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호

“통장 만들어주면 돈이 왕창, 감옥 안 간다 했는데…"

[사바나] 불법 명의 거래하다 조직 가담… ‘돈맛’에 묶인 청년들

  • 김건희 객원기자

    kkh4792@donga.com

    입력2021-07-1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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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법 명의 거래 이어 대포통장 유통하다 적발

    • ‘고수익 알바’ 강조하며 젊은이들 유혹

    • 유령 회사 감추려 유한·주식회사 번갈아 설립

    • 전직 조직원 “월수입 250만 원, 후폭풍 예상 못 해”

    밀레니얼 플레이풀 플랫폼 ‘사바나’는 ‘회를 꾸는 ’의 줄임말입니다.

    유령 법인이 개설한 ‘대포통장’. [부산경찰철 제공]

    유령 법인이 개설한 ‘대포통장’. [부산경찰철 제공]

    “제 명의로 통장을 개설해 양도하면 통장 개당 50만 원을 준다고요?”

    “그건 사장님이 개인 통장을 개설했을 때 받는 금액이죠. 법인 통장을 개설해 저희에게 양도하시면 가져가는 액수는 더 커져요. 사장님 명의로 돈이 안 드는 유한회사 법인을 설립한 뒤 그 명의로 계좌를 여러 개 개설하시면 우선 500만 원을 드려요. 그러고 나서 사장님이 그 법인과 계좌 등을 저희에게 넘기시면 나머지 500만 원을 지급합니다. 사장님은 저희와 함께 일할 수도 있어요. 사장님 명의로 개설한 유령 법인과 계좌를 직접 관리하는 조건으로 월 400만 원의 정기 수입을 올릴 수 있죠.”

    6월 6일 자신을 대포통장 매매업자라고 밝힌 ‘이 실장’과 만났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텔레그램’ 채팅을 통해서였다.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고수익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준다’는 광고물을 보고 텔레그램 아이디로 연락을 취했다. 이 실장은 기자를 ‘사장님’이라고 칭하며 거리낌 없이 ‘대포통장’을 만들라고 권했다. 기자가 머뭇거리며 “명의 양도는 불법이다”라고 하자 그는 “걱정하지 말라”며 말을 이었다.

    불법 명의 거래 이어 대포통장 유통하다 적발

    “경찰에 걸리지만 않으면 되죠. 저희가 하는 건 확실히 달라요. 사장님은 제 전화기로 ‘통장 돌려달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주기적으로 보내세요. 경찰 수사로 명의 거래 사실이 드러나도 범행 가담 의사가 없었음을 입증해주는 증거가 될 테니까. 만일 사장님이 저희와 거래하다 재판을 받게 돼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벌금형을 선고받으면 저희가 벌금 대납해 드리고요. 저희 조직의 일원이 더 확실한 방법으로 신원을 보장해 줍니다.”



    고수익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는 문구를 내걸고 연락해 오는 청년들을 하위조직원으로 포획하는 ‘유령 법인 대포통장 유통조직’의 수법이다. 경찰청 경제범죄 수사 담당자의 말이다.

    “과거에는 대출이나 취업 알선을 명목으로 통장을 요구하는 대포통장 피해 사례가 자주 발생했다. 최근에는 브로커와 명의를 거래하던 2030세대가 ‘유령 법인 대포물건 유통조직’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수사기관에 적발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처음에는 젊은이들이 급전이 필요해 명의를 빌려준 것을 꺼림칙해한다. 그러나 일단 ‘돈맛’을 보면 이후 조직의 실체를 깨닫게 돼도 쉽게 발을 빼지 못한다.”

    2019년 1월 유령 법인 대포통장 유통조직의 조직원으로 활동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20대들이 대표적 사례다. ‘관리책’으로 고용된 A씨(24) 등 4명은 2016년 10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2년간 유령 회사 총 41개를 설립하고, 각 회사 명의로 대포통장 173개를 개설·유통해 2억7000만 원의 범죄 수익을 거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검찰 조사에서 “인터넷에서 ‘명의 빌려주면 50만 원을 당일 지급한다’는 광고 글을 보고 명의를 거래하다 결국에는 조직에까지 발을 들이게 됐다”고 진술했다.

    대포통장·대포폰·대포차 등 이른바 ‘대포물건’ 불법유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2015년부터 2019년 8월까지 최근 5년간 불법유통된 대포물건은 총 35만5662대에 이른다. 종류별로는 △대포통장 12만8535개 △대포폰 17만3385대 △대포차 5만3742대다.

    ‘고수익 알바’ 강조하며 젊은이들 유혹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대포통장, 대포폰, 대포차 등 각종 불법 명의 거래 정보가 넘쳐난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대포통장, 대포폰, 대포차 등 각종 불법 명의 거래 정보가 넘쳐난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이 가운데 청년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명의 거래 유형은 대포통장이다. 대포통장 유통은 돈이 필요한 사람이 자기 명의로 개인 통장을 개설하거나 유령법인을 설립해 법인 통장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브로커들은 개인 통장보다 법인 통장 개설을 선호하는 편이다. 한 사람 명의로 법인을 2~3개 설립하고, 법인 1개당 계좌를 5~6개가량 개설할 수 있어 개인 통장보다 더 많은 범죄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 실장’이라고 밝힌 대포통장 브로커는 “청년들은 생활자금이 당장 필요하거나 학자금 상환을 위해 정기적인 수입이 필요할 뿐 아니라, 휴대전화나 태블릿PC 등 모바일 기기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대포폰이나 대포차보다 대포통장 유통을 위한 명의 거래에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타인 명의로 개설한 대포물건을 유통하는 행위는 엄연한 불법이다. 현행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와 제49조에 따라 다른 사람 명의로 거래하는 예금통장이나 직불카드, 공인인증서, 비밀번호, 생체정보 등 접근 매체를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양수하는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온라인상에서 불법으로 이뤄지는 명의 거래는 정부도 속수무책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파악한 내용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8월까지 최근 5년간 심의된 불법 명의거래 정보(대포폰·대포통장·대포차)가 1만3087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시정 요구 건수가 1만2744건에 이른다.

    온라인상에서 명의 거래 정보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기자가 직접 ‘구글’ 홈페이지 검색창에 개인 통장과 법인 통장의 은어인 ‘개인장’ ‘법인장’을 비롯해 ‘유심칩 매매’ ‘대포차 팝니다’ 같은 몇 가지 검색어를 조합하자 불법 명의 양도를 유도하는 내용의 게시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브로커는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에서 ‘단기간 고수익 알바’를 강조하며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있는 청년세대를 유혹한다.

    유령 회사 감추려 유한·주식회사 번갈아 설립

    그렇다면 유령 법인 대포물건 유통조직은 청년들을 어떻게 유혹하고 있을까. 또 이런 조직의 활동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전직 조직원인 20대 중반 P씨의 실제 경험담을 통해 그 실체에 다가갔다. P씨는 부산에서 유령 법인 대포통장을 유통하다 검거돼 지난해 11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징역 4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 지경이 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P씨는 2019년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택배 상하차 일을 했지만 고된 노동에 치여 한 달을 채우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C씨가 올린 ‘사용하지 않는 통장과 체크카드를 빌려주면 개당 30만 원을 당일 지급한다’는 광고 문구를 보고 거래를 튼 후 그와 일하게 됐다. C씨는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는 유령 법인 대포통장 유통조직의 관리책이었다.

    P씨에 따르면 이들 조직의 구성원은 대다수가 실직했거나 채무가 많은 20대 청년층이다. 급전이 필요해 한두 번 명의를 거래하다가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한다’는 말에 현혹돼 범행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P씨가 맡은 업무는 인터넷에서 법인 통장을 개설할 명의를 빌려줄 사람을 물색하는 일. 공략 대상은 경제적으로 궁핍해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명의 대여자 중에는 중장년층 신용불량자나 도박 빚에 내몰린 노숙자도 있었다. P씨는 이런 사람들을 유령 법인 대포차 유통조직에 소개하는 일도 맡았다.

    P씨가 속한 조직에는 당시 총책 2명, 관리책 5명, 하위 조직원 20여 명이 있었다. 관리책 1명이 하부 조직원 4명을 관리하는 구조였다. 모든 관리책은 점조직으로 일했다. 조직원이 모두 모이는 일도 없었다. 그 때문에 P씨는 관리책 C씨의 휴대전화 번호밖에 알지 못했다. 물론 C씨의 휴대전화도 대포폰이었다.

    유령 법인 대포통장 유통조직은 정체를 감추기 위해 유한회사와 주식회사를 번갈아가며 설립한다. P씨는 “자본금 납입이 필요 없는 유한회사를 주로 설립한다. 하지만 한 사람 명의로 지나치게 많은 유한회사를 설립할 경우 유령 회사라는 의심을 살 우려가 있기에 주식회사도 설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직 조직원 “월 250만 원 수입, 후폭풍 예상 못 해 후회”

    유한회사는 자본금을 납입할 필요가 없고 사업장 임대차계약서만 있으면 설립이 가능하다. 유령 법인 대포물건 유통조직은 이를 위해 보증금 없이 약 15만 원 내외의 저렴한 월세를 받는 사무실을 3~6개월 단기로 임차한다.

    주식회사는 자본금이 있어야 설립할 수 있다. 관리책 C씨의 자본금 마련 방식은 상당히 지능적이다. C씨는 P씨를 비롯한 하위 조직원들에게 1000만 원씩 빌려준 뒤 개인 계좌에 이 자본금을 납입하게 했다. 주금납입보관증명서를 발부받아 법인 설립 등기를 마친 다음, C씨는 이 자본금을 개인 계좌에서 다시 인출해 자신에게 갚도록 했다. 이른바 ‘자본금 기장납입’ 수법이다. 자본금을 일시적으로 넣었다 빼버리면 그 회사는 사실상 자본금이 없는 ‘깡통회사’가 된다. 현행 상법에 따르면 자본금 기장 납입 행위는 5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1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대포물건 유통조직은 수직 체계를 지향한다. 관리책은 유령 법인을 설립하고 대포통장을 개설할 하위 조직원을 모집하는 한편, 대포통장을 수집하고 대금을 지급하는 하위 조직원들의 업무를 관리한다. 하위 조직원은 주식회사나 유한회사의 이사 또는 감사로 이름을 올려 법인 설립 등기를 돕는다.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은 후 통장을 개설하는 업무도 도맡는다. 상위 조직원은 하위 조직원에게 법인 설립 노하우와 통장 개설 방법 등을 전수한다. 하위 조직원이 유령 법인을 설립하고 대포통장을 만들어오면 상위 총책이 이를 통장 구매 전문 조직에 돈을 받고 양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포통장은 ‘스포츠 토토’ 등 불법 사설 도박 사이트를 이용하기 위한 계좌로 쓰인다고 한다.

    대포통장을 통장 구매 조직이나 도박 사이트 운영자에게 팔아 거둔 수익은 피라미드식으로 분배된다. 하위 조직원과 관리책, 총책이 일정 비율의 금액을 챙겨가는 것이다. 결국 하위 조직원을 많이 모집할수록 자기 수입이 많아지는 셈. 하위 조직원 P씨의 고백이다.

    “조직원 1명당 평균 2~3개의 유령 법인을 설립하고, 법인 1개당 계좌 4~6개를 개설해 수익을 조직 단계별로 나눠 갖는다. 당시 내 몫이 매달 250만 원 내외였다. 그때는 이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명의 거래가 인생에 후폭풍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난 일을 후회한다.”

    관리책 C씨는 하위 조직원들에게 경찰 수사를 따돌리기 위한 사전교육도 실시했다. 타인 명의로 개설한 통장이나 현금카드 출처를 경찰이 추궁할 경우 허위 진술로 대처하고, 경찰 수사를 마치는 즉시 범행에 쓰인 통장과 현금카드를 모두 폐기해 증거를 없애라는 것이 요지다. 대포통장 유통조직은 그런 식으로 수사기관을 따돌리고 범행을 계속 이어가도록 독려한다.

    범죄 전문가들은 청년층에게 불법 명의 거래의 위험성을 알리는 교육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메트라이프생명 제공]

    범죄 전문가들은 청년층에게 불법 명의 거래의 위험성을 알리는 교육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메트라이프생명 제공]

    “‘돈만 벌면 된다’ 생각에 불법 거래 가볍게 인식”

    이에 대해 경찰청 경제범죄 수사 담당자는 “현재 유령 법인 대포통장 유통조직에 대한 수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조직원이 경찰 수사를 피하는 수법도 모두 노출된 상황”이라고 전했다. 또 “대포통장 유통조직원으로 활동하지 않더라도 명의를 대여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자체가 범죄임을 직시해야 한다”며 “고소득 알바에 현혹돼 큰코다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범죄 전문가들은 청년층을 대상으로 불법 명의 거래의 위험성을 적극 알릴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요즘 젊은이들이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온라인상에 널려 있는 명의 거래 정보를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벼이 넘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강욱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청년들이 불법행위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돕는 교육이 절실하다”며 “타인 명의로 대포통장을 개설해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범죄자들의 처벌 수위를 높여야 범죄 완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명의사기 #대포통장 #고수익알바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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