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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까먹으면 어떤가, 내가 책임지겠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㉞]

“투자 안 하면 후배들은 언제 1등 해 보겠노” 이건희 승부수 적중하다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1조 까먹으면 어떤가, 내가 책임지겠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㉞]

  • ● 분수령 된 16메가 D램 양산 라인
    ● 세계 최초 12인치 공장 만든 사연
    ● 황창규로부터 들은 다른 앵글의 증언
    ● 투자 결정 못하는 상황서 들은 질타
    ● 진대제도 어떤 기술 유리할지 몰랐다
2011년 9월 22일 이건희 회장이 경기 삼성전자 반도체 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임직원 대표로부터 16라인에서 생산된 ‘1호 반도체 웨이퍼’를 전달받고 있다. [삼성전자]

2011년 9월 22일 이건희 회장이 경기 삼성전자 반도체 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임직원 대표로부터 16라인에서 생산된 ‘1호 반도체 웨이퍼’를 전달받고 있다. [삼성전자]

생전의 이건희 회장이 입버릇처럼 말했듯 “반도체는 철저하게 타이밍 사업”이다. 말이 쉽지 타이밍을 계산할 때 넣어야 하는 변수가 너무 많다. 특히 반도체는 완제품(세트)이 아닌 부품이다. 반도체 자체 혁신은 물론 전 세계 완제품들의 현재와 그 완제품이 변화, 발전, 진화해나갈 미래까지 고려해야 한다. 거의 ‘신의 경지’나 다름없는 판단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가자” 한마디로 끝낸 이건희 회장

8인치 웨이퍼를 생산하는 기흥 5공장 준공식이 1993년 6월 열렸다. [삼성전자]

8인치 웨이퍼를 생산하는 기흥 5공장 준공식이 1993년 6월 열렸다. [삼성전자]

삼성전자는 1993년 메모리 부문 매출 세계 1위로 뛰어올랐다. 이 신화창조의 분수령이 된 계기는 8인치를 적용한 16메가 D램 양산 라인(5공장)이었다. 삼성전자가 8인치에 뛰어든 1990년과 1991년, 세계 D램 시장에는 또 다시 불황이 닥쳤다. 6인치로 앞서 달리며 세계 선두를 주도하던 일본 업체들도 투자 규모를 줄이고 신규 투자를 주저했다.

당시만 해도 세계 표준은 6인치였다. 8인치의 경우 도시바, NEC, 히타치도 파일럿(시험 운용) 라인만 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신경영이 한창이던 1993년 6월 D램 업계 최초로 8인치 양산 라인인 5공장을 준공한다. 5공장은 월 2만장의 8인치 웨이퍼로부터 16메가 D램 300만 개를 생산할 수 있는 세계 최대 D램 생산라인이었다.

이 회장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1990년과 1991년 극심한 불황을 겪던 시장은 인터넷 확산으로 PC 열풍이 불면서 다시 호황 사이클로 급반전됐다. 삼성전자는 1994년 1조6800억 원, 1995년 3조5400억 원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 이익을 낸다. 1995년의 경우 메모리 반도체 이익만 2조7000억 원에 달했다.

이 회장의 공격 경영은 8인치에서 끝나지 않았다. 세계 최초로 12인치 공장을 짓게 된 것이다. 권오현 전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삼성전자가 1993년 처음으로 D램 1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일본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펀더멘털(경제 기초)이 강하고 원천 기술도 대단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일본과 달랐던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투자 타이밍이었습니다. 삼성은 불황 때 호황 국면이 앞으로 오겠다고 내다보고 과감하게 투자를 늘린 반면 일본 기업들은 호황일 때 투자에 나서 제품을 양산할 때쯤 되면 불황을 맞는 엇박자를 계속 연출했습니다.

웨이퍼 크기를 6인치에서 8인치로, 8인치에서 12인치로 늘릴 때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일본은 삼성이 선도적으로 치고 나가면 6개월에서 1년 정도 있다가 쫓아왔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선발주자인 삼성이 시장 대부분의 수익을 거둬간 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면 누구나 그 타이밍을 알 것 같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지요.

웨이퍼 인치를 늘리는 게 좋다는 건 다 알고 있지만 우선 투자액수가 너무 크고 또 새로운 생산 시설을 운영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들 앞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르모트(실험용 쥐)가 되는 건데 굳이 하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거든요. 남이 하는 거 보면서 뒤쫓아 가는 게 쉽지, 남보다 앞서 나가기는 어렵잖아요. 그런데 이건희 회장은 앞서가려면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책임은 내가 다 진다, 과감하게 투자하라’고 결정하셨으니까요.

특히 12인치의 경우는 삼성이 세계 처음으로 가게 된 겁니다. 다른 회사들도 생각은 하고 있었겠지만 그런 과감한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앞서 갔다가 여러 시행착오를 다 겪게 될 텐데 그렇게 위험한 선택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두 번째로 가는 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씀드리면 회장님은 ‘가자’ 이 한마디로 끝내셨습니다.”

이번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소장을 지낸 이문용 전 부사장 말이다.

“4인치, 5인치, 6인치, 8인치까지 갈 때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가장 큰 고비는 12인치로 갈 때(2001년)였습니다. 9·11 테러가 있던 해였고 미국 마이크론이 영업 손실률 24.8%를 기록하는 등 대부분 업체들이 어려웠거든요.

삼성전자는 7.9%라는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긴 했지만 12인치 결정은 이건희 회장의 뚝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이듬해 대부분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손실을 기록했는데 삼성전자는 30.8%라는 영업이익률을 기록해서 12인치로의 결정이 옳았음을 입증했거든요. 8인치에서 12인치로 갈 때는 세계 처음이었고 워낙 크기가 커지는 것이어서 그야말로 공장 생태계를 다 바꿔야 하는 변화였습니다. 모든 설비를 다 바꿔야 했기 때문에 우선 장비 업체들을 설득하고 이끄는 리더십부터 만만치 않았습니다.

웨이퍼 공정이란 게 막을 씌우고 산화 처리를 하고 사진을 찍고 표면을 깎고 이온을 주입하고 다시 표면을 처리하는 8대 공정이 있지 않습니까. 인치를 늘리면 공정 분포, 치밀도, 균일도 등이 함께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바로 불량이 나와 버리지요. 내부 실무진들로서도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고 장비 업체들로서도 왜 굳이?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자기들은 그런 도전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이들을 끌고 가는 리더십이 중요한데, 이럴 때 오너가 ‘1조 까먹으면 어때, 내가 책임진다, 해 보자’ 하면 다 같이 돌진하는 힘이 생기죠.”

극심한 닷컴불황에도 “12인치로 가자”

무엇보다 대단했던 건 이 회장이 12인치로 가자고 했을 당시 시장 상황은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극심한 불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때였다는 점이다. 정인성의 책 ‘반도체 제국의 미래’에는 그런 상황이 잘 정리돼 있다.

엘피다 로고. 일본 유일의 D램 반도체 회사였지만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2013년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인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엘피다]

엘피다 로고. 일본 유일의 D램 반도체 회사였지만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2013년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인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엘피다]

2000년 10월 닷컴 버블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불황이 닥쳐왔다. D램시장은 겪어보지 못한 레벨의 시장 붕괴를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버블이 절정일 때 64메가비트당 20달러였던 D램 가격은 2001년 2월 3.8달러까지 하락해 80%가 넘는 대폭락을 하게 된다. 2001년에는 9·11 테러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300㎜(12인치)로의 전환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일단 수조 원의 장비가 투입되어야 했다. 그리고 한 번 가동하면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 2001년 9월 몇몇 언론을 통해 재무적 압박에 시달리던 일본의 엘피다(NEC 히타치 미쓰비시가 세운 일본 유일의 D램 반도체 회사.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2013년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인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300㎜로의 전환을 9개월 늦추겠다고 발표했다.

본래 엘피다는 2001년 12월에 장비 반입을 시작해 2002년에 양산 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장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보고 양산 일정을 늦추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한 달 뒤인 2001년 10월, 삼성전자는 300㎜ 웨이퍼를 기반으로 한 신형 120나노 기반 D램 양산을 시작했음을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이 D램의 칩 당 용량은 무려 512메가비트로, 다른 회사들은 아직 개발조차 완료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삼성전자의 기술우위와 합쳐진 신형 공장은 그야말로 파괴적인 위력을 보여 주었다. D램 시장이 호황이었던 2000년에는 모든 회사가 혹자였지만, 최악의 불황이었던 2001년에는 삼성전자만 혹자를 유지했다. 다른 회사들이 불황의 영향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던 2002년에는 30%대 영업이익률로 독주했다.


일본 엘피다는 시장 상황이 좋아지고 나서야 뒤늦게 300㎜ 레이스에 뛰어들었으나, 신형 300㎜ 공장은 2003년 1월에나 가동될 수 있었다. 이미 삼성전자는 2001년 말 이후부터 압도적 원가 및 물량을 통해 반등한 메모리 가격의 이익을 누리며 체급을 더욱 키우고 기술을 개발한 뒤였다.

2002년 엘피다의 영업이익률은 –37.7% 정도였지만, 삼성전자의 영업이익률은 무려 30.8%에 달했다. 삼성전자가 300㎜로 전환하지 않고, 엘피다가 했다면 이 갭은 상당히 좁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대로 선두 회사가 모험을 하고 2등 회사가 안정을 추구한 셈이었다. 그 대가로 엘피다는 정말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엘피다가 흑자 전환하게 된 것은 2004년의 일이었다. 물론 이후 다시 적자가 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황 사장, 당신은 1등도 해보았고…”

황창규 전 사장은 이 회장의 12인치 결정에 대해 다른 앵글의 증언을 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이 회장이 “후배들을 위해 1등의 기억을 전수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다.

“삼성 반도체의 성취는 이건희 회장의 정확한 판단과 전폭적인 지원을 초석으로 삼았지만 이 회장의 리더십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혜안이 풍부하다는 말로만 설명할 수 없는, 뭔가 더 있다고 봅니다.

제가 겪은 대표적인 에피소드 하나가 바로 12인치 투자로의 과감한 결정이었습니다. 2001년은 그야말로 ‘50년 정보통신(IT) 역사 중 최악의 해’로 불릴 정도로 한치 앞도 모르는 위기의 시기였습니다. 지난 몇 년간 최대 호황을 누렸는데 이제 적자가 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퍼지고 있었으니까요. 그 와중에 제 어깨를 짓누르던 또 하나의 고민이 있었으니 이미 개발을 완료한 12인치(300㎜) 웨이퍼를 시장에 내놓을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당시엔 8인치(200㎜)가 상용화되고 있었습니다. 한 번에 많은 제품을 찍어 단가를 낮춰야 하는 메모리 반도체 특성상 12인치는 8인치보다 경쟁력이 상당했지만 초유의 불황이 닥친 상황에서 조 단위 투자를 하기에는 무리였으니까요.”

그러던 그는 이 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다시 황 전 사장 말이다.

“회장께서 ‘요즘 여러 가지로 어렵지? 연구, 개발은 잘 진행되고 있는가’ 간단한 인사말 뒤에 바로 다른 나라 12인치 개발 상황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당시에는 지멘스가 독일 정부 도움을 받아 12인치 웨이퍼의 일부 양산 투자를 막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말씀드리며 ‘독일이 우리보다 조금 앞서 투자가 일어날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회장님은 바로 우리 개발 상황을 물으셨어요. 저는 양산 준비는 거의 했는데 최악의 불황 때문에 선뜻 투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강한 톤의 질타가 쏟아졌습니다.”

어떤 질타였나요.

“‘황 사장, 당신은 지금까지 큰 목표를 향해 달려서 1등도 해보았고 그렇게 해서 지금 자리까지 온 거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머뭇거리고 투자를 안 하면 후배들은 언제 1등 해 보겠노’라고 말하면서 본사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양산 투자에 대한 제반 준비를 마치고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죠. 이 회장은 ‘서둘러야 할 것’이라면서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황 전 사장은 “이후 비서실과 전자 본사를 뛰어 다니며 ‘회장께서 지시했다, 내가 할 테니까 믿고 투자를 풀어 달라’고 해 12인치 웨이퍼 양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그렇게 해서 2004년 12인치 웨이퍼 공장 라인이 경기 화성에 지어져 가동하게 됩니다. 회장님이 직접 오셔서 직원들과 식사도 하고 투어도 하셨습니다. 제 방 회의실까지 들어오셔서 ‘애로사항 없나? 인재들은 잘 확보했고?’ 이러셨지요. 늘 그러셨듯이 항상 ‘인재 구하라’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12인치 웨이퍼 투자 결정을 두고 언론에서는 ‘과감하지만 위험한 투자’라는 비판 일색이었습니다. 결국 삼성전자는 시장을 치고 나갔고 이후 ‘성공의 수레바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12인치 생산 라인은 화성 사업장(9개)을 시작으로 기흥, 평택, 미국 오스틴, 중국 시안까지 총 17개로 늘었습니다. 세계 최고 기술과 제조 생산능력을 갖춘 압도적 모습으로 한국경제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 거죠.”

스택이냐 트랜치냐

이번에는 이 회장이 기술 추적 과정에서 내렸던 두 번째 결정적 선택, 스텍(stack)과 트렌치(trench)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반도체 산업사(史)를 보면 어떤 기술을 선택했는지가 기업의 성패를 결정짓는 경우가 있다. 스택과 트렌치도 그 경우다. 1989년이 되면서 D램의 크기가 4메가비트를 넘자 D램의 저장소 형태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D램은 전부 하나의 평면 위에 트랜지스터와 D램 저장소를 함께 늘어놓는 방식이었다.
1메가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4메가부터는 집적도가 갑자기 올라가다 보니 손톱만한 칩 평면 위에 모두 늘어놓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밀도를 높이려면 D램 저장소를 복층으로 해야 했다. 여기서 나온 게 스택 방식이냐, 트랜치 방식이냐 하는 것이었다.

건축도 그렇지만 칩도 복층으로 만들려면 위로 세울 수도 있고 지하층을 팔 수도 있다. 스택은 위로 쌓는 방식으로, 트렌치는 지하로 파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셀 개수를 늘리는 것이다. 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트렌치가 안전하기는 했지만 공정이 까다로워 경제성이 떨어졌고 무엇보다 회로가 보이지 않았다. 스택은 작업하기 쉽고 경제적이었지만 품질이 불안정했다.

장단점이 엇갈리다 보니 선발 업체들의 선택도 나라별, 회사별로 갈렸다. 미국 회사들은 대부분 트렌치를 택했다. 일본의 경우 도시바와 NEC는 트렌치를 선택했으며 히타치, 미쓰비시, 마쓰시다, 후지쯔는 스택을 채택했다. 삼성도 고민이 깊었다. 일단 둘 다 해보기로 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미국팀이 트렌치, 한국의 기흥팀이 스택을 채택해 진행했다.

이 연구의 한 가운데에 진대제 전 사장(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있다. 진 전 사장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IBM 등에서 일한 후 실리콘밸리 삼성반도체연구소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트랜치와 스택 두 가지 방식으로 4메가 연구를 진행한다. 그의 말이다.

“4메가 D램은 1메가 D램보다 집적도는 4배로, 구조적으로는 2차원에서 3차원으로 가는 최초의 칩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택이냐 트렌치냐 하는 공정 방식은 어느 게 유리한지 당시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제품 안정성이나 경제성 외에도 엔지니어들의 상상력과 근성, 심지어 철학까지 연결된 문제라 각 사에서 온갖 창의적 방법이 동원돼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미국 삼성연구소에서 4메가 D램을 개발할 때 2년여 동안은 IBM에서 배운 트렌치 방식을 썼습니다. 1메가도 트랜치 방식으로 해서 성공했기 때문에 4메가 공정도 그렇게 한 것이었지요. 1987년 9월 한국으로 돌아와 기흥 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여담이지만 당시 기흥은 1공장, 2공장이 가동되고 있었고 사무동과 연구동만 덩그러니 서 있어 지금처럼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단지의 위용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떻든, 기흥에 와서는 스택 방식으로 설계를 바꿔보았습니다. 때마침 일본의 한 두 개 회사가 스택으로 바꾸고 있다는 정보가 들려와 어쩌면 스택이 더 유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술자로서의 육감이 강하게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진 전 사장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며 무모한 도전에 뛰어들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다시 그의 말이다.

“보통 설계를 바꾸려면 1년 정도는 족히 걸리는데 두 달 만에 바꾸는 강행군이다 보니 기술자들이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모하고 겁 없는 도전이었지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한 달 만에 스택 방식에서 4메가 동작 칩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신천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흥분에 모두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스택이 훨씬 쉽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트렌치는 아래로 구멍을 뚫기 때문에 구멍 속을 들여다볼 수 없어서 문제가 생기면 거의 속수무책이었는데 스택은 외곽을 볼 수 있어서 다음 공정을 처리하는 데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적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1988년 1월 완전 동작 칩이 나온 겁니다. 개발 당사자였던 저희들 스스로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자존심 문제로 비화

이제 스택 방식을 채택하면 되는 것인가.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스택 방식 4메가 완전 동작 칩이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 팀에서 ‘신중하자’고 의견을 보내온 것이었다. ‘시제품 단계에서는 알 수 없으니 나중에 양산 단계에 가서 둘을 비교하자’며 미국팀은 트렌치 방식을 고수하겠다고 했다. 사실 미국팀의 판단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각각의 장단점이 뚜렷했고 여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섣불리 단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반도체 선발 업체 사이에서는 4메가 양산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도시바는 1985년 11월 시제품을 발표하면서 이미 공장을 착공한 상태였고 1986년 개발을 끝낸 히타치와 미국 TI도 양산을 서둘렀다.

삼성도 하루 빨리 4메가를 개발해야 했다. 이 와중에 공정 방식을 결정하지 않고 내부 논쟁만 하는 건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택과 트렌치는 어느새 기흥팀과 미국팀의 자존심과 생존이 걸린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었다. 만약 4메가 개발이 스택으로 결정될 경우 미국 연구소는 존재 이유까지 의심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회사 생각은 안 하고 기술자들이 서로 아집을 부리고 있다는 뒷말까지 터져 나왔다. 드디어 이건희 회장이 칼을 뽑아들었다.



신동아 2022년 8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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