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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 식객’ 안견이 수양대군 치하에서 목숨 건진 까닭[환상극장]

‘몽유도원도’ 안견은 수양대군의 간자?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안평 식객’ 안견이 수양대군 치하에서 목숨 건진 까닭[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도화원 화공 안견은 경복궁 우측 가회방에 자리 잡은 자신의 집에서 말년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화공 출신으로선 바라기 힘든 정4품 호군 벼슬까지 하사받았고, 잘 가르친 자식들을 버젓한 양반 신분으로 만들었으니 요족하기 그지없는 삶이었다. 이 모든 행운은 이미 오래전 세상을 뜬 선왕 세조 덕분이었다.

안견의 산수화 대부분은 한양 귀한 집 내실마다 걸려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그 자신이 인정하는 작품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안평대군의 꿈 얘기를 듣고 그려준 몽유도원도였다. 그는 본래 주인을 잃고 자기 거실에 걸려 있는 이 작품을 홀로 감상하며 젊은 시절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그 실수가 초래한 운명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안견의 가회방 저택은 제법 컸다. 그동안 불린 재산도 적지 않은지라 수많은 시인 묵객과 예술인이 드나드는 명소가 돼 있었다. 손님으로 북적대는 흥성함을 아주 좋아한 안견은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듣기를 즐겼다. 자신을 따르는 후배 화공과 청랑한 악기 음률을 곱씹노라면 먼 옛날 그리도 흠모하고 탐내던 안평대군의 호사스러운 삶을 반의반 정도는 따라잡은 듯 감회에 젖었다.

독특한 농현 기법으로 안견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 젊은 연주가가 출연한 그날, 소슬한 봄바람에 달은 밝았고 술과 안주 역시 흡족해 그는 이쯤에서 생을 마쳐도 좋겠다고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그 기이한 거문고 소리가 차츰 그의 감정을 헤집으며 설명할 길 없는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전까지는 그랬다. 연주를 중단시킨 안견은 미지의 젊은 연주자를 가까이 불러 앉히고 나서 물었다.

“자네 나이가 아직 어린 듯한데, 그 야릇한 농현법은 누구에게 배웠나?”



갸름한 얼굴에 중성적인 눈매와 날카로운 콧대를 한 젊은이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대답했다.

“시골의 이름 모를 스승에게서 배웠습니다.”

“시골 어디?”

“경북 상주 고을입니다.”

“상주에 그런 농현을 하는 악공이 산다는 얘긴 처음 듣는데?”

“그저 떠돌이 악공이셨습니다. 지금은 행방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옛 기억을 소환하는 거문고 소리

청년을 찬찬히 뜯어보던 안견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 농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골 관아에서 아무렇게나 뜯는 악공 솜씨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건 궁궐에서 놀아본 자나 할 줄 아는 농현이야! 도대체 네 녀석 정체가 뭐냐?”

청년의 눈동자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음성만은 평정을 잃지 않고 단정히 흘러나왔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스승께서 사라지신 뒤 혼자 계속 연마하다가 이제 세상에 시험해 보려 상경했을 뿐입니다.”

한숨을 몰아쉰 안견이 안석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마치 꿈을 꾸듯 혼잣말을 했다.

“그건 요즘 음률도 아니다. 그 장단고저는 세종께서 다스리시던 태평성대의 것이다. 말하자면 잘 다스려지는 시대의 소리, 바로 치세지음이다. 그걸 시골 떠돌이 악공이나 너처럼 어린 것이 알 리 없지 않으냐? 어찌 그리도 옛 음을 잘 짚는단 말이냐?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구나.”

세종 치하의 좋은 시절, 시서화(詩書畵) 어느 것 하나 못 하는 게 없던 천재예술인 안평대군은 사람을 구름처럼 몰고 다녔다. 장안에 재주 있다는 자는 죄 안평 문하에 들려고 경쟁했고,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만 대군 저택인 무계정사의 연회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무계정사를 드나든다는 것은 곧 한양 문화의 최심부에 진입했음을 의미했고, 더 나아가 왕조 권력의 미래 실세와 연결됐음을 뜻하는 증표이기도 했다.

그 좋았던 옛 시절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을 바탕으로 그린 ‘몽유도원도’. [위키피디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을 바탕으로 그린 ‘몽유도원도’. [위키피디아]

필법이 탁월했으나 도화원 화공 사이에서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던 안견을 먼저 발견해 준 이도 안평대군이었다. 대군은 안견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봤다. 언뜻 범상해 보이는 안견의 산수화 한 점을 우연히 손에 넣은 대군은 그림 안에서 약동하는 놀라운 구성력에 매료됐다. 사물을 전체적으로 투시해 펼치는 장쾌한 구도와 세필로 이를 하나하나 실현해 내는 묘법은 완성을 기다리는 젊은 대가의 솜씨였다.

무계정사의 단골 식객이 된 안견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한양 전체로 퍼져나갔고, 도화원에서 그를 대하는 태도마저 바꾸도록 했다. 비록 천한 화공이었지만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권부의 후원을 받게 된 그를 함부로 볼 사람은 없었다. 몽유도원도는 그 좋았던 시절 그려졌다.

연회가 파하고 침방에 들기 전, 안견은 상주 출신 젊은 악공을 거실로 불렀다. 거문고를 가르쳐줬다는 스승에 대한 얘기가 께름칙하긴 했지만 그냥 떠나보내기엔 아쉬움이 남아서였다. 그가 청년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디 편히 묵을 데가 없다면, 내 집 식객이 되진 않을 테냐?”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아 생각에 잠긴 청년은 보면 볼수록 끝을 알 길 없는 수심에 잠겼다. 상대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안견이 덧붙였다.

“무슨 근심이 그리도 많은 게냐? 내 집에서 묵으며 거문고나 가끔 타다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청년의 눈길이 벽에 걸린 몽유도원도에서 멈췄다. 시선을 그림에 고정한 채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리하겠습니다만, 저 그림의 사연이 궁금합니다.”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은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바라보고, 다시 그걸 보는 청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사연이 왜 궁금하지?”

빙그레 미소를 띤 청년이 처음으로 경쾌하게 말했다.

“실은 소인 아비가 절에서 탱화를 그렸습니다. 그림을 조금 볼 줄 압니다.”

의심이 다소 누그러진 안견이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참으로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문종 임금께서 잠저에 계시던 때지. 누가 날 처음 써주셨는지 아느냐? 바로 안평대군이셨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으니 이런 말도 하게 되는구나. 그렇다! 난 한때 역적 안평대군의 사람이었다.”

두 눈이 가는 실금처럼 가로로 찢어지며 청년이 물었다.

“세조께서 등극하시며 안평대군 사람들은 모두 주륙되지 않았던가요? 무례한 질문 송구합니다만.”

“물론 그랬지. 나도 위험했어. 하지만 살길이 열리더구나. 가만히 돌아보면, 그도 그럴 것이, 난 그저 그림 그리는 화공이었으니, 무슨 죄 지을 일이 있었겠느냐? 게다가 수양대군 어르신께서는 용상에 오르기 전부터 가끔 날 불러주시기도 했더랬다.”

가늘고 긴 청년의 눈썹이 잠시 찡그려지더니 이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가 물었다.

“두 분 대군님을 다 섬기셨던 것이로군요? 한데 저 그림은 왜 보관하고 계신 건가요? 소인 알기로는 몽유도원도 같습니다만.”

안견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의심의 바람이 다시 그의 마음을 배회했지만 애써 억누른 채 대답했다.

“넌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그렇지? 몽유도원도가 맞다. 안평 어르신과 죽마고우처럼 즐기던 시절 그렸다. 어느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셨다 하시더구나. 꿈 얘기를 그대로 화폭에 펼쳐 보였더니 뛸 듯이 기뻐하셨지. 수성궁에 걸려 있던 걸 회수해 내가 여태 보관하고 있다.”

상대 기색을 차분히 살피던 청년이 속삭였다.

“비록 탱화를 그렸지만 소인 아비 또한 화공인지라 몽유도원도 얘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저 그림을 보며 그것이겠거니 짐작해 봤을 뿐입니다.”

청년을 지긋이 바라보던 안견이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미 아득한 옛 얘기다. 거문고나 한 번 더 타주겠느냐? 그럼 내 수성궁 시절 얘기 한 자락 펼쳐 보이마.”

수성궁의 흥망성쇠

인왕산 자락 수성동 계곡 풍경을 담은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의 한 부분이다. [위키피디아]

인왕산 자락 수성동 계곡 풍경을 담은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의 한 부분이다. [위키피디아]

인왕산 자락 경치 좋은 계곡에 터를 잡은 수성궁은 한양의 명소였다. 문종이 승하하고 여러 대군이 실권을 다투며 각축전을 벌이던 시절, 초반 승기를 잡은 안평대군은 경복궁 옆 이 절경에 수성궁을 조성하고 권력을 마음껏 뽐냈다. 비록 수양대군이 무사를 양성하며 안평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병권을 틀어쥔 김종서가 왕실 후원자로 있는 한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안평은 무력이 아닌 문화의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고 싶어 했다. 왕실을 보호할 튼튼한 갑옷으로서 무장들을 제대로 예우해 주면 세상엔 문무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균형이 찾아올 거라 믿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그의 최대 패착이 됐지만, 풍류에 도취된 안평은 다가오는 위험을 정확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수성궁은 날마다 미어터지는 방문객으로 북적였다. 문화계 인물을 접대하고 그들과 연회를 즐기던 본당이 있고, 높은 담장에 가려진 비밀스러운 내당이 따로 존재했다. 내당은 동재와 서재 두 건물로 이뤄졌다. 수성궁 건립 초기 텅 비어 있던 동재와 서재는 안평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차츰 사람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내당은 금남의 장소였다. 안평은 여염집 처녀 가운데 재색이 있는 소녀를 선발해 내당에 가두고 마치 궁녀처럼 훈련했다. 그녀들은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당악과 향악을 두루 익혔으며 전문적으로 시문 창작을 교육받았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내당에선 달마다 동재와 서재 사이에 기예 경연이 벌어졌다. 두 재의 ‘궁녀’들은 상대를 꺾고자 늘 피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놀랍게도 안평은 수성궁 궁녀 그 누구와도 동침하지 않았다. 그는 수성궁을 세속과 완벽히 분리된 순수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했고, 그 엄격한 잣대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했다. 수양대군의 반격으로 종묘사직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됐을 때조차 안평은 수성궁 내당만큼은 끝까지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수성궁의 몰락은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시작됐다.

“김진사라는 인물이 수성궁을 무너뜨렸다는 말씀이신가요?”

청년 악공의 질문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안견이 손가락으로 거문고를 가리켰다. 상대 의중을 간파한 청년이 거문고를 가져와 줄의 힘을 알맞게 조이더니 슬픈 계면조 연주를 시작했다. 한참을 연주에 심취해 있던 안견이 입을 뗐고 그와 동시에 연주도 멈췄다.

“난 네가 진짜 듣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안다. 이 나이쯤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많지. 그냥 듣기만 해라. 김진사를 수성궁에 끌어들인 게 바로 나였다. 왜 그랬느냐고? 네가 짐작하는 대로다. 난 수양대군이 심은 간자였다. 대꾸할 필요 없다. 네가 안다는 걸 이미 다 아니까. 널 어떻게 할 생각이었다면 벌써 네 목은 날아갔겠지? 수양의 제안은 별것 아니었다. 수성궁 내당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거였지. 하지만 내가 직접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으냐? 수양이 수족처럼 부리던 김진사란 젊은이가 퍼뜩 떠오르더구나. 수완 좋은 그 친구라면 안평 어르신을 어찌어찌해서 내당까지 들어갈 수 있으리라 여겼거든. 어느 날 귀한 화첩 하나를 손에 들려 김진사를 수성궁에 심부름 보냈다. 내가 한 일이라곤 딱 그거 하나였어! 안평 나으리를 해코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심이다. 그때는 수양대군이 그토록 잔인한 일을 벌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김진사의 위험한 사랑

아무 말 없이 거문고를 내려다보던 청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수양대군의 사람이라는 그 김진사라는 젊은이, 어떻게 수성궁을 몰락시켰는지요?”

“김진사가 수성궁 본당 거실에서 내가 보낸 화첩을 안평 어르신께 전달할 때, 하필 내당 동재의 궁녀 하나가 차 심부름을 하러 나와 있었다고 한다. 이름은 운영이라고 했지. 그 짧은 순간에 두 젊은 남녀가 정분이 나버렸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지. 김진사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운영이와 밀회를 이어갔다. 심지어 사다리를 이용해 동재 안까지 침범하기도 했다지. 이건 다 훗날 들은 얘기다. 김진사를 안평 어르신께 소개한 죄로 난 다시는 수성궁에 들어갈 수 없었거든.”

“밀회는 필경 오래지 않아 발각됐을 텐데, 어쩌다 수성궁 전체가 무너졌는지요?”

“안평 어르신의 자비심 때문 아니겠느냐? 김진사와 운영을 문초하던 대군께서 사람의 타고난 욕망을 누구도 어쩌지 못함을 깨달으시고 수성궁 내당 문을 열어 궁녀들을 내보냈다고 들었다. 곧이어 본당 연회도 시들해졌고, 마침내 수양대군의 세상이 찾아왔지.”

한참 동안 청년을 뜯어보고 있던 안견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알고 있던 사실과 많이 다르더냐?”

청년이 대답 없이 긴 한숨을 내쉬자 안견이 다시 물었다.

“이게 내가 아는 전부다. 이제 네 정체를 말해 주겠느냐? 넌 필시 수성궁과 관계된 자임에 틀림없다. 누구냐, 넌?”

가늘게 흘러내린 청년의 눈꼬리가 꿈틀대다 멈췄다. 청년이 속삭였다.

“그 거짓말을 믿어드리지요. 대신 김진사와 운영 사는 곳을 알려주셔야 합니다. 꼭 그래주시리라 믿습니다.”

소매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는 청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안견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나이에 내가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그 칼만 우선 거두어라. 더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김진사를 수성궁에 들여보낸 일은 지금도 후회막심이구나! 나 같은 화공 따위가 세상 일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느냐?”

대를 이은 복수

젊은 악공 한 명이 거문고갑을 등에 지고 용산 담담정 터에 나타난 건 이른 아침 햇살이 담장에 비껴들 무렵이었다. 오래전 집주인이 바뀐 담담정은 한때 안평대군이 자신의 서재 겸 별장으로 쓰던 장소였다. 초로의 집주인 부부와 마주한 악공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초면에 불쑥 찾아와 송구합니다. 상주 출신 악공 조묵금이라 합니다.”

묵금을 노려보던 집주인 사내가 마루에 자리를 내주며 물었다.

“집은 넓지만 외동딸을 막 분가시킨 터라 가사를 돌볼 손조차 부족합니다. 식객을 두기엔 힘에 부치는데, 어인 일로 찾아오셨는지?”

거문고갑을 내려놓고 집안 구석구석을 훑어보던 묵금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제 저녁 가회방 안견 선생 댁에서 묵었습지요. 밤을 지새우며 옛이야기를 나눴는데 김진사 어른을 언급하시더군요. 호기심에 이리 찾아왔습니다.”

김진사로 불린 집주인 사내가 흠칫 놀라 뒤에 서 있던 아내를 돌아본 뒤 천천히 마루에서 몸을 빼냈다.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묵금이 다시 말했다.

“허깨비 같은 가노들 부르실 생각은 마시지요. 부질없는 짓입니다. 한데 운영 낭자님께선 참 대단하시군요. 한때 자신을 키워준 주군의 별장을 차지할 생각을 다하셨습니다그려?”

잔뜩 긴장한 중년의 운영이 남편 앞으로 나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정체가 뭐냐? 안견 늙은이와는 소식 끊은 지 이미 오래다. 뭔가 오해가 있다면 말로 풀어주겠지만, 묵은 원한이라도 있거들랑 그냥 삭이고 조용히 떠나라. 너처럼 어린 것한테 당할 내가 아니다.”

거문고갑에서 장검을 꺼내 손에 움켜쥔 묵금이 속삭였다.

“수성궁을 탈출한 유일한 생존자 초란을 기억하시는지요?”

가벼운 몸놀림으로 안방으로 이동한 운영 역시 장검을 손에 쥐고 나왔다. 그녀가 묵금을 노려보며 말했다.

“서재의 초란을 어찌 잊었을까?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냐? 혹시 네 놈 어미더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묵금이 초식을 밟으며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가 신음하듯 말했다.

“서재에는 초란, 동재에는 운영, 안평대군의 두 날개셨다지요? 그리 총애가 깊었건만 어찌 대군과 동료들을 배신하신 겁니까? 저따위 허약한 사내 때문이었습니까?”

검을 묵금의 목을 향해 겨눈 운영이 스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초란과 나, 우리 중 하나는 어차피 버려질 운명이었다. 피 말리는 경쟁도 지겨웠거니와, 대군이 초란이년을 편애하는 꼴은 차마 봐줄 수가 없었지. 그래! 김진사 저 사람 꾐에 넘어갔다. 뭐 어쩌겠느냐? 그리도 지독히 문무를 익혔건만 내게 돌아오는 게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제값을 쳐줄 다른 주군을 찾는 게 이치에 닿지 않겠느냐?”

몸을 솟구친 묵금이 칼의 방향을 틀어 김진사를 향했다. 칼이 김진사의 배를 가르고 오른쪽으로 호를 그으며 한 회전을 마감했다. 그사이 남편을 보호하려는 운영의 칼은 뒤미처 허공만을 가른 채 위로 솟구쳤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운영은 더는 운검하지 않았다. 묵금의 칼이 빠르게 그녀 목을 베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최후의 생존자

젊은 남녀 사이의 흔한 애정사라 여긴 안평대군은 김진사를 죽이고 사건을 조용히 덮을 요량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소문이 밖으로 퍼져 내당의 정체가 탄로 나는 걸 몹시 두려워했다. 내당의 동재와 서재는 재예만을 익히는 평범한 궁녀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육성한 정예 살수(殺手)들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예능에 도취해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평에게도 숨은 꿍꿍이는 있었다. 그는 자꾸 무력을 키우던 수양에 맞설 비밀스러운 호위 조직을 원했다. 하지만 형처럼 품위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기에, 궁여지책으로 급조한 게 수성궁 내당의 동재와 서재였다. 내당 궁녀들은 평소에는 기예를 두루 갖춘 궁녀로 살았지만, 주기적으로 혹독한 무예 훈련을 받으며 자객으로서 가혹한 경쟁에 내몰려야 했다.

안평대군이 운영과 밀회를 나누던 김진사를 잡아들여 내당 뜨락에서 문초하던 밤, 운영의 표정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느긋했다. 흥분한 건 그녀의 최대 경쟁자이자 서재의 우두머리였던 초란이었다. 초란은 내당의 화근인 운영마저 함께 죽여버리자고 강경하게 요청했다. 운영의 재주를 아끼던 대군은 새벽까지 망설이며 판결을 미루고 미뤘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 일이 벌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궁수들이 내당 담장 위에서 화살을 난사하기 시작하자 잘 훈련된 궁녀들조차 대오를 잃고 삽시간에 오합지졸이 돼버렸다. 김진사와 운영만을 남기고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궁녀가 피신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사살됐다. 안평대군을 몸으로 경호하며 본당 쪽으로 급히 이동한 초란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내당 궁녀를 모두 잃은 대군은 화병으로 한 달을 앓아누웠다. 하지만 체통을 중시하던 그로선 그 사실을 세상에 밝히고 형과 싸울 명분이 궁색했다. 무엇보다 몰래 살수를 길렀다는 오명을 뒤집어쓸까 전전긍긍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초란은 대군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대군이 하사한 거문고와 보검 한 자루만 지니고 고향 같던 ‘수성궁’을 떠났다. 이별에 임해 오열하던 그녀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대군에게 이런 말로 하직 인사를 대신했다.

“부디 옥체 보존하셔서 성군이 되옵소서. 그 무렵 기억나시거든 소녀를 다시 불러주소서. 설령 부르지 않으신다 해도 이 충심만은 결코 변치 않으리다.”


#안평대군 #수양대군 #몽유도원도 #태평성대 #신동아

* 이 작품은 작자 미상의 ‘운영전’ 일부를 모티프로 창작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1년 12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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