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호

“현재의 통일교는 창시자 뜻에서 벗어나 있다”

문선명 ‘오른팔’ 곽정환 前 통일교 세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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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입력2022-08-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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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베 전 총리 사망 후 일본서 비판 여론

    • “문선명 총재 死後 통일교 변질됐다”

    • “가르침에 어긋난 헌금 관리가 불행의 씨앗”

    • “통일교 초심 되찾길 바랄 뿐”

    7월 29일 ‘신동아’와 만난 곽정환 전 통일교 세계회장. [지호영 기자]

    7월 29일 ‘신동아’와 만난 곽정환 전 통일교 세계회장. [지호영 기자]

    7월 8일 오전 11시 32분경 일본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지 역 인근에서 두 차례의 총성이 울렸다. 총대를 사이로 마주한 두 사람 중 하나는 죽였고, 하나는 죽었다. 총구가 향한 인물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첫 발포는 허공을 갈랐고, 두 번째 발포에서 산개된 6발의 총알 중 2발이 명중했다. 아베 전 총리는 오후 5시 3분 숨을 거뒀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전직 해상자위대원 야마가미 데쓰야(42)다.

    7월 8일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피격 직후 길바닥에 쓰러진 채 가슴에 피를 흘리고 있다. [아사히신문]

    7월 8일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피격 직후 길바닥에 쓰러진 채 가슴에 피를 흘리고 있다. [아사히신문]

    야마가미는 총격 직후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어진 경찰 조사에서 드러난 그의 살해 동기는 한 ‘종교’를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1954년 고(故) 문선명(1920~2012) 총재가 창시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이다. 7월 10일, 13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야마가미의 모친은 통일교에 약 10억 원(1억 엔)에 달하는 헌금을 냈다. 이를 위해 1999년 조부로부터 상속받은 토지와 가족 4명이 살던 단독주택을 매각했다. 지속적인 헌금 납부로 2002년엔 파산 선고에까지 이르렀다. 야마가미는 해상자위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의 형은 정신병을 앓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여동생은 집을 떠나 행방불명됐다. 야마가미의 분노는 컸다. 사제 총기를 만들 만큼 치밀하게 암살을 계획했다. 총격 전날 나라시의 통일교 교회를 향해 시험발사도 했다. 원래 한학자(69) 통일교 2대 총재를 노렸지만 접근이 여의치 않아 목표를 바꿨다. 야마가미는 경찰 진술에서 “어머니가 거액의 기부를 해서 파산했다. 반드시 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일교를 일본에 들인 사람이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그래서 그의 외손자 아베를 노렸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영감상법(靈感商法)’으로 불리는 통일교의 헌금 체계가 비극의 맹아(萌芽)로 지목됐다. 영감상법은 영적인 문제를 이용한 상업행위를 뜻한다. ‘지옥에 있는 조상의 고통을 없애주고 후손이 평화로우려면 영적인 능력이 있는 물건을 구매하고 헌금을 해야 한다’며 인감과 화병, 목주, 인삼, 진액 등을 초자연적 영력이 있다며 판매하는 것이다.

    7월 19일 곽정환 전 통일교 세계회장은 아베 암살 사건에 대한 사죄를 표명하기 위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동아DB]

    7월 19일 곽정환 전 통일교 세계회장은 아베 암살 사건에 대한 사죄를 표명하기 위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동아DB]

    일본에서 통일교를 향한 거센 비판이 이는 가운데 7월 19일 곽정환(86) 전 통일교 세계회장이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 전 회장은 1958년부터 2009년까지 문 총재를 보필했다. ‘문선명의 오른팔’ ‘통일교 2인자’로 불렸다. UPI통신, 워싱턴타임스 회장, 세계일보 초대 사장, 선문학원 이사장, 한국프로축구연맹 회장, 국제축구연맹(FIFA) 전략위원을 역임했다. 이날 곽 전 회장이 밝힌 인사말과 성명서의 요지는 ‘일본 통일교의 잘못된 헌금 시스템이 아베 암살을 초래했다’는 것과 ‘원래 문 총재의 뜻대로 3남 문현진 UCI그룹 회장에게 승계가 이뤄졌어야 했다’는 것이다. 문 회장은 1998년 문 총재의 후계자로 낙점됐고 이후 그의 지위는 변함이 없어 보였으나 2009년에 교단 내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독자 노선을 걸었다. ‘축출’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7월 29일 서울 잠실의 한 호텔에서 곽 전 회장을 만났다. 한평생을 신앙인으로 산 인물.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 있는 머리, 거동의 부자연스러움, 가라앉은 탁성(濁聲)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를 실감케 했다. 영락없는 노옹(老翁)의 모습이었으나 맑은 눈망울만은 홀로 시간을 빗겨간 듯했다. 곽 전 회장은 인터뷰가 시작되자 천천히 일어나 단상에 섰다. “노구에 굳이 그럴 것 있느냐. 편하게 하시라”고 말하니 “독자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말은 느리고 평온했다. 간혹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선 다른 사람인 듯 정력적으로 변했다. 주먹을 쥐고 팔을 휘두르며 말에 힘을 줬다. 문 총재와의 지난날을 회상할 땐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보였다. “통일교는 문 총재의 가르침대로 돌아가야만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7월 19일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아베 전 총리 소식을 듣고 참 놀랐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저격을 당해 사망했어요. 통일교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교단 측은 명확한 사과를 하지 않았죠. 통일교의 지도자로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 나부터 먼저 사죄를 표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제가 곧 아흔입니다. 스물두 살 때 문 총재를 만나 한평생 그분을 따랐습니다. 참 행복하고 자부심 가득한 시간이었는데, 이번 암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물론 온 세계로부터 문 총재에 대한 오명이 씌워지고 있어요.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가르침대로만 행했더라면…”

    통일교와 자민당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 아베 신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인연이 두터웠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착’이라고 말할 것은 아닙니다. 기시 전 총리는 1960~1970년대 공산주의 바람이 강할 때 일본의 적화를 우려했습니다. 문 총재의 승공(勝共)운동과 뜻이 맞았고, 의기투합했던 것입니다. 정치적이나 종교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기자회견 때 아베 전 총리 암살 사건은 일본 통일교가 과도한 헌금을 수취해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는데.

    “영감상법이 일본에서 사회적 문제로 거론된 게 2009년입니다. 문 총재께서 노쇠해지니 그분의 뜻에 반(反)한 거죠. 그분께서는 ‘헌금은 하나님과 인류, 역사에 바치는 것이니 이를 사적으로 유용한다면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지도자가 될 수 있는 3대 조건 중 하나로 ‘공금 관리’를 꼽으셨습니다.”

    현재 통일교는 문 총재가 이끌던 시절과는 다릅니까.

    “너무나 다릅니다. 문제가 된 헌금 부분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실 신앙인에게 헌금은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니에요. 문 총재께서 살아 계실 때에도 일본 신도로부터 헌금이 많이 들어온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땐 원칙이 있었습니다. 문 총재께서는 모인 헌금을 통일운동, 승공운동, 기술 평준화 운동, 학술회의 등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쓰셨습니다. 냉전 종식에도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어요.”

    다른 목적이라면….

    “문 총재께서 청평(경기 가평군)에서 통일교의 기초를 닦으실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이젠 그분께서 일궈놓은 수련소, 박물관 등의 이름이 모두 바뀌었습니다. 그분의 흔적이 사라졌어요. 대부분의 건물에 한학자 여사를 상징하는 ‘HJ’를 붙였습니다. 문 총재가 살아계실 때엔 건물을 크게 짓는 일도,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일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언제까지 참기만 할까”

    문선명 총재 말년에 벌어진 교단 내 갈등은 통일교를 크게 세 갈래로 쪼갰다. 첫 번째는 한학자 총재가 이끄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두 번째는 문 총재의 7남 문형진 씨가 만든 ‘세계평화통일성전(생츄어리)’, 마지막은 문현진 회장이 이끄는 가정평화협회, 글로벌피스재단 등이다. 문 회장 측은 그의 승계를 마땅치 않게 여긴 교회 지도부와 한 총재, 문국진 씨(4남), 문형진 씨가 문 회장을 축출했다고 주장한다. 문 총재 사후에는 또다시 분란이 일어나 4남과 7남도 축출됐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통일교 측에선 문 회장이 문 총재의 뜻을 거슬러 미움을 받았고, 이에 서울 여의도 파크원으로 대표되는 부동산과 유씨아이재단(UCI) 등 거액의 자산을 갖고 ‘분리 독립’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곽정환 전 회장은 문 회장과 각별한 사이로서 문 회장 쪽에 속한 것으로로 여겨진다.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통일교 내 다툼이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는 문 회장을 모함한 ‘세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 총재께서 문 회장에게 전권을 넘기려고 하다 보니 시기하는 사람이 생겼겠죠. 또 문 총재께서는 1996년 교회 간판을 내리며 ‘교회 시대의 종언’을 선언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과 제도의 틀을 넘어 ‘하나님을 모시는 이상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 회장은 이 가르침을 철저히 지키려 했는데, 기존 교회 조직과 틀 속에서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지도자들로서는 문 회장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문 회장의 가족까지 끌어들였다고 봅니다.”

    재산을 둘러싸고 수십 차례의 소송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는데.

    “문 회장의 입장을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깝다고 생각한 어머니와 형제들로부터 배척과 음해를 당했습니다. 한학자 여사와 국진 씨, 형진 씨가 똘똘 뭉쳐 문 총재의 눈과 귀를 흐려 문 회장을 추방시켰습니다. 심지어 문 총재의 이름으로 충직한 아들을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어 총재님의 위신까지 땅에 추락시켰습니다. 문 회장이 그런 교회의 행태를 볼 때 얼마나 분이 솟구치겠습니까. 상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럼에도 단 한 번 공개적으로 한 여사와 형제들을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내 어머니인데 내가 모셔야지, 내 형제인데 내가 감싸야지’라고 말합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통일교 측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 회장이 당한 민·형사상 소송이 수십 건입니다. 저 역시도 소송을 당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저는 문 총재님의 가정에 누가 될까 두려워 말을 아껴왔고 소송으로 응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 회장이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문 회장과 가까운 사이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 아닙니까.

    “저는 문 총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여기며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다음은 어떡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후사가 없었지만 문 총재께서는 뜻을 이을 후대를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상속받을지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아무에게나 상속하면 되겠습니까. 문 총재께서는 이미 1998년 문 회장을 총재님의 사명과 권위를 상속한 후계자로 선포한 바 있습니다. 이른바 독생녀를 내세운 현 가정연합과 하나님의 이상가정을 이루는 축복결혼의 이상을 총기축복식으로 변질시킨 문형진 생츄어리 교회가 문 총재의 뜻과 함께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문 회장은 문 총재의 경륜과 하늘의 섭리를 상속받을 사람이니 누구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 회장을 단 한 번도 사적인 감정으로 대한 적이 없습니다.”

    “눈과 귀를 흐리는 사람들이…”

    곽 전 회장은 내내 ‘문 총재의 뜻’을 강조했다. 자신이 입을 연 것은 후계 구도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일생을 문 총재의 ‘오른팔’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의 뜻이 올바르게 펼쳐지길 바라고, 문현진 회장이 이를 이뤄낼 적임자이기에 지지할 뿐”이라고 힘줘 말했다.

    ‘문선명의 오른팔’이라고 불렸습니다. 당신의 주장대로 문 총재가 ‘세력’에 의해 미혹된 거라면 그를 올바르게 보좌했어야 한 것 아닙니까.

    “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많이 뉘우치고 자책합니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문 총재와 같이 위대한 분을 지척에서 보좌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일단 잠도 적게 자야 합니다. 문 총재께서는 살아생전 하루에 3시간 이상 주무시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건 한 가지 사례일 뿐입니다. 그분을 올바르게 모시기 위한 방법이 뭘까 항상 고민했습니다. 저는 ‘투명 유리’ 같은 사람이 되기로 했죠. 그래야 문 총재의 지시 사항, 밑에서 올라오는 보고가 가감 없이 전달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최대한 저를 드러내지 않고 50년간 그분을 모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분께 직언하는 일이 적었죠.”

    곽 전 회장은 “나와 문현진 회장이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졌기에 교단과 문 회장의 갈등 국면에서 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며 “문 총재의 눈과 귀를 흐리는 자들이 ‘곽정환은 무조건 문현진 편이다’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이어 한 일화를 밝히며 눈물을 흘렸다.

    “문 총재가 돌아가신 뒤의 일입니다. 문 총재께서 연로해 기력이 쇠해졌을 때 그분의 다리를 주물러주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저에게 와서는 문 총재께서 ‘매번 곽정환을 계속 오라고 했는데, 오늘도 오지 않는구나’라는 말씀을 수차례나 했다고 말했어요. 그분께서 절 그렇게 찾으셨는데, 왜 전달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생각할 때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주변에서 그분의 이름으로 지시와 공문을 남발했고, 문 총재께서도 돌아가실 즈음에야…. 너무 늦어버렸죠. 참으로 안타까운 말년을 보내셨습니다.”

    통일교는 창시 때부터 지금까지 ‘이단’ 논란이 있습니다. 아베 암살 사건으로 인해 여론이 더 악화됐는데.

    “사이비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각자, 교주, 성인도 사회·국가적으로 공인받을 때까지 이단이라거나, 사이비라는 둥 비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도 초기엔 로마 제국 치하에서 핍박받았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때도 수많은 개신교도가 이단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이비라는 비판에 매몰돼서는 안 됩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들고 문 총재의 귀한 가르침을 생활에서 실천해 나간다면 비판적인 외부의 시선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나의 쓴소리가 통일교에 자극되길”

    1990년 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악수하고 있다. [동아DB]

    1990년 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악수하고 있다. [동아DB]

    문 총재와 그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분은 정말 특별합니다. 보통 사람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1990년 당시 문 총재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났을 때 동행했는데, 저는 문 총재를 오래 모신 사람임에도 그분의 배포에 놀랐습니다. 문 총재께선 고르바초프와 악수를 한 후 격하게 포옹했습니다. 마치 100년 지기를 만난 것과 같았죠. 이어 개혁·개방을 고민하는 고르바초프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개방해서 기계를 들이고, 공장을 지으라’고 조언했습니다. 들여온 것들은 모두 소련에 남으니 도움이 된다고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라’고도 했습니다. ‘소련 학생 3000명을 미국에 유학 보내주겠다. 비용은 모두 내가 대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죠. 그랬더니 고르바초프의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 후 고르바초프는 한국에 방문할 때 문 총재의 사저를 찾을 만큼 애정을 보였습니다. 1991년 북한에 가 김일성을 만난 건 또 어떻습니까. 그때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음에도 사랑으로 감싸 안았습니다.”

    문선명 총재는 1946년 서울에서 평양으로 건너가 길거리 전도를 하다 같은 해 8월 북한 당국에 체포됐다가 고문당한 후 11월 풀려났다. 1948년 2월엔 첩자로 몰려 다시 구금됐다.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유엔군의 폭격으로 감옥이 무너진 틈을 타 탈출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곽 전 회장은 문 총재가 1991년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며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만면에 화색을 띠고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문 총재께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오신 후 수행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숙소는 말할 것도 없고 가는 곳마다 도청장치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계신 열흘간 하루에 한 시간도 주무시지 못했다고요. 문 총재께 ‘얼마나 힘드셨느냐’고 물었어요. 대답이 놀라웠습니다. ‘그깟 잠 좀 못 자는 게 뭐가 어렵냐’며 북한에 가기 전 하와이에서 2주간 기도를 하셨는데, 그 시간이 훨씬 어려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고문으로 피를 흥건히 쏟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음 문턱까지 갔었지만 기도하며 그들에 대한 미움을 모두 사랑으로 바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문 총재가 살아 있었다면 작금의 통일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 같습니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문 총재는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육체는 없지만 영적(靈的)으로요. 지금도 통일교의 모습을 보고 ‘많이 안타깝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계시죠.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통일교가 다시 제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 모습’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문현진 회장이 통일교로 복귀해 이끌어야 한다는 겁니까.

    “문 총재님의 뜻에 얼마만큼 가깝게 갈 수 있는지가 관건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 문 총재님의 가르침과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이것을 위한 나의 쓴리가 통일교에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일찍이 1998년에 총재님께서 세우신 문현진 회장과 하나가 돼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문 회장이 통일교로 복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1990년대에 문 총재님은 통일교회 간판을 내렸고 종교와 교회가 필요 없는 시대를 여셨습니다. 총재님의 유지를 받들어온 문 회장이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고초를 겪어왔는데 다시 통일교로 돌아갈 리 만무하죠. 조심스러운 판단이지만, 문 회장은 총재님의 가족분들과 이 교회가 표류하는 것을 더는 손 놓고 바라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가 총재님께서 성화하신지 10주년인데, 총재님과의 약속도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반드시 수습하실 것이라고 봅니다. 과거 문 총재님께서 이 운동 전체를 이끌어가셨듯이 반드시 문 회장에게도 그럴 날이 올 거라고 보여집니다. 통일교 안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것을 바라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때가 머지않았음을 저는 직감하고 있습니다.”



    이현준 기자

    이현준 기자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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