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으론 아니나 ‘군사적’으론…
北, ‘모든 상황’에서 核 사용 가능
공포의 균형 이루는 네 가지 방법
核 사용=종말 믿게 해야
[Gettyimage]
이번 한미 공동성명은 양국의 과거 약속을 점검하고 동맹 현안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며 미래 발전 방향에 대한 좌표를 담은 청사진이다. 현직 정치인의 선언이나 주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동성명이 비록 조약은 아니지만 ‘약속 이행을 담보하는 외교문서’와 같은 권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 국방 당국이 교전 중인 적국에나 사용할 법한 섬뜩한 용어를 사용해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 까닭은 북핵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절박한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군사적 차원에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볼 수밖에 없다. 둘째, 북한이 9월 9일 발표한 ‘핵무력 사용의 법제화’를 허풍으로 여길 수 없다. 셋째, 평화적 방법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넷째, 한국 사회 일부에서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는 자체 핵개발 혹은 전술핵 반입 주장을 고려해 북핵 대비 태세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11월 3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이 제54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 앞서 미국 국방부 청사(펜타곤) 입구에서 의장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北核은 현실이다
북한 위정자들은 ‘북한 체제의 종말’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극적으로 핵정책을 변경하지는 않을 것이나 “체제 소멸을 각오해야 한다”는 한미 당국의 최후통첩에 잠을 설칠 것이다. “김정은 정권이 끝장나는 순간”이라는 최후통첩은 북한의 핵정책, 선제 핵무기 사용 방침이 초래한 것이다.핵 관련 국제 체제, 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핵확산방지조약) 체제상 북한은 핵보유국이 될 수 없다. NPT는 핵보유국과 비(非)핵보유국 간의 경계를 명백히 한 가운데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것이다. 핵무기가 무분별하게 제조,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6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조약이다. 비핵보유국은 핵개발을 추진해선 안 되며 핵보유국은 비핵보유국에 대해 평화적 핵 이용을 지원해야 한다. 1970년 발효해 25년 후 존폐를 논의하기로 했고 1995년에 무기한으로 연장됐다. 한국은 1975년에 가입했고, 북한은 1985년에 가입했다가 탈퇴, 재가입, 재탈퇴를 거쳤다.
NPT는 1967년 1월 1일 이전 핵실험을 한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만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 그 이후에 핵을 개발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은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북한도 NPT 체제하에서, 즉 외교적 차원에선 핵보유국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군사적 차원에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은 핵보유국이다. 북한도 외교적 관점에선 핵보유국이 아니지만 군사적으론 핵보유국 지위를 얻었다고 봐야 한다. 2012년 가을 필자는 스웨덴 학술단체가 주최한 북핵 관련 회의에 참가했다. 그 회의엔 북한 학자들도 참가했다. 현재 자국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북한 참가자는 “북한도 파키스탄과 같은 국제적 대우를 받고 싶다”고 했다. 1998년 파키스탄은 핵실험을 했다. 당연히 미국의 제재가 가해졌다. 하지만 9·11사태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준비하면서 파키스탄은 미국으로부터 330억 달러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미국의 군사적 필요에 따른 것이다. 아프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국은 더는 파키스탄에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한국 국방 당국은 설령 ‘외교적으론’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군사적으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간주해야 한다. 북한은 여섯 차례 핵실험을 하고 다양한 투발 수단을 가진 나라다. 한국 국민 역시 강대국 외교관처럼, 여유롭게 NPT를 운운하며 ‘북한은 핵보유국이 아니야’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북한은 핵보유국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北의 승리 선언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9월 25일부터 10월 9일까지 김정은 총비서 지도하에 전술핵운용부대들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북한군이 미사일 발사 훈련을 진행하는 모습. [뉴스1]
①북한에 대한 핵무기 또는 기타 대량살상무기 공격이 임박한 경우
②북한지도부에 대한 핵무기 또는 비핵 공격이 임박한 경우
③북한 주요 전략자산에 대한 치명적 군사적 공격이 임박한 경우
④전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상 불가피한 경우
⑤국가 존립과 인민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경우
종합해 살펴보면 북한 지도자가 핵무기를 언제든지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천명했음을 알 수 있다. 핵무기 공격이 임박한 경우뿐 아니라 재래식 무기, 기타 대량살상무기 공격을 받거나 임박한 경우에도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했다. 특히 ⑤항은 사실상 ‘모든 상황’을 의미한다. 북한 지도자가 임의로, 어떤 상황에서든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것이며 이는 북한이 비핵보유국 한국을 언제든지 군사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남북한 군비경쟁에서 핵무기를 통해 절대우위에 섰다는, ‘승리’를 선언한 내용으로 봐야 한다.
북한은 11월 2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울릉도를 표적으로 단거리미사일을 발사했고, 경제적 배타수역으로서 사실상 영해나 다름없는 해상에 단거리미사일을 낙탄시켰다. 전례 없는 도발이다. 도발의 배경은 ‘핵무기 선제사용 법령’이다. 북한의 법령 천명 이후 한국에선 독자 핵개발, 전술핵 반입, NATO(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식 핵 공유 등으로 ‘공포의 균형(the balance of terror)’을 만들어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공포의 균형’ 이루려면…
10월 1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취재진과 출근길 문답을 하고 있다. 이날 윤 대통령은 “한미동맹·한미일 안보협력으로 북핵 위협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첫째,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방법이다.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이 시도한 정책임은 불문가지다. 핵공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기술적 부족함은 없다. 가능하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하지만 미국과의 갈등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한미동맹이 약화돼선 안 된다. 지도자의 고독한 결정, 고통스러운 과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한국 체제가 북한과 달리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대외 의존적 체제를 이루는 조건도 부담이다. 5년 단임 정권 특성상 정책적 연속성도 담보하기 힘들다. 주장하긴 쉬워도 실제로 지도자가 선택하기엔 어려울 수밖에 없는 대안이다.
둘째, 미국의 전술핵 재반입이다. 1960년대 초에서 1990년대 초까지 미국의 전술핵이 반입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있으며 전술핵 재배치에 부정적이다. 필립 골드 주한 미국대사가 최근 전술핵무기 재반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도 이와 대동소이한 미국 정부의 태도가 확인됐다.
셋째, 나토식 핵 공유다. 유럽에 남아 있는 핵탄두는 5개국 6개 미군기지에 200~330기 수준으로 배치돼 있다. 관리는 미군이 한다. 핵무기 사용 시 배치된 국가의 운반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사용 여부에 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미국이 갖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국방장관, 합참의장이 참여하는 국가통수기구(National Command Authority)를 거쳐 핵무기 사용에 대한 권한을 전적으로 행사한다. 이러한 권한은 주요 동맹국이 연루된 전쟁 상황에서도 제한되지 않는다.
다만 영국과는 핵 사용 시 사전에 협의(consultation)하기로 양자 동맹을 체결했고 NATO 차원에서도 상의할 수 있다는 규정이 존재한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핵 사용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다를 바 없다. 나토식 핵 공유는 한반도에 전술핵을 재반입하자는 주장과 내용상 거의 유사하다.
넷째, 확장억제(the extended deterrence)다. 미국의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가 냉전체제 이후 핵확산 우려 해소와 동맹국 안보를 위해 종래의 핵우산(the nuclear umbrella)을 발전시킨 개념이다. 종래의 핵우산이란 핵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의 핵공격으로 방어하는 시스템이다. 즉 확장억지는 ‘새로운 핵우산’이라 볼 수 있는데,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이 핵공격을 받을 경우 재래식 전력과 핵전력을 결합한 전력으로 방어함을 골자로 한다. 2006년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이후 연례한미안보협의회에서 확장억제 개념을 사용했고, 북핵에 대비한 한미 간 대응 태세 관련 포괄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한미확장억제위원회’로 운영을 시작해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로 북핵 대비 한미 군사 태세를 강구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운영이 사실상 중단됐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협의체를 가동했다.
6월 12일 미국 공군 B-1B ‘랜서’ 폭격기가 태평양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이는 미군의 대표적 전략자산으로 꼽힌다. 북한의 7차 핵실험 등 중대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10월 괌에 전진 배치됐다. [뉴스1]
韓美 공동 ‘북핵 대비 독트린’ 만들어야
북한의 1차 핵실험 3년 전인 2003년 국방부는 한국국방연구원에 ‘북한 핵보유 시 국방정책 조정 방향’이라는 과제를 부여했다. 당시 북핵 문제는 큰 틀에서 1994년 ‘북·미 기본합의서’에 따라 과거 핵 동결과 에너지 및 중유 제공이라는 양국 간의 빅딜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와 같은 과제를 제기한 국방부 고위 관계자의 통찰력을 이 시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북·미기본합의서가 북한의 핵보유 의지를 꺾지 못하리라는 선견지명이 빛난다. 그 과제를 제기한 사람은 후일 방산진흥회 부회장을 맡은 권안도 예비역 중장이다. 그 과제를 수행한 연구팀 중 두 명이 후일 국방부 차관으로 봉사하게 된다. 필자와 신범철 박사다. 필자는 2013년, 신범철 박사는 올해 임명됐다.당시 연구진이 제안한 핵심 대안은 ‘KORUS 핵태세검토보고서’ 작성이다. 미국의 경우 NPR(Nuclear Posture Review)이 있다. 미국 행정부가 발간하는 핵 관련 보고서다. 미국의 핵 정책과 연관이 깊으며 약 8년 주기로 작성된다. 빌 클린턴 행정부, 조지 부시 행정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조 바이든 행정부까지 총 4번 발간됐다. 미국은 해당 보고서를 바탕으로 향후 5~10년간의 핵 정책과 관련 예산 편성을 결정한다.
9·11테러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2002년 최초로 NPR에 핵무기 선제 사용 가능성을 밝혔다.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핵무기 공격을 받을 상황이 임박한 경우 핵무기를 선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진은 그러한 미국의 정책을 한미동맹의 미래에 담아야 한다고 여겼다.
올해 10월 27일 발표한 ‘2022 NPR’엔 “북한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사용하고 살아남을 수는 있는 시나리오는 없다”며 “북한이 미국이나 미국의 동맹국에 핵 공격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며 정권의 종말로 귀결될 것”이라고 적시됐다. 이러한 주장이 한국과 함께 연구, 검토되고 ‘KORUS 핵태세검토보고서’라는 이름으로 발표됐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북핵에 대한 한미의 대응은 방어적이었다. 북한의 발사기지를 파괴하고, 투발되는 미사일을 요격하고, 핵 관련 정책결정자들을 멸하는, ‘3축 체제’라는 독트린을 갖고 있다. 방향은 옳다. 그러나 올해 10월 북한 위정자가 핵무기를 만지는 순간 체제가 끝장날 것이라는 독트린이 새롭게 나왔다. 이 메시지를 북한 위정자가 믿도록 해야 한다.
한미 공동으로 ‘북핵 대비 독트린’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한편으론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도 지속해야 한다. 평화적 해결은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를 떠오르게 한다. 산 정상에 돌을 지고 올라가면 돌이 다시 굴러 내려가고, 다시 정상까지 지고 올라가는 고통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김정은 체제의 종말’이라는 말에 북한 체제가 변화하길 바란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 방문교수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국민대 석좌교수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