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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권모술수·우발적 사건의 결정체가 오늘의 習

황제가 된 시진핑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 한청훤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 저자

가문·권모술수·우발적 사건의 결정체가 오늘의 習

  • ● 덩샤오핑 유훈 정치가 막을 내린 무대
    ● 전임자에게 창피 줄 정도의 권력
    ● 상하이방과 공청단은 바지 사장이다?
    ● 무색무취로 위장한 도광양회의 고수
    ● ‘보시라이 쿠데타’가 천운이 된 이유
    ● 대만 통일, 다목적 카드이자 만능 무기
    ● 무력 침공, 허를 찌르는 기만술 쓸 것
10월 23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3층 진써다팅(金色大廳)에 들어서며 취재진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새로 선출된 최고지도부 상무위원들이 서열 순으로 뒤따르고 있다. 시 주석 뒤부터 서열 2위 리창 상하이시 당서기, 3위 자오러지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4위 왕후닝 당 중앙서기처 서기. 모두 시 주석의 최측근이다. [AP 뉴시스]

10월 23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3층 진써다팅(金色大廳)에 들어서며 취재진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새로 선출된 최고지도부 상무위원들이 서열 순으로 뒤따르고 있다. 시 주석 뒤부터 서열 2위 리창 상하이시 당서기, 3위 자오러지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4위 왕후닝 당 중앙서기처 서기. 모두 시 주석의 최측근이다. [AP 뉴시스]

충격이었다. 제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통해 유래 없는 권력 집중이 나타나리라 예상했던 나조차 당대회 결과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해도 대내외에 비치는 모양새를 고려해 7명의 상무위원 중 최소 한 명은 비(非)시진핑계 경제전문가로 채울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는 쇼킹했다. 향후 5년 간 중국을 지배할 7명의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 전원이 시진핑과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측근 부하로 채워졌다.

이 충격적 인선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시진핑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첫째, 자신의 권력 장악 정도가 외부에 치장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고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대외적 반대와 쓴소리에 대해 타협할 생각이 없다는 점도 보여줬다. 그가 타협이나 양보 없이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와 미련을 뒀던 국내외 자본도 탈중국이라는 집단행동으로 화답(?)했다. 당황한 중국 정부는 서둘러 외국 기업 상장 허용 등 예전으로 치면 그 나름대로 해외자본에 대한 파격적 우대 조치를 발표하며 달래기에 나섰으나 자본의 탈중국이라는 대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0년 가까이 이어진 체제의 종말

이번 당대회는 덩샤오핑의 유훈 정치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무대이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1990년 3월 마지막 직함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내려놨고, 1997년 2월 사망했다. 하지만 영향력은 사후에도 이어져 그가 권력을 잡은 1978년부터 2022년까지 40년 가까이 지속됐다. 덩샤오핑 뒤를 이어 중국을 통치한 최고지도자들과 그의 후배들이 덩샤오핑의 유훈과 그가 만든 시스템에 따라 중국을 통치해 왔기 때문이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직접 지정한 후계자였다. 두 사람은 집권하는 동안 덩샤오핑의 가르침과 뜻을 충실히 따랐다. 덩샤오핑이 지시한 대로 10년 임기를 채운 뒤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줬고(장쩌민의 경우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는 뒤끝을 부리기는 했지만) 임기 내내 다른 상무위원들과 협의와 타협을 거쳐 국정의 중요 결정을 내렸다. 이들의 집권 기간에도 덩샤오핑이 만든 시스템에 따라 각 지방정부는 고도의 자율권과 자치권을 누렸다. 지방정부 수장 자리는 야심 많은 젊은 관료 집단과 공산당원들이 자신의 능력을 중앙에 있는 선배들에게 입증해 볼 수 있는 무대였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가장 똑똑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경쟁자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맡게 되는 중국식 능력주의가 초고속 경제성장 시대 내내 꽃을 피웠다.

덩샤오핑의 후계자들은 정책 면에서도 덩샤오핑의 가르침과 뜻을 충실히 지켜나갔다. 덩샤오핑의 시대는 마오쩌둥 시대와 정반대로 정치와 이념은 우선순위에서 경제발전 뒤로 밀리는, ‘경제 우선의 시대’였다. 지방 공무원들이 승진하고 중앙으로 출세하려 한다면 답은 간단했다. 지역에 최대한 많은 자본을 유치하고 기업 활동을 장려해 경제성장률을 최대치로 높이는 것이다. 시진핑도 지방 관료로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외자기업을 대상으로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서는 세일즈 활동에 발 벗고 나서던 시절이 있었다.



개혁개방 이래 없었던 일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 일당 전제라는 최소한의 마지노선만 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거의 모든 통제를 풀어줬다. 무엇을 해서 어떻게 살지 더는 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열심히 돈벌이에 나서서 먼저 부자가 되라고 격려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천안문 사태와 같이 정치 영역에서도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시도가 중국 인민들로부터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강력한 탄압을 받고 좌절한 후 대다수는 점차 현실을 받아들였다. 일부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편승하며 만족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중국 인민이 폭발적 성장을 거듭하던 경제와 끊임없이 증가하는 소득 덕에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즈음에 가서 중국 공산당과 인민들 사이에 일종의 암묵적 사회계약이 체결됐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인민들은 중국 공산당 통치에 순응하는 대신, 중국 공산당은 경제발전에 매진해 인민의 삶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궁극적으로 중국의 국제 지위를 찬란했던 시기로 되돌려 놓겠다는 약속이 담긴 계약이었다.

외교 면에서도 덩샤오핑이 만들어놓은 소위 ‘도광양회(韜光養晦)’라 불리던 중국식 실용주의가 계승됐다. 개혁개방을 시작할 당시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중국에 서방, 특히 미국의 지원과 교류는 필수였다. 현실주의자 덩샤오핑은 중국이 확실히 미국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경제발전에 매진해 조용히 국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해야 함을 후계자들에게 철저히 당부했다. 물론 장쩌민, 후진타오 시절에도 미국 및 서방과 마찰이 꾸준히 발생하기는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국 공산당은 타협 노선을 유지했고, 전면 대결로 치닫기 전에 중국 정부는 사태가 악화하는 걸 방지했다.

이런 철저한 실용주의 노선 덕에 미·중 상호 의존관계는 갈수록 깊어졌고 전 세계 자본이 앞다퉈 중국에 몰려갔다. 대륙과 대만, 즉 양안관계는 국공내전 이래로 가장 평화로웠고 번영을 구가했다. 홍콩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이 제시한 일국양제 시스템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대륙에 의존해 살아가는 현실을 받아들여 갔다. 한국의 여론이 중국에 대해 가장 우호적이었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시절도 바로 이때였다.

덩샤오핑이 만든 이 모든 시스템과 그의 유훈은 2012년 시진핑 집권 후 점차 붕괴되고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2년 당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완전히 폐기됐다. 당대회 마지막 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후진타오 전 주석의 강제 퇴장 사건은 후진타오로 대표되는 공청단의 몰락만을 상징하는 장면이 아니었다. 20여 년 전 육체적으로 죽은 덩샤오핑이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죽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10월 22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폐막식 도중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맨 오른쪽)의 전임자인 후진타오 전 주석(시 주석 뒤쪽 첫 번째)이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팔을 잡힌 채 이끌려 나가다 시 주석의 등에 손을 대며 말을 걸고 있다. 이번에 지도부에서 퇴출된 ‘후진타오계’ 리커창 총리(시 주석 왼쪽 첫 번째)와 왕양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아랫 줄 왼쪽 첫 번째)이 앉아 있다. [AP 뉴시스]

10월 22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폐막식 도중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맨 오른쪽)의 전임자인 후진타오 전 주석(시 주석 뒤쪽 첫 번째)이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팔을 잡힌 채 이끌려 나가다 시 주석의 등에 손을 대며 말을 걸고 있다. 이번에 지도부에서 퇴출된 ‘후진타오계’ 리커창 총리(시 주석 왼쪽 첫 번째)와 왕양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아랫 줄 왼쪽 첫 번째)이 앉아 있다. [AP 뉴시스]

후진타오가 왜 퇴장했는지 여러 추측이 난무했지만 전후 상황 전체를 담은 동영상을 분석해 보면 자진 퇴장이 아닌 시진핑의 명령에 의한 강제 퇴장임이 분명해 보인다. 차기 중앙위원과 상무위원에 선출된 명단이 포함된 인선 결과가 적힌 서류를 보려던 후진타오는 옆에 있던 후배인 리잔수에게 제지당했고 그 후 눈에 띄게 불편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시진핑이 수행원에게 지시한 후 후진타오가 해당 수행원에 의해 억지로 일으켜 세워지는 모습이 여과 없이 외부에 노출돼 버리고 만다.

개혁개방 이래 전임자에게 공개적 창피를 줄 정도로 권력과 정치적 권위가 한 명에게 집중돼 있던 적은 없다. 물론 10년 이상 임기를 연장한 적도, 모든 상무위원이 최고지도자 한 사람의 지시를 받는 사람들로만 채워진 적도 없다. 시진핑은 덩샤오핑 체제를 단순히 끝내는 것에 머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끝내는 걸 넘어 기존의 것을 뒤집어엎고 역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게 분명했다.

내가 최근 중국에 관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이렇다. 도대체 시진핑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수십 년간 구축되고 유지돼 온 기존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었느냐는 거다. 지난해 말부터 쓰기 시작해 올 상반기에 출간한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시진핑이 어떻게 기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절대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찾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타고난 출신 성분과 뛰어난 권모술수, 그리고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우발적 사건까지 겹치면서 시진핑은 오늘날의 시황제가 됐다. 가문과 능력에 더해 행운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절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만약 이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오늘날의 시진핑은 불가능했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나의 결론이다.

태자당이 품은 열망

잘 알려진 대로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1세대 혁명 원로 직계자녀 사이의 기득권 네트워크라 할 소위 태자당이라 불리는 파벌에 속해 왔다. 아버지 시중쉰이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동안 중국 공산당을 이끌며 건국에 큰 공을 세운 1세대 혁명 원로 중 하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중쉰과 같은 부모를 둔 자녀들은 문화대혁명 동안 되레 기득권 반동으로 몰려 큰 고초를 겪었지만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국가가 정상화되자 정·재계의 온갖 노른자위를 차지해 가며 중국 사회의 진정한 귀족이자 핵심 기득권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덩샤오핑 시대 동안 권력과 이권을 장악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덩샤오핑이 구축한 정치 시스템을 타고 올라온 인재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여 형성된 두 파벌, 상하이방과 공청단에 속한 이들이다. 태자당과 달리 그들은 능력을 통해 밑바닥에서 올라온, 즉 덩샤오핑이 안배한 능력주의의 수혜자들이었다. 중국 공산당에서 뽑은 젊고 똑똑한 인재들은 우선 지방 작은 마을 말단에서 커리어를 시작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진행되는 실적 평가를 거쳐 일부가 더 큰 지방정부 단위에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고 또 그들 사이에 실적에 대한 평가가 반복된다. 이런 식의 거듭되는 경쟁을 통해 최종적으로 중앙정부 요직에까지 올라온 극소수가 최종적으로 중국을 이끌어가는 것이 덩샤오핑이 구축한 능력주의 시스템이었다.

물론 상하이방과 공청단 사이에도 차이점이 있다. 공청단이 능력주의에 의해 모인 전형적인 기술 전문 관료, 즉 테크노크라트라면 상하이방은 장쩌민을 중심으로 그가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시절 지역을 기반으로 주변에 형성된 측근 인맥 간의 이권 그룹이라 할 수 있다. 덩샤오핑 시기 장쩌민을 수장으로 한 상하이방이 사실상의 주류이자 일종의 여당이었다면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한 공청단이 비주류이며 일종의 야당의 위치였다. 이런 식으로 이 시기 중국 정치는 각 세력 간에 나름의 균형과 조율 그리고 합의와 타협의 관행이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태자당의 귀족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상황과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당의 진정한 주인을 자처하던 이들 사이에서 상하이방과 공청단으로부터 자신들에게 마땅히 와야 할 권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열망이 높아져 갔다. 그들의 눈에 상하이방과 공청단은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해 봐야 옛날 계급사회로 치면 부려먹는 머슴, 요즘 회사로 치면 잘해야 평사원 출신의 월급 주고 고용된 임원들에 불과했다. 회사의 진정한 주인은 창업주의 자녀들이자 실질적 대주주인 자신들인데 바지사장 손에 그룹 경영을 맡겨서 그들의 지시나 들어야 하는 상황을 언제까지 인내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결국 시진핑이 태자당을 대표해 후진타오의 차기 주자로 낙점됐다. 당의 진짜 주인들을 대표해 권력을 장악한 시진핑은 전임자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정치 기반과 배경을 갖고 정권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집권 내내 사실상 바지 사장 취급을 받던 후진타오가 은퇴 후 시진핑에게 위협이 될 리 만무했다. 그나마 오랜 시간 집권 세력으로 중국 사회 곳곳에 각종 이권 네트워크를 뿌리내린 상하이방과 그 수장인 장쩌민 정도가 시진핑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진핑에게는 상하이방을 무너뜨릴 수완과 능력이 있었다.

조종하기 쉬운 만만한 인물로 봤거늘…

2019년 9월 24일 중국 정부 수립 70주년(10월 1일) 기념 특별전을 보러 베이징전람관을 찾은 중국인들이 중국 공산당의 역대 최고지도자들의 사진이 걸린 전시 공간에 몰려들어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현 중국 국가 주석. [동아DB]

2019년 9월 24일 중국 정부 수립 70주년(10월 1일) 기념 특별전을 보러 베이징전람관을 찾은 중국인들이 중국 공산당의 역대 최고지도자들의 사진이 걸린 전시 공간에 몰려들어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현 중국 국가 주석. [동아DB]

애초에 태자당 중에서도 시진핑이 낙점될 수 있던 까닭은 상하이방과 공청단 사이에 절묘한 타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하이방과 공청단은 태자당 출신에서 뽑더라도 자신들 파벌의 기득권과 안전이 보장돼야 한다는 데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바꿔 말하면 조종하기 쉬운 만만한 인물이 차기 주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 계파 타협의 결과가 바로 시진핑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진핑은 줏대 없고 무색무취하며 권력욕이나 야심이 없는 평범한 인물로 간주됐다. 그러니 주류와 비주류 모두에게 시진핑이야말로 차기 주자로 적임자였다.

만만해 보이던 시진핑이 사실은 얼마나 권모술수와 기만술에 능한지 그때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결정적 순간까지 참고 또 기다린 시진핑이야말로 진정한 도광양회의 고수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도 시진핑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건 시진핑식 적폐 청산은 근 10년에 걸쳐 천천히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 후술하겠지만, 쿠데타 수괴들과 일부 당내 부패혐의자들에 대한 숙청을 시작할 때만 해도 시진핑의 칼끝이 자신들의 계파에까지 미치리라 상상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칼날이 자신들의 턱밑까지 올라왔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명백해졌을 때 시진핑은 속내를 숨길 필요나 동기가 사라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후진타오의 강제 퇴장에서 그가 어떤 속내를 가지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시진핑에게는 천운도 따랐다. 시진핑이 최고지도자에 등극하던 2012년, 중국 공산당에 가장 악몽 같은 사태가 터졌다. 태자당 출신이자 시진핑이 차기 주자로 낙점되기 전 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던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가 자신의 정치적 동지이자 후견인인 저우융캉 당시 정법위 서기와 손잡고 군사정변을 모의하다 발각돼 진압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보시라이는 굉장한 야심가인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유능함과 정치력도 가진 인물이었다. 외려 능력 면에서는 무색무취하고 평범한 시진핑보다 훨씬 앞선다는 평가도 받았다.

다만 그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었는데 속내를 철저히 감출 만한 음흉함과 남을 속일 수 있는 권모술수 능력은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 반시장적 친사회주의 정책과 마오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복고주의 스타일의 정치 캠페인 원조는 보시라이였다. 그가 당서기로 충칭시를 통치하던 시절 펼쳤던 반기업 사회주의 분배 정책과 공산주의 캠페인이 정적인 시진핑에 의해 계승돼 전국 단위로 펼쳐지게 될지 예상한 사람은 당시 아무도 없었다. 승승장구하며 차기 상무위원을 노리던 보시라이는 자신의 최측근이 극비 정보를 갖고 충칭시 미국 영사관에 전격 망명 시도를 하는 스캔들이 터지자 몰락 위기에 처한다. 보시라이와 저우융캉의 반란 시도는 정보를 흘린 저우융캉 최측근의 배신으로 인해 인민해방군에 의해 진압됐다.

이 스캔들의 정치적 파장과 후폭풍은 대단했다. 하마터면 내전이 날 뻔한 아찔한 위기 앞에서 집단지도체제를 정비해 당내 서열 1위 당서기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권력구조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시진핑의 주장에 누구도 효과적으로 반박하고 저항하기 힘들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세를 십분 활용한 시진핑은 임기 초부터 권력 집중 작업을 비교적 순조롭게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가문과 정치력 거기에 행운까지 겹치며 시진핑은 마침내 21세기 중화제국의 황제가 됐다.

중화제국의 귀환이라는 큰 그림

그렇다면 30여 년간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시스템을 10년에 걸쳐 철저히 파괴하고 당과 인민들이 맺은 사회계약까지 파기하는 무리수를 둬가며 시진핑이 기어이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 목표 혹은 이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혹자는 이 모든 무리수와 심지어 전쟁도 불사하는 모습이 시진핑 개인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한다. 순전히 독재자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중국과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차이나 쇼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물론 정치인으로서 권력욕이 없을 리 없고 독재자로서 갖고 있는 개인적 욕망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진핑 또한 자신만의 공적인 사명감과 장구한 역사에 이름과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명예욕을 내면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명감과 명예욕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당연한 보편적 기준으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는 삐뚤어지고 잘못된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라 여겨진다 할지라도 말이다. 시진핑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반열에 자신을 셀프로 올려놓겠다는 야심을 품을 때부터 그 역시 그에 필적하는 역사적 업적을 남기겠다는 결심을 함께 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시진핑은 그것을 자기 손으로 이루는 게 역사의 완성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서세동점 이후 분열되고 피폐해진 천하를 재통일한 게 마오쩌둥이라면 그 기반 위에 다시금 강대국의 기틀을 다진 게 덩샤오핑의 업적이고, 중화제국의 위대한 귀환이라는 마지막 단계이자 역사적 사명은 자신의 손으로 이루겠다는 게 시진핑이 생각하는 큰 그림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중화제국의 위대한 귀환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공표하는 궁극의 이벤트가 있으니 바로 대만 통일이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듯 대만 통일은 시진핑에게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라 봐야 한다. 많은 손실이 예상됨에도 전쟁을 일으킨 푸틴에게 우크라이나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이듯 말이다.

이번 당대회 연설에서 시진핑은 우선 평화로운 방식으로 통일을 시도하겠다고 천명했지만 이는 립 서비스 혹은 훗날을 위해 사전에 깔아놓은 핑계 정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대만에 평화통일 방안으로 제시한 일국양제가 홍콩에서 철저히 무너진 걸 대만이 똑똑히 지켜봤다. 그래서 대만인들이 중국 공산당의 약속을 절대 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시진핑 또한 뻔히 알고 있다. 그러니 뒤이은 말이 그의 진심이라 봐야 한다. 즉, 대만과의 통일을 추진하는 데 절대로 무력 사용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 말이다.

대만 통일 추진은 시진핑에게 다목적 카드이자 만능 무기다. 장기집권 더 나아가 영구집권의 정당성을 부여해 줄 정치적 카드이자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명예욕을 채워줄 결정적 공적이다. 더불어 불만이 목까지 쌓여 있는 중국 인민들을 통제하고 억누르며 유사시 동원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이 바로 대만 통일 카드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 시대 미·중 간 최첨단 기술 경쟁의 최전선이 바로 반도체인데, 세계 최고의 최첨단 시스템 반도체 제조 능력을 갖춘 TSMC가 하필 대만에 있다. 미국의 물 샐 틈 없는 반도체 기술 통제와 봉쇄로 인해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중국 반도체 굴기가 좌절당할 처지에 놓인 시진핑 입장에서는 TSMC 때문이라도 대만에 군침을 삼킬 수밖에 없다.

트럼프 2기 탄생하면 대만 운명 카운트다운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2020년 7월 전투복에 방탄 헬멧까지 착용한 채 군 병력 앞에서 주권 수호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대만 국방부 트위터]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2020년 7월 전투복에 방탄 헬멧까지 착용한 채 군 병력 앞에서 주권 수호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대만 국방부 트위터]

사실 나는 요즘 당대회가 끝났음에도 제로 코로나라는 무지막지한 방역 정책을 시진핑 정권이 유지하고 밀어붙이는 데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수많은 중국 인민의 원성을 사면서까지 시진핑이 고집을 부리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훗날 대만 침공으로 촉발될 전쟁을 대비한 국가 총동원령 및 전면적 사회통제를 위한 테스트를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물론 근거 없는 가정이며 개인적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진핑 정권이 중점적으로 추진한 다른 정책을 살펴보면 그 근원에 비상시국, 즉 미국과 서방으로부터 무역 봉쇄나 경제제재를 염두에 둔 것 같다는 의심을 떨쳐내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일대일로는 인도양과 말라카 해협, 남중국해, 동중국해가 미 해군에 의해 막혔을 경우 필수 에너지와 자원을 수급할 수 있는 대체 루트로 볼 수 있다. 2020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발표된 쌍순환 정책은 비록 내수 위주의 경제라는 말로 포장돼 있으나 사실상 일국 내 경제 운영에 필요한 공급을 자급자족으로 채워나가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중국 일부 지역에서 방역 강화와 사회 안정을 명목으로 현대판 십호장(十戶長·10가구당 1명씩 관리자를 뽑는 것) 모집 통지가 나와 주민 반발을 사고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는 실정이라 의혹은 깊어간다. 시진핑 정권 들어 통제와 감시가 심해지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전근대 주민 통제 제도까지 부활한다는 소식은 또 다른 차원의 충격이다. 대만 통일 달성이라는 성스러운 민족적 사명이라는 명분 없이 이 모든 사회 통제와 감시 강화가 설사 중국 사회라 하더라도 정당화되고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여러 전문가는 시진핑의 대만 무력통일 시도가 자책골이자 자충수가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애초 상륙작전 자체가 방어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며 공격 쪽에는 극강의 난도를 부여한다. 미·중 간 군사력 격차가 여전히 현격해 초반에 중국이 일시에 대만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고 미국이 참전하면 중국에는 절망적일 정도로 낮은 승산밖에 없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나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 시진핑이 정공법을 쓸 경우 중국이 대만을 성공적으로 점령할 개연성은 낮다. 이는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역대로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들은 정공법보다는 기만적 전술에 능한 전략가들이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술이 고대부터 병법의 높은 단계로 중국 역사에서 칭송받아 왔다. 시진핑이 대만 공격을 최종 결정하면 분명 정공법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 기만술에 의한 작전이 시행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시진핑에게는 성급하게 대만 침공을 실행하지 않고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때를 기다려야 할 이유가 하나 있다. 어쩌면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다. 2024년 11월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대만 수복의 결정적으로 유리한 정세가 시진핑 앞에 펼쳐질 수 있다는 점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2024년 11월 트럼프가 승리해 백악관에 복귀해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보다 더 강력한 반개입적 고립주의 정책을 시행한다면 미국이 반세기 이상 구축하고 운영한 글로벌 자유주의 질서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재임 시 틈만 나면 나토를 해체하겠다며 흔들고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두고도 운영비 5~6배 인상을 거부하면 철수시키겠다고 협박하는 트럼프가 미 본토에서 수천km 떨어진 대만을 위해 미군이 피를 흘리는 상황을 감수하려 할까? 트럼프 2기 정권이 들어서고 예상대로 강경한 고립주의 대외 정책을 시행한다면 대만의 운명은 사실상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나는 최소한 2024년 전까지는 최악의 사태는 발생하지 않으리라 판단한다. 시진핑 처지에서는 관망하며 미국 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무심히 흘릴 해외 뉴스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길이 유럽으로 번졌듯 양안전쟁은 한국에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다. 국가 시스템을 운영하고 세계 10위 규모의 경제를 돌리며, 국민의 삶을 유지하고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원자재와 자원이 모두 미·중 간 군사적 충돌이 유력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루트를 통해 한국에 운송된다. 미·중 교전이 본격 발생할 경우 교전 지점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주일미군 및 주한미군 기지의 부대 동원을 미국이 망설일 개연성은 낮다. 중국 인민해방군을 공격하는 데 동원되는 미 전투기의 출발지인 한국 기지를 중국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가능성도 적다. 미·중 전쟁이 격화할 경우 미국이 동맹의 의무를 운운하며 한국에 다양한 군사 지원과 참전까지 요구할 개연성은 높다. 중화제국의 위대한 귀환이라는 꿈 실현을 위해 거의 모든 족쇄가 풀린 시진핑의 다음 행보가 무심히 흘려보낼 해외 뉴스가 아닌 이유다.



신동아 2022년 12월호

한청훤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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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권모술수·우발적 사건의 결정체가 오늘의 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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