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호

민경우 586칼럼

참여연대가 ‘관제어용’이 된 근본 이유

“시민단체 본질적 중립에 거부감 느낄 것”

  •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 소장

    mkw1972@hanmail.net

    입력2021-07-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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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대 후반 시민운동 양대 세력 참여연대와 경실련

    • 참여연대, 2000년 낙천·낙선운동 이후 정치 이슈 집중

    • 권력 대척점에서 권력 감시가 시민단체 존재 이유

    • 민주주의, 정의(正義), 시민단체에 대한 ‘특별한’ 정의(定義)

    • 지금 시민단체에 필요한 건 지원 아닌 근본 철학 재규정

    *586세대 NL(민족해방 계열) 이론가이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 출신인 필자가 문재인 시대에 표하는 유감.

    참여연대와 경실련은 1990년대 후반 시민운동의 양대 세력을 형성했다.

    참여연대와 경실련은 1990년대 후반 시민운동의 양대 세력을 형성했다.

    2019년 하반기 조국 사태가 있었다. 30년 이상 운동권으로 살아오며 알게 된, 함께 운동했던 후배들이 “조국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항변할 때는 참으로 괴이했다.

    조국 사태가 준 또 다른 충격은 참여연대의 태도였다. 나는 참여연대를 존경했다. 그들의 태도는 한국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잣대가 된다고 믿은 적도 있다. 그러나 조국 사태를 계기로 참여연대가 보여준 모습은 관제어용 그것이었다. 참여연대에서 공동집행위원장을 했던 김경율도 “참여연대가 권력집단으로 변질했다”며 필자와 동일한 주장을 했다.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조국이 이번에는 책을 냈다. 이른바 추미애-윤석열 갈등의 한 축이었던 추미애도 여전하다. 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조국 사태와 참여연대 문제는 먼 옛날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이다. 참여연대는 어쩌다 관제어용화의 길로 빠져든 것일까.

    참여연대 3인방

    참여연대 활동을 주도한 세 사람. 박원순 전 서울시장,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참여연대 활동을 주도한 세 사람. 박원순 전 서울시장,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참여연대를 시작한 사람은 박원순, 조희연, 김기식이다. 이들 3인 모두 서울대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박원순은 대학 시절 반유신 데모에 연루돼 제적된 바 있고 서울대 74학번인 조희연 또한 1978년 학내 시위에 연루돼 형을 살았다. 김기식은 서울대 85학번으로 서울대 주사파 조직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의 일원이었다.



    1990년대 초반 이들은 새로운 유형의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를 결성하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참여연대의 발족 선언문에는 참여와 인권을 두 개의 기둥으로 한다고 돼 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관점에서 보면 이색적인 일이었다.

    1970년대 학생운동은 친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친사회주의 성향이 발전해 1980년대 중후반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으로 비약한다.

    박원순은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책자를 발간했다. 박원순이 쓴 ‘국가보안법연구’는 정치범들의 필독서였는데 나 또한 감옥에서 그 책을 탐독했다. 국가보안법에는 두 레벨이 있다. 하나는 북의 지령을 받고 지하당을 만드는 수준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을 고무 찬양하는 정도다. 전자까지를 포함해 국가보안법 전체를 문제 삼는 주장이 있고, 전자는 그대로 두고 후자 정도를 문제 삼는 주장이 있다. 이 중 박원순의 주장은 전자에 가깝다. 운동권에서 강령적 수준에서 주장할 법한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다.

    조희연의 경우 통일혁명당(통혁당),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외(남민전)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조희연은 졸업 이후에도 다양한 현안에서 급진적 이념과 지향을 보이곤 했다.

    김기식은 서울대 인류학과 85학번으로 주사파 혁명조직 구학련의 일원이었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혁명조직에 가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84학번으로 그보다 한 학년 위였는데 비슷한 시기 학생운동을 함께 했다. 명석하고 열정적인 후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상에는 좀처럼 비약적 변화가 없는 것 같다. 1970년대 운동권은 친사회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소련 사회주의권이 붕괴했어도 그들 대부분은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채로 1990년대를 맞는다. 이 점이 한국 학생운동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1970년대 학생운동에 관여하고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결성에서 핵심 역할을 한 서경석을 고려하면 차이가 명확하다. 서경석은 학창 시절 통혁당,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다가 1982~1988년 미국 유학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며 친운동권적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서경석과 같은 예는 거의 없다. 간혹 그런 사례가 있는데 생각을 바꾸는 과정에서 미국과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1990년대 본격화된 시민운동은 1970~1980년대 운동권의 생각과 결별한 것이 아니라 그 연장선에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경실련과 달리 참여연대의 핵심 멤버들은 시민운동 진영 중에서도 친운동권 성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시민운동의 양대 세력

    1990년대 후반 참여연대와 경실련은 시민운동의 양대 세력을 이룬다. 이 균형을 무너뜨린 것이 2000년 4월 총선을 계기로 벌어진 낙천·낙선운동이다. 이후 참여연대는 반전평화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 투쟁에 참여하며 시민적 의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로 의제를 확대해 나간다.

    낙천·낙선운동이란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40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총선시민연대를 조직하고 2000년 총선에 출마한 국회의원 후보자를 검증한 후 조직적인 낙선운동에 나선 것이다. 낙선 후보자로 지목된 86명 중 59명을 낙선시키는 혁혁한 성과를 얻었다. 시민운동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성과였다.

    중요한 것은 낙천·낙선운동의 정치적 배경이다. 낙천·낙선운동은 첫째, 중립을 표방했지만 사실상 반보수 정치운동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둘째, 강한 행동주의, 급진적 민주주의 요소를 갖고 있었다. 결국 밑으로부터 대중적 힘을 통해 보수세력을 제압하겠다는 프로젝트였다.

    1990년대 참여연대와 더불어 시민단체를 양분했던 경실련 창립을 주도한 서경석은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과거 운동권이 민주집중제라 하여 민중이 투표로 한 결정은 전부 옳다고 주장했는데, 낙선·낙천운동은 이러한 옛날 생각으로 되돌아간 것”이라며 “386세대가 성장하면서 조성한 거대한 좌편향 흐름이 나중에는 경실련까지 삼키고 말았다”고 주장한다.(2012년 4월 10일 ‘크리스천 투데이’)

    낙천낙선운동 이후 참여연대는 정치 최일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규탄 시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2005년 6·15 공동위원회 참여, 2006년 한미FTA 반대 투쟁,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2014년 세월호 촛불시위, 2016~2017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집회 등이다.

    이 중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 2017년 박근혜 탄핵 집회 등은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운명을 가른 중요한 집회다. 즉 참여연대는 한 진영의 입장에 서서 매우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만약 서경석의 입장이었다면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을 거론하며 더욱 신중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참여연대는 그들의 행동이 시민단체의 중립성과 공정성을 위배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과 단체들을 배신자 등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부분적, 유보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단호하게 상황을 주도했다.

    이런 입장에 선다면 2017년 촛불시위는 수많은 정치적 공방에서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정치참여의 하나가 아니라 2000년 낙천·낙선 운동 이후 민주주의의 완성을 상징하는 최종적인 정치투쟁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들은 집회를 주도하며 이것이 민주주의의 운명을 좌우하는 극적인 정치 이벤트라 생각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을 포함해 시민단체 다수가 2017년 촛불시위의 의미를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여기에 흠집을 내는 일련의 경향을 ‘토착왜구’와 같은 극단적인 개념을 사용해 공격한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그 연장선에서 조국 사태와 그 이후 벌어진 집권 엘리트들의 부정 비리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다. 낙천·낙선운동에 따르면 부정 비리는 오직 보수우익세력에만 있을 수 있고 민주진보 진영은 애초부터 부정 비리와는 근원적으로 상관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조국 사태에 대한 참여연대의 대응은 자신들만이 절대선이고 상대방은 대중동원을 통해서라도 제압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조국 사태가 터졌을 때 시민단체가 견지해야 할 중립성과 공정성을 가볍게 보고 독특한 경로를 밟아온 그들의 성장과정 때문에 그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국 사태 이후 참여연대를 조직하는데 핵심적으로 관여한 세 사람 모두 갖가지 추문에 휩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박원순은 성추문에 연루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김기식은 부적절한 처사로 금융감독원장에서 낙마했다. 조희연은 불법 특채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1호 수사 대상이 됐다.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잘못에 대한 정직한 반성을 거부하고 있는 점이다. 박원순의 경우 자살로 그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박원순을 비롯한 고위 정치인의 자살은 한 개인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평가와 반성을 무력화하곤 한다. 감성적 진영 논리가 상황을 압도한다.

    조희연의 경우도 온갖 불거진 문제에 대해 시종일관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기식의 경우 부적절한 처신이 반복된 점을 고려하면 초보적 윤리의식조차 사라진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제어용 시민단체

    동일한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 조국, 추미애, 박범계 그리고 민주당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다. 조국 사태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그들의 시도는 일차적으로 좌절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권력의 정상에 있고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고자 하는 궤변도 지속되고 있다. 박원순, 조희연, 김기식과 현재 정상에서 선 사람들 중 일부는 동일한 신념 체계를 갖고 있는 동질 집단이다.

    이론상으로만 보면 참여연대가 시민단체로서 본연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다시금 권력의 대척점에 서서 권력을 감시하고 준엄하게 그들을 응징하는 길에 서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그들은 이미 권력에 영합하는 길에 접어들었고 그것은 그들의 사상과 DNA에 깊숙이 박혀 있다. 아마도 그들은 “시민단체의 본질은 중립”이라고 규정하는 데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참여연대는 관제어용 시민단체로 전락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민주주의, 정의(正義), 시민단체에 대한 ‘특별한’ 정의(定義)가 현재의 참여연대, 나아가 문재인 정권의 본질에 깊숙이 녹아 있어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5월 12일 국무총리실 주재로 ‘시민사회 활성화’ 토론회가 열렸다. 이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을 법제화하는 시민사회3법(시민사회활성화기본법, 민주시민교육지원법, 기부금품법)이 논의됐다. 지금 시민단체에 필요한 것은 지원이 아니라 시민단체에 대한 근본 철학을 재규정하는 것이다. 참여연대가 걸었던 관제어용의 길과 단절하는 것이다.

    #참여연대 #박원순 #조희연 #김기식 #신동아


    민경우
    ● 1965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 저서 : ‘수학 공부의 재구성’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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