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릿빛 크레마 밑에 숨어 있는 에스프레소. [Gettyimage]
1976년 태어난 믹스커피는 대한민국에 마련된 크고 작은 사무실과 거의 모든 가정집은 물론이며 식당과 다채로운 노동과 축제의 현장, 온갖 여행 가방 속에 있어 왔다. 믹스커피 전에는 동결 건조한 커피, 일명 ‘알커피’와 구수한 프림, 흰 설탕을 입맛대로 컵에 넣고 섞어 마셨다. 내 인생의 첫 커피는 ‘커피 하나, 프림 셋, 설탕 셋’이었고 그 다음에는 믹스커피를 만나 지금껏 함께하고 있다.
쓴맛 부드럽게 퍼지는 버큠포트 커피
병아리콩을 닮은 헤이즐넛. [Gettyimage]
스무 살엔 친구가 신촌에 있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신촌·홍대 부근의 여러 공연장에서 활약하던 가수들이 자주 온다기에 가보았다. 마치 과학자나 쓸 것 같은 기계 즉, ‘사이폰 드립’, 정확하게는 버큠포트(Vacuum pot) 커피를 처음 보았다. 쓴맛이 부드럽게 퍼져 있고, 향긋하며, 뜨거운 대신 따끈해서 좋았다. 커피 추출 과정을 보는 재미는 좋지만 너도나도 따라하기에는 번거로운 방법이다. 지금까지도 신촌 그 카페에 가면 변함없이 버큠커피를 맛볼 수 있다. 같은 시절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베트남 쌀국수 식당이었다. 이곳의 명물은 연유 커피였다. 컵 바닥에 연유를 잔뜩 넣고, 베트남식 드리퍼에 커피 가루와 따뜻한 물을 부어 나간다. 입자가 무척 고와 탁하고 텁텁한 커피가 연유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새까만 커피와 연유를 재빠르게 섞으면 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음료가 된다. 오래지 않아 입자가 느껴지는 새까만 베트남 커피의 유행도 왔다. 믹스커피처럼 연유가 들어있는 것, 밀도 있게 쓴맛을 주는 오리지널 커피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이탈리아의 ‘커피 인심’
진공포트 커피. [Gettyimage]
현재의 내가 가진 커피 습관은 그때 뿌리내린 것이다. 기름이 돌 정도로 까맣게 볶은 커피콩을 분쇄해 추출기에 약 7g을 담고, 꾹꾹 골고루 눌러, 섭씨 90도 정도의 물을, 9bar라는 엄청난 압력으로 25초 정도 통과시켜 25㎖의 커피를 얻는다. 기름이 반들반들 도는 구릿빛 크레마 밑에 숨어 있는 에스프레소로 커피를 배웠고 내 혀는 강렬한 맛에 단단히 길들여졌다.
한국에 돌아와 작은 잡지사의 막내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이탈리아 요리 학교 동문인 편집장과 섬세한 미식가였던 발행인을 따라다니며 매끼 에스프레소를 얻어 마셨다. 그땐 내 커피의 시작과 끝은 모두 에스프레소구나 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새로 물꼬가 터진 급류에 휘말리게 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누구라도 커피만큼은 마음 편히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사진은 이탈리아 커피전문점. [Getty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