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가 4월 4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제64회 그래미 어워드’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이브]
코리아 프로그램 20주년 행사를 기획하면서 북한과 K팝에 포커스를 둔 이유가 있다. 한반도 관련 이슈 중 미국 학생과 일반 대중이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2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인 만큼 의례적인 학술회의보다는 세간의 관심이 큰 주제로 학자, 학생, 정책가, 아티스트가 모여 토론하자는 의도였다.
콘퍼런스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온라인 등록을 시작할 때부터 참가하려는 학생과 시민들로 열기가 넘쳤다. 행사 당일에는 연구소뿐 아니라 스탠퍼드대 홍보팀에서도 트윗을 했다. 콘퍼런스에 참석한 엑소의 멤버 수호를 보려는 학생들의 열의는 학술회의에선 보기 어려운 장면을 연출했다.(참고로 수호는 공연을 한 게 아니라 발표를 하고 패널들과 K팝에 대해 토론했다.) K팝은 이미 미국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60분(60 Minutes)’의 관심은 이와 같은 미국 내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필자가 미국 대학원에 공부하러 온 지 내년이면 40년이 된다. 미국 대학에서 한국을 연구하고 가르친 시간도 30년을 넘겼다. 스탠퍼드대에 한국학 프로그램을 설립한 지도 20년이 됐다. 그간의 시간을 반추해 보면 20주년 행사에서 목도한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환호와 관심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40년 전의 한국은 빈곤에선 벗어났지만 여전히 독재정권하에서 몸부림치던 개발도상국이었다. 30년 전에는 민주화의 첫걸음을 떼면서 한국을 외국에 알리겠다는 목적으로 국제교류재단이 설립된 시기였다. 20년 전에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의 위협이 커지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때였다. 지금처럼 K팝, K드라마 등 한국 문화에 미디어와 학생, 일반인의 환호와 관심이 큰 적은 없다.
K팝, K드라마가 대표하는 K컬처의 소프트파워는 지속될 수 있을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선진국을 넘어 문화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아니면 K컬처에 대한 관심은 일시적인 팬덤 현상으로 그치고 말 것인가. 북한의 위협으로 인해 발생한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소프트파워로 인해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바뀔 수 있을까.
전쟁, 개발 독재, 민주화, 반미주의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미군이 참전한 6·25전쟁이다. 내가 유학을 왔던 1980년대에도 미국의 TV 채널에선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매시(M.A.S.H)’가 방영 중이었다. 경기 의정부시에 위치한 육군 이동 외과병원에 있는 군의관 및 간호장교 간의 일상적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풍자 코미디다.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방영됐는데 미국에서는 지금도 사상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로 꼽힌다. ‘매시’에 나타난 한국 묘사는 미국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정형화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는 가난한 나라이자 전쟁으로 피폐해진 모습으로 미국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됐다.개발독재하에서 이뤄진 경제성장도 한국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줬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등장했고, 한국산 의류신발 등 공산품에 이어 현대자동차의 포니, 삼성전자의 흑백TV 등이 미국 시장에 상륙했다. 학계에서도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다. MIT(메사추세츠공대) 교수였던 앨리스 암스덴(Alice Amsden)의 저서 ‘아시아의 다음 거인(Asia's Next Giant)’은 한국이 일본의 뒤를 이어 아시아의 경제대국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하지만 미국 내 대체적 견해는 한국이 일본을 뛰어넘는 아시아 경제의 리더가 되기보다는, 선두인 일본의 모델을 따라 발전하는 소위 ‘기러기 편대’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일등국가 일본(Japan as Number One)’이라는 책으로 학계의 스타가 된 하버드대의 에즈라 포겔(Ezra Vogel) 교수는 한국을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4마리의 작은 용(Four Little Dragons)’이라고 명명했다. 역사학자인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을 주장하는 연구서를 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시민 학살에 대해 미국의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한국 정치와 사회운동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해 미국에서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함께 발생한 반미(反美)운동은 미국 지식사회뿐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필자도 한국의 반미주의를 설명하는 논문을 여럿 발표했다.
미국 내 진보적 지식인들은 동맹국인 한국에서 발생한 반미 현상을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의 귀결로 이해했다. 다른 한편에서 6·25전쟁 참전 용사들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미국에 대해 한국인들이 ‘양키 고 홈’을 외치는 데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시카고대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은 국내 진보적 학자들이 반미적 시각을 갖게 된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후 한국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룬 대표적 국가로 인정받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G20의 구성원이 됐고 공적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신했다. 포니는 제네시스로, 삼성전자의 흑백TV는 세계 최고의 TV 브랜드로 성장했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한국은 1970년대 이후 진행된 ‘제3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민주화를 이룬 대표적 국가로 꼽혔다. 1945년 이후 비교적 단기간에 걸쳐 경제정치적 발전을 이룬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그만큼 엄청난 일이다. 이러한 변화에 걸맞게 미국 대중에게 비치는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도 점차 긍정적으로 변해 갔다.
이와 같이 긍정적 변화와는 반대로, 미국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북한 뉴스는 한반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했다. 필자가 1992~2003년 사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약 5000건의 한반도 관련 기사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한국 관련 기사는 주로 경제(41%)에 초점을 맞춘 반면 북한 관련 기사는 안보(65%)에 집중됐고, 인권 문제(9%)가 그 뒤를 이었다. 남북한을 합한 전체 기사를 기준으로 봐도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30%로 단연코 가장 많이 다룬 주제였고, 당연히 매우 부정적인 톤으로 실렸다. 미국 언론의 보도량과 톤은 북한은 물론 한반도 전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저서 ‘하나의 동맹, 두개의 렌즈’ 참조)
북핵과 인권
1993년 이른바 첫 번째 북핵 위기가 발생한 후 미국 내에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특히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따른 안보 위협에 관해 우려가 고조됐다. 이전까지 북한은 그저 ‘허밋 킹덤(Hermit Kingdom)’의 가난한 독재국가로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이젠 한반도는 물론 미국에 대한 안보 위협으로 여겨졌다. 이에 워싱턴뿐 아니라 미디어, 일반 대중도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실제로 한반도 관련 강연이나 세미나에서도 늘 북한 문제는 한국 문제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북 정상회담이 이뤄지면서 북한에 관한 미국 내부의 관심은 최고조에 이르렀다.북핵 못지않게 미국의 젊은이 사이에서 관심이 큰 분야는 북한 인권 문제였다. 동부와 서부를 막론하고 수많은 미국 대학이 ‘북한 인권의 밤’을 열어 탈북자나 전문가를 초청해 정기적으로 강연회와 세미나를 조직했다. 북한 인권 문제 역시 미국 내에서 한반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 북한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줄었지만 북핵과 인권은 여전히 미국 일반 대중의 중요한 관심사로 남아 있다.
북한에 대한 관심이 꼭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으로 인해 소위 ‘코리아 리스크’ 또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생겼다. 해외자본이 한국에 투자할 때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때 쓰이는 말이다. 북한이 지속적으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고 국내외적으로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면 코리아 리스크와 디스카운트는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으로선 억울한 현실인 셈이다.
K컬처는 글로벌 현상
배우 송강호가 5월 28일(현지 시간) 제75회 칸 국제영화제 폐막식에 참석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뉴스1]
물론 K팝이나 K드라마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스포츠 등에서 코리언이 주목을 받았다. 박찬호·김병현·류현진으로 이어진 야구, 박세리·박인비·고진영으로 이어진 여자 골프는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경제·안보에서 스포츠로 다양화하는 데 기여했다. 프로야구에서 한국인 선수는 소수에 불과해 리그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반대로 여자 골프는 뛰어난 한국 선수가 너무 많아 LPGA가 KLPGA로 돼간다며, 시청률이나 광고 수입 면에선 외려 리그에 손해가 된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온다.
이에 비해 K팝, K드라마는 훨씬 더 광범위하게 미국 대중의 마음속에 파고들고 있다. 아직 백인 남성 등 이른바 미국 ‘주류사회’에 어필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K컬처가 단순히 일본이나 중국 문화의 아류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광풍과도 같았던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 이어 BTS가 빌보드 차트를 휩쓸었고, ‘기생충’의 봉준호와 ‘미나리’의 윤여정이 오스카에서 감독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넷플릭스에서는 수많은 한국 콘텐츠가 방영되고 있다. ‘Dynamite’ ‘Crash Landing on You’는 이제 많은 미국인의 일상 속에서 대화의 소재가 됐다.
이에 매료돼 한국어 학습 열풍도 불고 있다. 미국 대학의 캠퍼스에선 K팝 동아리가 생기고 (스탠퍼드대에도 30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XTRM 이라는 K팝 동아리가 있다), 대부분의 외국어 수강생 숫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한국어 수강생은 늘고 있다. US Modern Language Institute에 따르면 2006~2016년 사이 미국 대학에서 한국어를 듣는 수강자는 95% 증가했다. 이는 1000명 이상의 학생이 배우는 외국어 중 가장 돋보이는 증가세다.
K컬처의 미국 상륙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1990년대 말 중국, 일본, 동남아에서 시작된 ‘한류’는 유럽과 남미 등 전 지구적으로 이미 그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오스카 수상 이전에도 칸 영화제에선 여러 편의 한국 작품이 수상을 했다. 올해도 박찬욱의 감독상, 송강호의 남우주연상 수상 등 한국 영화가 맹위를 떨쳤다. 한류의 불모지였던 인도에서도 K팝, K드라마의 인기가 치솟고 한국어를 배우려는 인도인이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지구적 흐름 속에 문화제국주의의 리더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도 K팝과 K드라마가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면 K컬처가 글로벌 현상이 되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필자도 K컬처의 인기를 의미 있는 현상으로 보고 2년 전부터는 한국학 수업에서 주요 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또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동안 넷플릭스 등을 통해 K드라마와 영화를 접하면서 그 나름 상당한 저력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박세리뿐 아니라 그 후배 격인 한국 여성 골퍼들은 꾸준히 LPGA를 제패했다. K컬처 역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계속 진화하면서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견인할 가능성이 보여 흥분을 감출 수 없다.
아시아적 정서에서 세계적 정서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
우선 K컬처가 성공한 이유는 한국의 특수성을 넘어 시대정신과 보편 이슈를 감성적으로 흥미 있게 잘 엮어낸 덕분이다. 초기 한류가 일본·중국 등 아시아적 정서에 부합했다면, K컬처는 세계적 정서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금융위기 이후 불평등, 이민과 난민, 과도한 경쟁주의 등이 전 지구적으로 우리 삶을 흔들고 있는 가운데 K컬처는 음악이나 스크린을 통해 이러한 이슈를 섬세하게 다뤘다. ‘기생충’은 사회의 불평등을 현실감 있게 보여줬다.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 현실을 목숨 건 경쟁 구도로 치환함으로써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서사를 만들었다. BTS는 ‘빌보드 200’ 1위에 오른 3집 앨범 ‘Love Yourself: Tear’의 ‘낙원’이라는 곡에서 “꿈이 없어도 괜찮아”라고 노래하며 무한경쟁시대 ‘아무나(Nobody)’로 살길 원하는 2030세대를 대변했다.
대중문화는 시대적 고민과 문제를 응시하고 이를 흥미롭게 재구성해 즐거움과 공감, 성찰을 적절히 제공해야 파괴력이 있다. 당대와 마주하는 삶, 정신, 가치를 구현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정서, 감성,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어야 한다. 비틀스, 핑크 플로이드, 퀸, 콜드플레이 등 영국 밴드들이 한때 세계 대중음악을 석권했던 까닭은 이들이 당대의 문제와 감성을 대변한 데 있다. 1950~70년대에 세계 영화계를 이끌었던 프랑스 영화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영화는 서구 사회의 변화된 개인, 가족, 사회에 대한 성찰이 두드러졌다. 이젠 한국의 영화, 드라마, 음악이 영국의 밴드, 프랑스의 영화처럼 21세기 시대정신을 반영하면서 글로벌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K컬처가 성공한 두 번째 이유로 글로벌 플랫폼을 적극 활용한 점을 꼽을 수 있다. K무비와 K드라마가 넷플릭스와 애플TV 같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던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오징어 게임’이나 ‘사랑의 불시착’ 같은 K드라마가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없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글로벌 시장에서 흥행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대중음악의 경우, 음반이 사라지고 음원 시장이 선도하는 플랫폼 시대가 열리면서 IT(정보기술) 강국 한국이 강세를 보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특히 빌보드라는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K팝을 세계 음악시장 정상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K팝 그룹은 브이 라이브(V Live)나 인스타그램 라이브(Instagram Live)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팬과 소통하면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K팝은 한걸음 더 나아가 AI(인공지능) 시대에 맞추어 메타버스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세 번째로 한국이 서구 민주주의나 권위주의 사회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와 시스템으로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K팝 특히 아이돌 그룹의 성공은 현란한 집단 퍼포먼스와 감성적인 음악 간 절묘한 결합의 산물이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경험한 혹독한 훈련과 엄청난 연습량을 통해 스포츠 못지않은 완벽한 집단 퍼포먼스를 구사한다. 이를 음악과 결합한 점이 글로벌 팬을 열광케 했다. 이러한 집단 퍼포먼스는 서구 사회에선 상상키 어렵고, 중국·북한 등 권위주의 사회에선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를 음악이나 예술로 승화시키긴 어렵다.
K팝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이수만 SM 총괄 프로듀서는 스탠퍼드 코리아 프로그램 20주년 행사에서 이를 ‘문화를 프로듀싱하는 컬처 테크놀로지(Culture Technology)’로 개념화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SM은 ‘캐스팅-트레이닝-콘텐츠 프로듀싱-마케팅’이라는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체계화한 프로듀싱 시스템, 문화 기술(CT)을 개발했다고 한다. 다른 기획사도 대동소이하다. 한국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BTS 활동 중단이 드러낸 문제점
5월 31일(현지 시간)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에서 네 번째)과 BTS 멤버들이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BTS 트위터 계정 캡처]
K컬처가 소프트파워로 자리 잡기 위해선 정부의 불필요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 정부는 K컬처 스타들을 정부 행사나 해외 공공외교에 활용할 유혹에 빠진다. 문재인 정부에서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을 평양에서 공연토록 한 것이나,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BTS의 공연 여부로 논란을 빚은 게 대표적 사례다. 글로벌 팬들은 레드벨벳이 독재자와 함께하는 데 대해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안티 페미’의 이미지를 가진 대통령의 취임식에 BTS가 공연할 가능성을 두고 팬클럽 ARMY(아미)의 불만도 컸다. 정부는 정치적 논란을 피하고 K컬처가 글로벌 무대에서 소프트파워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조용히 뒷받침해야 한다. 중국 정부가 공자학원을 통해 해외에서 소프트파워를 키우려다 외려 반중 정서만 키운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 섣부른 K방역 홍보로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됐던 전철을 밟아서도 안 된다.
동시에 K컬처 스타들은 글로벌 이슈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영향력이 커진 만큼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다. K팝에 매료된 스탠퍼드대 학생들과 수업에서 토론해 보면 “K팝이 누리는 위상을 고려할 때 K팝 가수들이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의아하다” “미얀마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 시위 군중이 민주화를 외치며 K팝 가요를 부르는 것을 한국 가수들은 알고 있나” “K팝이 과연 지속 가능할까” 등 다양한 질문이 쏟아진다.
이들은 지극히 미국적 코드로 K팝을 읽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K팝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대답해야 할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후변화와 같은 글로벌 어젠다에서부터 북한 인권과 같은 보편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BTS가 백악관을 방문해 미국 내 아시안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목소리를 낸 것이나 에스파(aespa)가 유엔 2022 지속가능발전 고위급 포럼(High Level Political Forum for sustainable development)에 참석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정치적으로 이용될 우려는 차단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K팝이나 K드라마가 학계 등 전문가 그룹과 소통할 필요가 있다. K컬처가 더 깊게 뿌리내리고 지속 가능한 소프트파워로 발전하려면 팬 미팅을 넘어 전문가와 아티스트 그리고 산업 종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당면한 문제와 미래의 방향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하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스탠퍼드 코리아 프로그램 20주년 행사에서 CJ의 미국 대표가 패널로 참석하고 엑소의 수호가 교수 및 학생들과 토론한 것은 작은 첫걸음이었지만 매우 유익했다.
학계 처지에서도 대중의 관심사를 어떻게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논의할지는 중요한 문제다. K컬처로 논문을 쓰겠다는 학생들에 대해 자료나 재정 지원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 K컬처 교수직이나 ‘포스닥’(박사 후 연구원·post doctor)도 고려할 수 있다. 해외 지원의 경우 국제교류재단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문화 선진국으로
한국은 군사·경제적으로 강국이지만 동북아의 지정학적 위치상 중국이나 일본을 앞서기가 쉽지 않다. 일본을 대체한 아시아 경제의 리더는 중국이고, 한국은 오히려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손해를 보고 있다. 한국 경제가 패스트 팔로어 모델로 성공했지만 퍼스트 무버가 되는 데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삼성폰이 아이폰의 벽을 넘지 못하는 이유다.이에 비해 그 나름 고유의 특징과 시스템을 갖고 진화하는 K드라마, K팝은 글로벌 문화계의 퍼스트 무버가 될지도 모른다. K컬처의 힘을 바탕으로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의 소프트파워도 급증하고 있다. 국가의 이미지 제고와 브랜딩에는 문화의 힘이 최고다. 스웨덴 하면 ‘복지국가’와 함께 ‘아바(ABBA)’가 떠오르고 네덜란드 하면 ‘운하의 나라’와 함께 ‘렘브란트와 고흐’가 생각난다. 마침내 K컬처로 인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변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남긴 말이다. 한국이 K컬처를 바탕으로 김구 선생이 오래전 소망한 문화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할 날을 기대해 본다.
신기욱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사회학 석·박사
● 미국 아이오와대, UCLA 교수
● 現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및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
● 저서 : ‘슈퍼피셜 코리아: 화려한 한국의 빈곤한 풍경’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하나의 동맹, 두 개의 렌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