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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야말로 온갖 장르 드라마 펼쳐지는 곳이에요”

50대 택시기사는 오늘도 수첩을 꺼낸다

  • 이주홍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ra991110@naver.com

“택시야말로 온갖 장르 드라마 펼쳐지는 곳이에요”

  • ● 나만 알기 아까운 이야기 기록
    ● 30분간 서럽게 울던 취업준비생
    ● 3만 원어치 달려달라는 손님
    ● 대뜸 파출소로 가자던 노신사
이산 씨의 노트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이씨가 늘 가슴에 새기는 말이라고 한다. [이주홍]

이산 씨의 노트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이씨가 늘 가슴에 새기는 말이라고 한다. [이주홍]

대구 남구의 한 기사식당.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2시의 식당 풍경은 한 시간 전과는 사뭇 다르다. 물밀듯 들이닥친 손님들로 왁자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사소한 말소리와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날 뿐이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린다. 한 무리의 택시기사가 들어와 일제히 백반을 주문한다. 수저를 놓고 컵에 물을 채우고, 모두가 늦은 점심을 만끽할 준비를 하는데 한 남성이 눈에 띈다. 그는 손바닥만 한 수첩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주변을 대충 챙기고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든다.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무언가를 적는다.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하다.

곧이어 식당 주인이 백반을 가져다 놓는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상을 앞에 두고도 그는 여전히 글쓰기에 몰두해 있다. 밥이 나왔다는 동료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제야 숟가락을 든다. 시간이 곧 돈인 택시기사에게 밥도 제쳐둘 만큼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저만 혼자 취준생이었어요”

8년 경력 택시기사 이산(54) 씨는 손님을 만나며 겪은 인상적인 일화를 수첩에 메모한다. 그는 “나만 알기에는 너무 아까운 이야기가 많아 기록하기 시작했다”며 “(이야기의) 생동감을 잘 담아내려면 잊기 전에 빨리 메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운전 중에 펜을 꺼낼 순 없어 자연히 식사 시간이나 화장실 가는 시간을 글쓰기 시간으로 사용하게 됐다고 한다.

동료들도 그의 기록에 대한 열정에 힘을 실어준다. 김정현(63) 씨는 “우리는 재밌는 일만 생겼다 하면 산이한테 전화한다”고 말했다. 이산 씨는 이 일화들을 언젠가 책으로 엮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택시야말로 온갖 장르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에요.”

책으로 엮을 만큼 이야기가 다양한지를 묻는 질문에 박성수(54) 씨가 한 대답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택시기사 모두가 박씨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 덕분에 기사들은 필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물론 “장르만 말해 달라”며 경쟁적으로 경험담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산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사에게 말을 거는 손님은 외롭거나 수다를 좋아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며 “밥 한 끼만 같이 먹어달라는 손님이 제법 많다”고 말했다. 이산 씨는 어제도 외로운 취업준비생 청년을 만났다. “슬슬 날씨가 더워지네요.” 청년은 날씨를 주제로 이씨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러게요. 장마 오기 전에 예쁜 하늘 많이 봐둬야겠어요.” 기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자 청년은 느릿느릿 속내를 털어놨다.

“제가 사실은 오늘 동창 모임을 다녀왔는데 저만 혼자 취준생이었어요.”

흐느끼는 청년의 말을 듣고만 있던 기사는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달래줘야겠더라고요. 자식 생각도 나고.” 청년은 모르는 사람 앞에서 30분을 울었다.

대화의 흐름은 대뜸 ‘우는 손님’으로 흘렀다. 김대규(53) 씨는 “그때 울음 참느라 혼났다”며 한 여고생을 떠올렸다. 수능이 끝난 시각, 김씨는 효성여고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수능을 끝낸 자녀를 데리러 온 학부모로 북새통을 이룬 길을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고개를 푹 숙인 학생이 다급하게 택시를 세웠다. 학생은 택시에 몸을 싣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시험도 못 쳤는데 데리러 오는 사람도 없고 서러워요.” 김씨는 수고했다는 말만 연신 반복할 뿐이었다. “저도 제 자식 수능 때 데리러 못 갔거든요.”

“자백하고 자수하는 겁니다”

목적지가 없는 손님도 많다. 김병훈(58) 씨는 며칠 전 3만 원어치만 달려 달라는 손님을 만났다. 손님은 창 밖을 보며 숨죽여 울었다. 모른 척하던 김 씨는 신호 대기를 받자 휴지를 뒷좌석으로 건넨다. 시야에 불쑥 나타난 휴지를 본 손님은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감정이 조금 추슬러지면 이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한다. “내 편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다 싶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이처럼 우는 것 같아요.”

강훈(60) 씨는 “TV 드라마보다 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상황도 많다”며 지금까지의 이야기와는 다른 성격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한 노신사가 강씨의 택시에 올라탔다. 이동하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잘 나눴고 취한 기색도 전혀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노신사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50m 앞 파출소에 같이 가자고 요구했다. 강씨는 “제가 잘못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고 노신사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강씨가 파출소에 ‘같이’ 가자고 한 노신사의 의중을 재차 물으려는 찰나, 노신사는 당당하게 말했다. “차비 없습니다. 자백하고 자수하는 겁니다.” 강씨는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결국 지체되는 시간으로 손해가 커질 상황에 놓이자 요금은 포기했다고 한다. 강씨의 일화를 들은 기사들은 택시비로 손님과 시비가 붙는 게 가장 난감한 일이라고 입을 모아 얘기했다.

이산 씨의 노트를 자랑하는 최병욱(62) 씨. 이씨가 사진 촬영을 부담스러워하자 최씨는 “부끄러울 것도 많다”며 노트를 뺏어 들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나는 사진 찍히는 거 좋아해”라고 했다. [이주홍]

이산 씨의 노트를 자랑하는 최병욱(62) 씨. 이씨가 사진 촬영을 부담스러워하자 최씨는 “부끄러울 것도 많다”며 노트를 뺏어 들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나는 사진 찍히는 거 좋아해”라고 했다. [이주홍]

최병욱(62) 씨는 “사람 상대하는 직업은 뭐든 사람 때문에 속상한 일을 겪게 마련이지만 몇몇 손님은 택시기사를 없는 사람 취급할 때가 있다”며 고래고래 욕하며 통화하기는 예삿일이고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팔걸이에 발 얹기는 물론 뒷좌석에서 옷 갈아입는 손님도 봤다고 전했다. 이산 씨는 “아무래도 택시기사를 보는 사회의 전반적 인식이 좋지 못한 것 같다”며 “더 갈 길 없는 사람이 택하는 직업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살아온 삶은 그리 단순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행 지점장, 학교 교사, 대기업 출신도 있으며 운전대를 잡은 이유도 제가끔 다르다. 인생의 굴곡을 겪다 어쩔 수 없이 택시기사가 된 사람도 있고, 이 일을 소일거리로 삼는 사람, 또 다른 직업이 있는 사람도 있다. 이산 씨는 “직업에 귀천이 있음을 자주 깨닫게 돼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딸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책 출판에 대한 이산 씨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그는 “우선 가까운 시일 내 블로그 같은 곳에 연재하면서 사람들 반응을 보려고 한다”고 답했다. 책 출판에 대한 꿈을 딸과 자주 상의한다고 한다.

“딸이 처음에는 어떤 개입도 없이 응원한다며 블로그 연재를 권했어요. 그러다 몇 편을 읽더니 가능성을 본 건지 수익성을 본 건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슬그머니 다가와 ‘아빠 그림툰은 어때?’ 하더군요. 조만간 이 아이와 같이 일해도 될지 심사를 볼 예정입니다.”



신동아 2022년 9월호

이주홍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ra9911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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