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호

삼치·단호박·시래기… 밥상 살찌우기 딱 좋은 식재료

[김민경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2-12-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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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집에는 다섯 생명이 살고 있다. 인간이 둘, 고양이가 셋이니 밥과 반찬을 만들어 먹는 입은 두 개밖에 없다. 그럼에도 찬거리를 사러 마트에 들르면 머뭇거리고 기웃거리다가 뒷걸음질 치는 날이 많다. 며칠 전에 무 1개, 잎채소 1봉지, 달걀 15개를 사고 나니 1만 원이 넘는 게 아닌가. 알뜰살뜰함이라는 것을 멀리 두고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움찔하게 만드는 물가다. 이런 와중에 친구가 삼치 한 마리를 가져다줬다. 2만 원 조금 넘게 주고 며칠을 맛있게 먹을 생선을 구해 온 친구의 장바구니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다.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물가 속 우리집 밥상의 갈 길이 얼핏 보였다.
    시래기는 무청을 데쳐 바람에 말린 것이다. 다양한 음식에 쓰인다. [Gettyimage]

    시래기는 무청을 데쳐 바람에 말린 것이다. 다양한 음식에 쓰인다. [Gettyimage]

    삼치는 10월부터 한창 살이 오르고 맛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고등어보다 훨씬 길고 넓으며, 살이 두껍고 수분이 많아 부드럽고 촉촉하다. 한 마리만 있어도 4인 가족이 실컷 먹을 양이 되고, 뼈 바르기도 어렵지 않아 요리하기도 먹기도 참 좋은 생선이다. 기름기가 고등어보다 적어 고소한 맛은 부족하지만만 그만큼 비린내도 덜하다. 등이 푸른 물고기이지만 흰 살 생선의 면모를 가지고 있어 굽고, 조리고, 끓이고, 튀겨서 다양하게 요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제철의 느낌을 밥상에 차려낼 수 있기에 음식 하는 이의 마음이 뿌듯하다.

    친구가 가져다준 삼치의 포장을 풀어보니 대가리와 내장을 제거하고 뼈를 중심으로 살을 떠서 각각 세 등분돼 있었다. 가운데 토막은 하도 커서 한 번 더 토막 냈다. 깔끔해 보이지만 핏기가 있으면 비린내가 나므로 흐르는 물에 꼼꼼하게 씻는다. 뼈가 붙은 쪽에는 피 찌꺼기가 낄 수 있으니 손으로 문질러가며 헹군다. 잘 씻은 생선 토막의 물기를 종이로 꼼꼼히 닦는다. 당장 구워 먹을 것은 앞뒤로 소금을 뿌려 간을 한다. 소금 간은 너무 짧게 하면 맛이 안 들고, 너무 오래 하면 생선의 제맛이 오히려 빠진다. 15분 내외가 적당하다. 간이 배는 동안 한 토막씩 비닐로 감싸 공기가 닿지 않게 한 다음 냉장할 것, 냉동할 것을 나눠 보관한다.

    생선에 밀가루 묻혀 구우면 비린내까지 잡아줘

    삼치구이. [Gettyimage]

    삼치구이. [Gettyimage]

    생선은 구울 때마다 다양한 실패의 맛을 내게 안겨줬다. 어떤 날은 껍질이 팬에 들러붙고, 어떨 때는 생선살에 물이 고여 싱겁고. 또 다른 날은 살집이 오그라들며 단단해진다. 덕분에 여러 해결법도 배웠다. 역시 밑간이 중요하다. 소금기가 적당히 들어야 물기가 빠지며 탄력이 살아나 구울 때 다루기 쉽다. 대부분의 생선은 껍질에 기름이 많으니 팬 바닥에 먼저 올리면 좋은데, 껍질 속 콜라겐이 수축하며 오그라들기 일쑤다. 이럴 때는 소금 간을 하기 전 껍질에 칼집을 낸다. 껍질이 쩍하고 들러붙는다면 팬이나 기름이 덜 달구어졌을 수 있다. 예열을 충분히 하고 생선 껍질에도 기름을 조금 바르자. 살집을 단단하게 익혀 먹기를 즐긴다면 살 쪽부터 먼저 팬에 굽는다. 수분이 빠지며 쫄깃함이 살아난다.

    생선 전용 그릴이나 에어프라이어, 오븐을 사용하지 않고 생선을 맛있고 보기 좋게 굽고 싶다면 밀가루가 답이다. 밑간을 한 생선에 밀가루 또는 전분을 골고루 묻힌다. 묻힌 다음에는 꼼꼼하게 두드리며 털어낸다. 이 과정에서 축축한 생선이 가루 옷을 얇게 입게 된다. 이렇게 준비해 구우면 형태가 온전하게 유지되고, 밑간도 빠져나가지 않으며, 행여 날 수 있는 비린내도 잡아준다. 게다가 조리 중에 기름이 덜 튀니 안전하고, 청소도 한결 쉽다.

    맛좋게 구운 생선을 간장양념에 조려두면 다음 날 저녁까지 먹을 수 있는 단기 저장 반찬이 된다. 간장에 설탕, 물엿 같은 달콤한 재료를 넣어 골고루 섞는다. 그다음 맛술이나 청주를 섞어 비린내에 대비한다. 마늘, 생강, 통후추, 양파, 대파, 마른고추 같은 향신 재료를 넣고 물을 타서 한소끔 끓여 양념장을 만든다. 이때 다시마나 큼직하게 썬 무를 넣어 같이 끓이면 더 맛있다. 이 양념을 구운 생선에 붓고 골고루 끼얹어가며 뭉근하게 조린다. 양념에 넣은 건더기 중 통후추나 생강 같은 것은 건져내고 나머지는 함께 끓여 생선조림을 완성한다. 고춧가루 풀어 만드는 칼칼한 조림도 좋지만 간장으로 달고 짜게 생선을 조려두는게 반찬으로 먹기엔 더 만만하다.



    얼려둔 생선은 천천히 해동해 감자나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국물을 적게 잡아 찌개를 끓이면 된다. 아니면 살을 발라 생선가스나 탕수육처럼 튀김을 해도 맛있다. 만약 냉동 생선으로 구이를 한다면 해동하지 말고 바로 기름에 지진다. 그래야 수분이 빠지지 않아 맛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쌀의 향연

    쌀도 밥상을 살찌우는 식재료로 빼놓을 수 없다. 내게 쌀은 곧 매일 먹는 밥이었기에 전혀 애착이 가는 식품이 아니었다. 당연한 밥보다는 특별한 빵에 끌렸다. 익숙하다고 밀어내던 쌀에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쌀이 밥이 아닌 다른 게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다음부터다.

    편견을 맨 먼저 깨준 것은 이탈리아식 볶음 쌀요리인 리조토(risotto)다. 쌀을 씻은 다음 살짝 불렸다가 기름에 볶고,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가며 천천히 익혀 먹는 요리다. 되직하되 부드럽게 엉켜 있는 리조토는 신기하게도 쌀알 하나하나가 동글동글 살아 있다. 리조토는 접시에 납작하게 펼쳐 담고 포크로 자르듯이 똑똑 분리해 한입 한입 먹는다. 살아 있는 쌀알이 쫀득하게 뭉개지며 머금고 있던 육즙과 재료의 풍미를 퍼뜨린다. 고소하고 풍요로운 맛이 깊다. 리조토의 맛을 내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굵직한 건더기는 되도록 쓰지 않고, 육수나 와인 또는 풍미와 색을 내는 향신료 등을 활용해 쌀에 천천히 맛을 들이며 익힌다.

    스페인 쌀 요리 파에야는 재료가 푸짐하게 들어간다. [Gettyimage]

    스페인 쌀 요리 파에야는 재료가 푸짐하게 들어간다. [Gettyimage]

    리조토와 비슷하지만 다양한 재료가 푸짐하게 들어가는 스페인의 파에야(paella)가 있다. 채소를 기름에 볶고, 해물과 토마토소스를 넣어 한소끔 끓인 다음 쌀을 넣고 뭉근히 조리한다. 중간에 조개류만 모아 따로 끓인 다음 그 육수를 부어가며 쌀을 완전히 익히고, 잘 익은 조개들을 얹어 장식한다. 파에야 역시 여러 가지로 맛을 낼 수 있는데 건더기가 꽤 푸짐하게 올라가는 편이다. 대체로 콩류는 꼭 들어가고, 다양한 고기, 초리소나 햄, 여러 종류의 채소로 화려하게 만든다. 재료가 여러 가지인 만큼 씹는 맛이나 풍미도 다채로워 재밌다. 두 쌀 요리의 핵심은 질지도 않고, 되지도 않게 쌀을 익혀 완성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조리의 번거로움을 벗어던져도 될 만큼 개성으로 무장한 쌀이 다양하다. 똑같은 백미라고 해도 같은 밥으로 지어지지 않는다. 마치 누룽지처럼 구수한 향이 나서 씹을수록 풍미가 좋다는 수향미, 지은 밥의 노화가 느려 식었을 때도 맛이 좋다는 철원 오대쌀, 명품 쌀로 꼽히는 명성에 누구보다 차지고 부드럽다는 삼광쌀, 윤기가 유난히 좋아 보는 것에서부터 입맛을 돋운다는 백진주, 돌솥밥을 지을 때 최적이라는 영호진미, 하루 종일 보온밥통에 두더라도 뻣뻣함이 없이 보드랍고 촉촉하다는 보드라미를 비롯해 300가지의 백미가 생산되고 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기능과 색을 입은 쌀도 있다. 몸에 좋은 유효 성분을 추출해 쌀에 코팅하거나 흡수시켜 만든 동충하초쌀, 인삼쌀이 있고, 영지버섯, 상황버섯 같은 건강식품으로 인정받는 버섯의 균사체를 배양한 쌀도 있다. 칼슘, 키토산, 마그네슘, DHA 등을 첨가한 영양쌀도 있으며,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필수 아미노산이 함유된 쌀이 따로 있다. 당뇨와 비만의 걱정을 덜어주는 도담쌀, 쌀눈이 3배로 커서 영양은 높고 열량은 낮은 눈큰흑찰, 색이 곱고 차지며 백미에 부족한 영양을 함유한 찰녹미, 찰홍미도 있다. 쌀 색도 흰 것부터 누르스름한 것, 녹색인 것, 붉은 것부터 검은 것까지 다양하다.

    쌀을 살 때는 도정 날짜(보름 내의 것), 쌀 수확 시기(올해 적어도 작년 것), 단일 품종 여부(혼합미는 품질이 떨어진다), 쌀의 등급(집밥이라면 특, 상, 보통까지를 선택)이 표기돼 있으니 잘 살펴보아야 한다. 혹시 쌀알을 볼 수 있다면 부서지거나 갈라지지 않고 온전한 것으로 고르자.

    박의 경계 없는 친화력, 푸근한 센스

    둥근 박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껍질이 너무 딱딱해지기 전에 수확해 먹는 것이 좋다(왼쪽). 박의 살을 띠처럼 길게 깎아 말린 박고지로 만든 무침. [Gettyimage]

    둥근 박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껍질이 너무 딱딱해지기 전에 수확해 먹는 것이 좋다(왼쪽). 박의 살을 띠처럼 길게 깎아 말린 박고지로 만든 무침. [Gettyimage]

    지난달 소고깃국 재료로 몫을 한 박도 무심한 듯 다정다감하게 밥상을 살찌운다. 우연히 큼직한 박 한 덩어리가 시댁에 굴러들어 와 서울 사는 우리 집까지 몇 쪽이 전해졌다. 박은 우리 동네 마트에서는 통 볼 수 없는 채소다. 애호박이 자란 것도 아니고, 늙은 호박이 덜 늙은 것도 아니다. 박은 그냥 박이다. 은근한 연두색의 커다랗고 둥근 박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껍질이 너무 딱딱해지기 전에 수확해 먹는다. 반으로 쪼개어 가운데 씨 부분을 파내고 껍질은 칼로 치거나 필러 같은 것으로 긁어 벗긴다. 참고로 박은 꼭지와 꽁지 부분이 단단하므로 쪼개기 전에 위아래를 칼로 잘라 없애면 썰기가 수월하다. 씨와 껍질을 제거하고 큼직하게 조각낸 다음 자주 요리해 먹는 모양으로 썰어 무나 대파처럼 냉동해 두면 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수분이 많은 재료라 냉장실에 두면 쉬 무를 수 있다.

    박을 납작하게 썰어보면 결을 가진 무처럼 아삭하지는 않다. 껍질을 벗겨낸 부분은 풋사과처럼 산뜻한 초록이고, 안쪽으로 갈수록 참외처럼 살이 희며 연하고 매끈하다. 시원한 향이 나며 익으면 연하게 단맛이 오르고 부드럽지만 쉽게 무르거나 부서지지 않아 음식을 해놓으면 모양도 맛도 정말 깔끔하다. 양지머리를 작게 썰어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납작하게 썬 박을 넣어 우르르 끓으면 불을 줄여 고기 맛을 우리고 간을 맞추면 박소고깃국이 완성된다. 중간에 파나 버섯을 썰어 넣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다진 마늘을 조금 풀어 자극을 더하기도 한다. 운이 좋고, 때가 맞으면 송이버섯 한두 개를 가늘게 찢어 넣을 수도 있다. 박은 여느 호박처럼 볶아서 나물처럼 먹기도 하고, 수제비나 칼국수에 넣어도 좋으며, 가을 낙지나 주꾸미로 탕을 끓일 때 썰어 넣으면 궁합이 딱 좋다.

    끈처럼 길고 코코넛 말린 것처럼 뽀얀 박고지는 다른 말린 채소나 묵나물처럼 물에 불리고 삶아서 요리한다. 고들고들한 식감과 달착지근한 맛을 가진 박고지는 양념에 볶거나 무쳐서도 먹지만 찌개나 탕, 조림에 넣으면 훨씬 별미다.

    바람처럼 왔다 가는 젊은 호박인 박과 달리 늙은 호박은 우리 곁에 많이 있다. 우리가 늙은 호박이라고 여기는 것을 보면 크고 딱딱하고 둥글 넙적하며, 울룩불룩 굴곡지고 탁하면서 연한 살구색이 나는 것이다. 이 호박의 본래 이름은 맷돌호박이다. 껍질이 연할 때 먹어야 하는 호박들과는 달리 늙은 호박은 껍질이 단단하게 익을수록 속이 달게 여문다. 잘 익은 늙은 호박을 힘겹게 쪼개면 눈부시게 예쁜 주황색, 말 그대로 호박색의 살이 가득 차 있다. 대체로 엄청나게 큰 이 열매 하나를 손질하면 10가지 요리는 두둑하게 해먹을 수 있다. 가족이 함께하더라도 늙은 호박 하나 손질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니 생생한 조각을 바로 채 썰어 전을 부쳐 먹는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가을 낙엽처럼 색이 고운 부침개가 얼마나 달고 구수한지 간장 낼 새 없이 먹어치우기 바쁘다. 써는 김에 고지로 만들 것도 납작하게 다듬어 한쪽에 두고 말리기 시작하면 좋다. 늙은 호박살은 단단해도 수분이 많아 말리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말리는 중에 조금씩 걷어 떡이나 찐빵을 만들 때 넣어도 좋고, 다른 채소와 섞어 튀김을 만들어도 맛있다.

    호박범벅은 식어도 별미다. 잘게 썬 호박과 쌀가루를 켜켜이 섞어 찌면 쑥버무리처럼 호박버무리를 금방 만들 수 있다. 우리 엄마라면 호박으로 당장 죽을 끓이겠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쉬운 수프를 택하겠다. 납작하게 썬 호박을 양파와 함께 푹 익도록 오일에 볶은 다음 갈아서 버터와 우유를 넣고 부드럽게 끓이면 끝이다. 이 역시 차가워도 꿀맛이다. 소금에 살짝 절여 김치처럼 버무려도 되고, 밥에 몇 쪽 얹어 곱게 쪄 먹기도 하며,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에 그저 구워 먹어도 된다.

    뭉클하고 구수한 시래기 된장

    시래기를 넣어 구수하게 끓인 된장국. [Gettyimage]

    시래기를 넣어 구수하게 끓인 된장국. [Gettyimage]

    피로가 쌓일 때면 된장찌개를 끓여 먹거나 갓 지은 쌀밥에 바삭하게 구운 돌김이나 젓갈 찔끔 얹어 한 그릇 뚝딱 비우는 거로 피로회복제를 대신한다. 물론 요즘처럼 바람이 차가워질 때는 그 냄새만으로도 따스함과 구수함이 밀려오는 시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시래기라고 하면 가을 무김치 담글 때 따로 떼어둔 무청을 데쳐서 바람에 말린 것을 말한다. 집에서는 소소하게 열무나 총각무로 김치를 담글 때 억센 줄기를 따로 떼어 시래기로 만들어두기도 한다. 무엇이든 시간을 들여 해와 바람에 말리면 본래의 맛과 다른 방향으로 깊어지고, 영양도 깃들며, 식감과 색이 달라지고, 향도 바뀐다. 대체로 더 맛있어진다. 그중에도 무청과 시래기 풍미의 간격은 특별히 넓다. 풋풋하고 아삭하던 초록의 무청이 누렇게 되고 버석하게 마르면서 산뜻함과 색이 퇴색되면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을 것 같은 마른 잎 즉, 시래기가 된다. 이걸 다시 물에 불려 삶아 요리하면 웬만한 조미료나 맛가루, 향신료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풍미가 나온다.

    아련한 흙내음, 오래 묵은 장에서 날법한 콤콤함, 고기 같은 구수함, 마른 채소 특유의 익은 내가 두루뭉술하게 어울려 난다. 이러니 시래기에 된장만 넣고 주물러 푹 끓이기만 해도 꿀맛이 날 수밖에 없다. 고추, 마늘, 파라도 다져 넣으면 칼칼한 맛이 보태져 한층 입맛을 돋우고, 마른 멸치를 한 줌 더하면 감칠맛이 진해진다. 양념한 시래기에 무와 소고기를 조금 넣고 물을 넉넉히 넣고 푹 끓이면 밥 한 덩이 풍덩 말아 국물까지 몽땅 먹게 되는 장국을 만들 수 있다. 삶은 시래기에 집된장을 넣고 꼼꼼히 주물러 한 끼 먹을 만큼씩 나눠 냉동실에 넣어두면 가을 겨우내 어지간한 밀키트를 대신할 수 있다.

    시래기와 어울리는 게 된장뿐일까. 무심함을 가장한 시래기는 백 가지 재료와 만나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고등어나 꽁치를 가지고 찌개를 끓일 때 김치와 함께 시래기를 듬뿍 넣고 조림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김치 빼고 시래기만 바글바글 끓여도 충분히 맛있다. 기름진 생선 대신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찜 만들 듯 시래기찜을 해도 좋다. 감자탕에 우거지 대신 넣으면 한결 구수한 풍미를 더해 주고, 매콤한 국물을 넉넉하게 부어 끓이는 닭볶음탕과도 잘 어울린다. 콩가루를 묻혀 살짝 찐 다음 액젓으로 간을 맞춰 먹거나, 간장양념과 함께 프라이팬에 빠르게 볶아 내면 따뜻한 찬거리가 된다. 물론 식어도 맛있다. 마지막으로 햅쌀 나는 요즘에는 삶은 시래기의 물기를 꽉 짠 다음 먹기 좋게 썰어 밥 지을 때 듬뿍 올려 먹어야 한다. 갓 지은 한 그릇 밥만으로도 식탁에 맛좋은 가을을 초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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