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P 7배 성장할 때 코스피 3배 올라
대주주 이익에 편중된 거버넌스 정책
기업들의 인색한 주주 환원
일관성 없는 자본시장 운영 정책
[Gettyimage]
외국인의 국내 증시 투자도 소극적으로 변하는 상황이다. 외국인의 상장주식 보유 비중은 올해 7월 정점(30.1%)을 찍었다가 8월 크게 떨어져 29.2%를 기록했다. 올해 초(27.6%)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지만 4분기(10~12월) 분위기가 녹록지 않다. 시장은 왜 코리아를 ‘디스카운트’하는 걸까.
대만에 뒤처지고, 인도에 추격당하고
한국과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 대비 주요 증시 지표 성장률을 보면 디스카운트된 우리 증시의 성적표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2023년까지 30년 동안 GDP가 4배 성장할 때 대표 지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10배 성장했다. 반면 한국은 같은 기간 GDP가 7배 성장했는데 코스피는 불과 3배 성장하는 데 그쳤다. 만약 GDP 성장만큼 코스피가 성장했다면 코스피는 6000을 넘었어야 한다고 증시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9월 말 기준 코스피는 2593.27에 불과하다. 6000은커녕 그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지난해 말 종가가 2655.28였는데 올해의 4분의 3이 지난 시점을 기준으로 돌아보면 오히려 역성장한 셈이다.
다른 지표들을 들춰봐도 비슷한 답이 나온다. 미국 투자회사 모건스탠리의 자회사인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에 따르면 MSCI 신흥국지수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11.67%로 20년 전인 2004년(18.67%)보다 7%포인트 가까이 떨어졌다. 1%를 자금으로 환산하면 무려 100조 원 규모. 비중이 10% 밑으로 내려가게 되면 단일 시장으로 리포트되지 않는다. 그래서 브라질, 멕시코, 칠레 등은 라틴아메리카로 분류돼 있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몇 해 뒤에는 ‘SOUTH KOREA’라는 이름이 MSCI 보고서에서 지워질 판이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시장은 신흥국 중에서도 비중이 가장 높았는데 이제는 중국, 인도, 대만에도 뒤처져 있다. 일본과 견주던 한국 증시는 이제 대만과 비교되는 실정이다. 국내 증시에 투자하는 개인투자자는 2019년 619만 명에서 2022년 1441만 명으로 2배 넘게 증가했다. 우리 자본시장은 국민의 자산 형성에 이바지하면서 동시에 우리 기업들의 성장 마중물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다.
전문가들은 기업 측면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가장 큰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대주주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거버넌스 정책 △기업들의 희박한 주주환원 △정부 차원의 일관되지 않은 자본시장 운영 정책이 그것이다.
자본시장에 찬물 끼얹는 기업들
10월 1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 전광판에 삼성전자 종가가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 주가는 5만원대로 내려앉으며 52주 신저가를 경신했다. [뉴스1]
최근 금융당국이 이례적으로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추진한 두산의 무릎을 꿇렸다. 7월 두산그룹은 캐시카우인 두산에너빌리티 자회사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 자회사로 편입한 뒤 두 회사를 합병하기로 했다. 해당 사실이 알려지자, 시장에서는 적자 기업인 두산로보틱스와 알짜 기업 두산밥캣의 기업가치가 거의 1대 1로 평가받은 부분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금융당국은 해당 사안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즉각 대응에 나섰다.
자본시장 법령상 투자자 보호를 위해 증권의 모집·매출 시 발행인은 증권신고서 제출 의무가 있다. 금감원은 이렇게 제출된 증권신고서 중 중요 사항의 기재가 불분명해 투자자의 합리적 투자 판단을 저해하거나 중대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경우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 금감원은 이 같은 근거 아래 7월 24일, 두산이 제출한 신고서에 대해 정정을 요구했다. 두산은 8월 16일 새로운 증권신고서를 제출했으나 금감원은 8월 26일 또다시 정정을 요구한다. 그사이 이 원장은 ‘무제한 정정 요구’를 언급했다.
급기야 두산은 8월 말 원안을 철회하고 만다. 금감원이 개별 기업의 앞길을 막는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음에도 재차 정정 요구에 나선 것은 단지 소액주주의 반발 때문만은 아니다. 2022년부터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의 취지에 두산그룹의 행보가 정면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두산이 정부가 추진하는 자본시장 선진화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2022년 7월 자본시장 민간 전문가 간담회를 열면서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을 놓고 본격적 논의를 시작했다. 당시 어젠다는 크게 8가지. △물적분할 자회사 상장 시 일반주주 보호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대응 강화 △공매도 제도 합리화 △주식 상장 폐지 요건 정비 및 상장 폐지 단계 세분화 △감사인 지정 제도 개선 △내부자거래에 대한 규제 강화 등이다.
2년이 지난 현재,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이슈가 바로 물적분할 자회사 상장 시 일반주주 보호 부분이다. 물적분할된 자회사 상장 심사를 강화해 모회사 주주에 대한 설명, 소통 등 주주 보호 노력이 미흡하면 상장을 제한한다는 것이 골자다.
앞서 언급한 두산그룹도 이 기준에 미달했다. 사실 두산그룹만의 문제는 아니다. 야당 의원들 중심의 ‘경제개혁 의원 모임’에서는 올해 국정감사에서 소수 주주 이익을 침해한 기업 경영인을 증인으로 부르기로 했다. 김민철 ㈜두산 사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강동수 SK이노베이션 부사장 등이 대상자가 됐다.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 외에도 사례는 많다. △제일모직의 구 삼성물산 흡수합병 △LG화학의 배터리 사업 부문 물적분할을 통한 LG에너지솔루션 신설 △신성통상의 상장폐지 등이다. 박유경 네덜란드 연기금(APG) 전무는 “일례로 LG그룹은 LG에너지솔루션 분할 문제로 시장에 큰 물의를 일으켰는데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다”면서 “주주 이해에 반하는 이슈를 촉발했는데도 정부 차원의 페널티가 없고, 이사회는 한마디도 못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세제 지원에 밸류업 ETF까지 나섰지만
9월 24일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기재부) 장관은 경제단체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업 상속 세제 지원을 확대해 기업 밸류업을 촉진하겠다”고 설명했다. 기업에 밸류업을 위한 유인책을 줘야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금융당국뿐만 아니라 기재부까지 나서 유화책을 내놓은 것이다. 국회도 나섰다.
여당에서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를 우선순위에 두고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상황. 이제는 야당도 금투세 폐지에 반대하지 못하는 분위기로 옮겨가고 있다.
현재까지 밸류업이 금융 부문에만 치중돼 있다는 것은 약점이다. 그나마 금융회사들은 자본시장 선진화 이전부터 타 영역군보다 주주환원을 많이 해왔다. 정부 정책의 입김을 많이 받는 터라 서둘러 추진한 점도 반영됐다.
판은 깔렸지만,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9월 26일까지 밸류업에 참여한다고 공시한 기업은 불과 13곳. 28곳은 예고 공시에 그친 수준이다. 한국거래소는 “기업 숫자가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정부 정책이 마냥 잘했다는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다. 자본시장 선진화 기조에 셀프로 찬물을 끼얹은 행보가 바로 2023년 11월 단행한 공매도 중단이다. 바야흐로 총선 주가 부양 정책으로 개미투자자들을 위해 선심 쓰듯 갑작스레 공매도를 중단한 것이다. 공매도 전면 금지에 대해 MSCI는 “한국의 공매도 접근성이 악화하고 있다”며 국내시장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스튜어드십 코드에 이사 충실 의무 필요
이 방법 저 방법을 써도 변화가 없다면 남은 건 직·간접적인 강제 조치뿐이다. 금융당국은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들의 적극적 역할을 위한 스튜어드십 코드(의결권 행사)를 강조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한국ESG기준원은 스튜어드 코드 개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탁자인 기관투자자들이 투자 대상 기업의 밸류업 활동을 점검하고 참여를 독려하게 한다는 것이다.
상법(제382조의 3) 개정 이야기도 활발하다. 스튜어드십 코드 지침 자체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상법 개정은 차원이 다르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의 이익 보호’에서 ‘회사와 주주의 이익 보호’로 바꾸는 방안을 주무 부처가 아닌 금융당국이 나서서 공론화하고 있다. 통상 야당에서 나올 법한 주장을 감독 당국 수장이 한 것.
이에 야당도 뒤늦게 가세해 힘을 보태고 있다. 이사의 충실의무와 공정 의무를 명문화해 이사가 직무를 수행할 때 특정 주주나 이해관계인의 이익에 치우치지 않도록 이사 의무를 명확히 규정하는 개정안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법 개정으로 소수 주주가 주요 의사결정을 지배하게 하는 데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다. 한국경제인협회는 9월 25일 전국 법학전문대학원 및 대학교 법학과 소속 상법 전공 교수 131명을 대상으로 의견을 물었는데 62.6%가 반대 의견을 보였다. 기업은 물론이거니와 전문가들도 등을 돌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자본이익률(ROE)이든 주가순자산비율(PBR)이든 회사 가치를 늘릴 방안과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지침, 정보 제공에 대한 시장의 요구는 커지고 있다. 기업은 상장을 통해 자본을 획득하고 이를 기반으로 투자하고 가치를 키운다. 이런 방식으로 창출한 이윤을 주주에게 직간접적으로 환원하는 것도 기업이 해야 할 일이다. 결국, 상장했다는 건 적어도 주주들에게는 공공성을 띤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상장해도 여전히 ‘내 기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오너가 운영하는 대기업 위주의 시장구조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기업의 마인드가 시장 친화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결국 이해관계자의 견제와 균형이 필요한 상황. 최근 기자가 만난 한 당국자는 정치권이나 시민사회, 언론에서 기업이 밸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일본 자본시장 업계 사람들을 만나 일본의 밸류업이 10여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를 물었는데 의외의 답을 들었다. 시민사회, 언론 등이 기업에 대한 비판을 거듭한 것이 주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든 LG전자든 기업들이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계속 묻고, 견제해야 한다. ‘이번 발표가 정녕 끝인가?’ 하고. 정부도, 주주도 모두 노력해야 바뀔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