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한 기억도 없고, 남에게 준 적도 없는데 시간을 모조리 도둑맞은 기분이다. 도대체 누가 내 시간을 다 가져간 거지?
회사도 마감도 범인은 아니다
물론 의심 가는 용의자는 있다. 바로 회사. 그냥 회사도 아니고 광고회사다. 그중에서도 내가 속한 곳은 아이디어와 매일 씨름해야 하는 제작팀. 아이디어 내고, 카피만 써도 하루가 부족한데, 매일 회의와 보고, 급박한 수정과 더 급박하다며 달려오는 요청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이미 저물어 있기 일쑤고. 터덜터덜 퇴근하면서 동료들과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내일 회의에 가져갈 아이디어가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지?” “난 내일 새벽에 나와서 낼 거야.” “나도 내일 새벽에 나와야겠다.” 매번 이런 식이다. 잡다한 일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 시간은 오직 새벽밖에 없는 것이다. 광고인의 ‘미러클 모닝’(새벽 일찍 일어나 일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문화)이란 이토록 슬프다.하루 종일 100m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십수 년을 다닌 회사를 이제야 유력한 용의자로 보기엔 조금 찝찝한 구석이 있다. 어쨌거나 회사는 시간을 가져가는 대신 월급을 주지 않는가. 우선 회사는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도록 하자.
그다음 용의자는 원고 마감이다. 바쁜 와중에 최근 1년간 무려 3권의 책을 출간했으니 마감도 어느새 일상이 됐다. 글을 쓰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출판사와 계약하고, 마감을 정하고, 그걸 지켜야 한다며 발을 동동거리며 산다. 그 와중에도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또 쓰고, 강연 요청이 오면 또 기꺼이 간다.
매일 징징거리면서도 도무지 글 쓰는 일을 줄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돌아서면 원고 마감이고, 숨 한번 가다듬고 나면 또 마감이다. 하지만 마감을 시간 도둑으로 몰아가기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건 내가 정말로 간절하게 가지고 싶었던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작가’라 불리며 살아갈 수 있길 얼마나 오래 꿈꿨던가. 그 때문인 걸까? 글 쓰는 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그다지 없다.
시간 훔친 범인은 휴대폰
그렇다면 술이 시간을 훔친 핵심 용의자인가?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다. 매일 바쁘다고 노래를 하면서도 나는 매일 남편과 저녁이면 술을 마시니 말이다. 단골 술집은 우리 집 거실. 영업 시간은 퇴근 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주종은 매일 달라진다. 안주가 그날그날 달라지니 말이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부터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남편과 치밀한 논의를 한다. 냉장고 안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식재료를 체크하고, 오늘 꼭 먹고 싶은 메뉴가 있는지도 점검한다. 오늘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 지수도, 점심 메뉴도 고려한 후에 메뉴를 결정하고, 그에 어울리는 잔과 술을 꺼내놓는다.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시간이 없어서 이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면? 회사를 다닐 의욕도, 글을 쓸 의욕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술을 주범으로 몰아간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것은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주도(酒道)를 아는 분들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가장 우선적으로 용의선상에 올라간 회사, 마감, 술을 제외하고 나니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시간을 도둑맞았는데 범인은 없다니. 범인 검거를 포기하려는 순간 갑자기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이번 주 평균 스크린 타임 : 4시간 23분’ “뭐라고? 내가 하루에 4시간 23분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본다고? 일주일에 30시간 넘게? 그럼 7일 중 하루 이상을 휴대폰만 본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말이 되나?
시간 나면 책에 파묻혀 살고 싶지만
[GettyImage]
그렇지 않아도 나쁘던 집중력은 휴대폰 덕분에 더 성능이 떨어졌다. 5분 집중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다. 이참에 휴대폰 타이머를 켜고, 내가 얼마 동안이나 휴대폰을 안 볼 수 있는지 체크해 볼까? 그 핑계로 휴대폰을 들면, 또 각종 SNS와 게임 앱을 전전하겠지? 그러다가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도 까먹겠지?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다. 관두자, 관둬.
휴대폰이 훔쳐간 내 시간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뭘 하고 싶으냐고? 하루 종일 책만 읽고 싶다. 진심이다. 이 소원을 팀원들 앞에서 말했다가, “책을 읽고 싶다고요? 에이, 그게 무슨 소원이에요”라고 핀잔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책 유튜버 김겨울 님은 2개월 동안 방학을 선언하고, 읽고 싶은 책들을 ‘흡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입이 딱 벌어졌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였다.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쌓아놓고 정신없이 책 사이를 헤매는 것. 내 글 쓰느라고 못 읽은 남의 글들을 탐욕스럽게 읽어내려 가는 것. 여행이 사라진 시절이니 책을 통해 내가 모르는 시공간으로, 남의 인생으로, 남의 지식으로 여행을 마음껏 떠나보는 것. 그게 당장의 소원이다.
휴대폰 대신 책 들었으면 다 읽었을 책들
읽지도 않을 책을 또 얼마나 사 모았는지 모른다. 거실 한 면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방 하나에는 도서관처럼 책꽂이를 들였는데도 책이 넘쳐난다. 사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도 많다. 보자마자 산 책, 당장 읽어야겠다며 주문해 놓고는 펼쳐보지도 않은 책,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니 고민 없이 바로 결제한 책, 친구의 추천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홍보글에 홀려 사둔 책들, 모두가 말하는 고전이니 언젠가는 읽겠지 싶어서 큰 맘 먹고 결제한 전집, 이제는 가까이 해야겠다며 왕창 사들인 시집들까지. 내 책 욕심에 남편 책 욕심까지 더해지니 이사는 꿈도 못 꾸는 집을 갖게 됐다. 농담이 아니다. 우리 집에 처음 와본 친구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야, 너네는 이사 못 가.”책에 파묻혀 살며, 회사 다니는 틈틈이 책을 쓰고도, 책을 마음껏 읽고 싶다는 소원을 가진 사람이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다고? 내가 써놓고도 이렇게나 한심한 문장이 없다. 휴대폰이 가져간 4시간 23분 중 절반만 가져와도 나는 독서왕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수갑을 손목에 차고, 가지런하게 모인 두 손으로 책을 들 것이다.
휴대폰은 멀리 던져놓고. 무슨 원수라도 된 것처럼 저 멀리 던져놓고 말이다.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이 다짐, 내가 지킬 수 있을까? 벌써부터 진한 패배의 기운이 온 몸을 감싼다. 아이고야. 내 시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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