 같은 해 미국은 소련의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여기서 미·중 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해 양국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동시에 미국은 1951년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 후 미국은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하길 원했다. 중국은 소련과 관계가 악화하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했다. 1972년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주석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성사되기에 이른다. 이후 미국과 일본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을 맞아 중국과 협력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일본의 경제적 부상을 경계해 1985년 플라자 협정으로 엔화 절상을 결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의 경제를 주저앉혔다.
1991년 냉전 종식으로 미국과 중국 간에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졌다. 2010년대 초에 이르자 중국이 미국의 지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2018년 미국은 중국을 ‘패권국가이며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본격 견제했다.
현재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것은 1930년대에 미국이 일본을 압박하는 것과 유사하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지금의 중국은 해양대국을 선언하고 공세적 외교를 구사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이전 미국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뒤에는 미국과 중국이 군사협력을 강화했다. 현재는 미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은 불법이며, 대만과 센카쿠(댜오위다오)를 지키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그러면서 미국은 일본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주요국과 때로는 적으로 때로는 친구로 자리매김했다. 철저한 ‘세력균형 정책’을 실행해 온 셈이다. 이는 미국이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에서 유일 패권국의 출현을 방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과 협력해 중국을 견제하는 상황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2019년 12월 23일(현지 시간)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기 전 기념촬영을 한 뒤 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동아DB]
韓中 국력의 비대칭적 상하관계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 정책을 실행할 때, 한반도는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가? 1890년대 이래 일본, 중국,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보였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 병합을 용인했다. 조선은 미국이 다른 유럽 열강과 달리 공평무사한 국가라고 간주해 열강의 침탈을 막아줄 것이라 여겼으나, 결과적으로 허망한 기대였다.1950년 6월 25일 ‘중요하지 않은 나라에서 중요한 전쟁’이 발발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승인했다. 이는 한반도가, 미국이 소련과 전면전을 치르면서까지 사수해야 할 중요한 지역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침이 시작돼서야 미국은 소련이 냉전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다고 인식했다. 이에 미국은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1954년 한국과 동맹을 체결했다. 미국 편에 선 한국은 한 세대 만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기적을 완성했다.
미·중 간 신냉전 상황에서 미국이 보는 한국의 위상은 어떠한가. 미국은 냉전 당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전략적으로 중시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현재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전략적으로 중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이 이렇다면 한국은 미국 편에 서는 게 유리하다. 우선 경제적으로 4차 산업혁명에서 중국이 미국과 격차를 좁히고 있지만 여전히 이 분야를 주도하는 당사자는 미국 기업들이다. 국내 기업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원천 기술 보유국이자 4차 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미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군사적으로도 중국은 아직 미국에 열세다. 미국의 국방비는 전 세계 총 국방비의 40%에 이른다. 만에 하나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군비·무기 수준 등 세부 요소를 따지면 중국이 미국에 이기기 어렵다. 더불어 우리가 미국과 협력해야 북한의 무력도발을 제어할 수 있는데, 이 역할은 중국이 대체할 수 없다.
중국은 급부상한 강대국이나 평화적인 강대국은 아니다. 중국은 한국을 미국 중심의 동맹 체제에서 떼어내 중국의 종주권을 수용하는 ‘신형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존중하는 주권국가로 남기 위해서는 이념을 같이하는 미국과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즉 미국의 힘을 빌려 중국의 신형 속국 시도를 막는 수밖에 없다. 중국과 경제적 관계가 밀접한 호주가 영토상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의 영향권에서 독립해 행동과 선택의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유일 강대국이었다. 조선은 조공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초강대국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부상한 중국을 계속 견제할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세계화와 기술 발전으로 인해 세계가 좁아졌다. 그만큼 많은 선택지가 열려 있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수교했다. 이 과정에서 양국 관계가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는 중국이 한국을 두고 강압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데서 기인한다. 양국 국력의 비대칭은 이와 같은 ‘상하관계’를 조장하는 구조적 요인이다.
여기서 미국의 필요성이 부각된다. 미국은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해 한국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한국은 미국에 전략적으로 필요한 국가가 돼야 한다. 그래야 미국도 한국을 돕는다. 그러려면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앞세우는 나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또 미국이 일본과 힘을 합쳐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한국이 동참해야 한다. 즉 한국의 안보 이해관계는 구조적으로 중국과는 대립하고 일본과는 일치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은 포괄적 동반관계를 구축할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첫째, 중국이 민감해하는 ‘대만’과 ‘남중국해’를 처음으로 거론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중국을 의식해 그간 거론하기를 꺼려온 단어다. 둘째, 중국 견제 성격의 쿼드(Quad·미국, 호주, 인도, 일본 4개국 안보협의체)에 대해서도 “중요성을 인식한다”는 문구를 썼다. 이는 향후 한국이 쿼드에 참여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셋째, “핵심·첨단 기술 분야에서 동반관계를 강화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혀 양국이 경제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공동으로 견제할 가능성을 내보였다. 즉 한미 당국은 이번 회담으로 한미동맹이 기존의 ‘대북 중심 군사안보동맹’에서 인도태평양, 나아가 글로벌 차원의 경제동맹·첨단기술 동맹으로 확대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어설픈 중립’은 韓 구할 수 없다
그간 문재인 정부가 친(親)중국 성향을 보여온 점을 감안하면 이번 회담의 성과는 의외의 일처럼 보인다. 이에 일각에서는 유보적 평가도 내놓는다. 첫째, 공동성명에서 ‘중국’을 거론하지 않는 등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의 ‘낀 외교’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둘째, 한국 정부가 ‘대만’과 ‘남중국해’를 거론한 것은, 대북정책에서 미국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전술적 타협이라는 해석도 있다. 외교에서 문서는 일부일 뿐이다. 셋째,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일단 문재인 정부는 중국 경도론을 해소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압박해 올 경우 문 정부가 지금과 같은 입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두고 보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미국은 한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끌고 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미국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경제적으로도 한국과 더욱 협력하겠다는 복안을 내보였다. 이를 두고 미국이 중국에 맞서는 전초기지로 한국을 이용하려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간 국내에서는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서만 한국을 이용하려 한다는 볼멘소리가 있어왔다.
한국이 미국에 이용 가치가 있다면, 한국은 외려 이를 지렛대로 이용해야 한다. 한반도는 강대국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다. ‘어설픈 중립’은 한국을 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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