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한국 레슬링은 이건희 전과 후로 나뉜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올림픽 레슬링 메달리스트들의 증언

  • 구례·용인=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4-11-0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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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년부터 40년간 메달 안겼던 레슬링

    • 이건희 회장이 레슬링협회장 맡고부터 조직화

    • 협회장 되자마자 선수 양성 위해 국제대회 내보내

    • 선수들 경기 모두 동영상으로 찍어 공부한 이건희 회장

    • 단지 돈 주는 후원가 아닌 목표 같이 설정한 후원가

    • “레슬링 근육을 만들어라”는 이 회장 말의 속뜻

    • 협회장 재임 16년간 레슬링 위해 건넨 돈, 300억 원

    • “이건희 회장 시절로 돌아가야 금메달 나올 것”

    대한레슬링협회장과 아시아레슬링연맹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창규 전 국민대 교수(왼쪽)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그레코로만형)이자 현재 삼성생명 소속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안한봉 감독. [박해윤 기자]

    대한레슬링협회장과 아시아레슬링연맹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창규 전 국민대 교수(왼쪽)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그레코로만형)이자 현재 삼성생명 소속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안한봉 감독. [박해윤 기자]

    ‘신동아’ 9월호에 인터뷰했던 박성인 전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은 “올림픽에서 메달 하나가 나오려면 세 겹, 네 겹의 선수 지원 생태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선수와 감독이 1순위이긴 하겠으나 그들이 연습과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올림픽은 그 나라의 경제력과 디테일한 스포츠 지원 시스템을 보여주는 창(窓)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24 파리 올림픽 양궁과 배드민턴에서 보여줬듯 협회를 운영하는 리더십도 그 단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 스포츠 종목에서 협회의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결과가 어떤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종목이 바로 레슬링이다. 레슬링은 종목을 불문하고 세계선수권대회(장창선 1966년 미국 톨레도 대회)와 올림픽(양정모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처음 대한민국에 금메달을 안긴 종목이다. 1984년 LA 올림픽부터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2008년 베이징 올림픽만 빼고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억조차 희미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김현우가 동메달을 딴 이후 2021년 도쿄 올림픽,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노 메달’이다.

    김승준(오른쪽)이 8월 7일 프랑스 파리 샹드마르스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97㎏급 패자부활전에서 루스탐 아사칼로프(우즈베키스탄)에게 패한 후 고개를 숙이고 있다. 김승준은 2-8로 패하며 첫 올림픽을 아쉽게 마쳤다. [AP/뉴시스]

    김승준(오른쪽)이 8월 7일 프랑스 파리 샹드마르스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97㎏급 패자부활전에서 루스탐 아사칼로프(우즈베키스탄)에게 패한 후 고개를 숙이고 있다. 김승준은 2-8로 패하며 첫 올림픽을 아쉽게 마쳤다. [AP/뉴시스]

    ‌이번 호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에서 레슬링 이야기를 꺼내 든 건 레슬링의 성쇠(盛衰)가 이건희 회장이란 존재 없이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한국 레슬러에게 이건희 회장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이런 질문을 품고 과거 전성기를 이끌었던 전설들을 차례로 만나기로 했다. 처음 발길이 향한 곳은 전남 구례였다.

    어느덧 구례의 공기는 서늘한 가을임을 알렸다. 낮고 평평하게 감도는 지리산이 주는 안도감과 서늘함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지리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감싸안은 곳에 안천영(79)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살고 있었다.

    레슬링의 대부 안천영의 증언

    안 감독은 한국 레슬링계의 대부(代父)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메달밭을 일궜다. 현역 시절 아버지 같은 정(情)으로 선수를 챙겼다는 평을 듣고 있는 그는 요즘에도 찾아오는 후배가 많다고 한다.

    초면의 기자를 따뜻하게 맞아주며 편안하게 무장 해제시키는 모습에서 푸근함과 순수함이 느껴졌다. 7년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의 고향인 구례에 정착했다는 그는 “지리산 정기를 받아야 한다”며 노고단 둘레길부터 걷자고 했다. 한 시간여를 함께 걸은 뒤 식당으로 향했다. 코다리찜을 안주로 막걸리를 걸친 대화가 시작됐다. 그의 레슬링 인생부터 궁금했다.‌

    한국 레슬링계의 대부(代父)라고 일컬어지는 안천영 전 감독. [구례=허문명 기자]

    한국 레슬링계의 대부(代父)라고 일컬어지는 안천영 전 감독. [구례=허문명 기자]

    레슬링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기계체조를 했어요. 경희대 체육과를 지원해 시험장에 갔다가 서울 애들 실력이 너무 좋아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해 버립니다. 올라온 김에 서울 구경이나 해야겠다 하고 두리번거리다 성동체육관이라는 곳엘 가게 됐는데 그때 레슬링이란 걸 처음 봤어요.

    선수들 경기하는 걸 한참 신기하게 보고 있는데 전순모 선생님이란 분이 오더니 ‘너는 누군데 왜 가지 않고 경기를 지켜보고 있느냐’면서 꼬치꼬치 캐물으시는 거예요. 여차저차 사정 설명을 했더니 바로 스파링을 시킵디다. 재능이 있다고 보셨는지 ‘내일부터 당장 체육관으로 나오라’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는 스승 집에서 숙식하며 지도를 받아 3개월 만에 전국체전 전북 대표로 나가 1등을 한다. 12월 세계선수권 최종 선발전에서 1등을 하면서 바라던 대학에도 입학하게 된다.

    그때가 1964년인데 레슬링이 인기 종목이었나요.

    “전혀 아니었죠.”

    근데 우리가 국제대회 첫 금메달을 레슬링에서 땄다는 게 신기합니다.

    “일본 문화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봐야죠. 김극환 회장님이라는 분이 일본 대학에서 레슬링을 배우고 오셔서 협회를 만들어 보급하셨어요.”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레슬링이 이 땅에 소개된 것은 1935년 전후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서였다. 일본 대학 강호였던 와세다·메이지대 등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떨친 곽동윤·김극환·김종석·김석영·황병관 등이 선구자라고 기록돼 있었다.

    이어 광복 이후인 1946년 3월 ‘조선아마튜어레슬링연맹’이 결성되고 1948년 7월 조선에서 ‘대한’으로 이름을 바꾼 ‘대한아마튜어레슬링연맹’이 FILA(국제아마추어레슬링연맹)에 가입하면서 우리도 세계레슬링연합의 일원이 된다.

    이건희 회장이 일본 유학 시절 세계적 영웅이던 역도산의 경기를 보고 감명을 받아 레슬링을 한 게 당시 레슬링 강국이던 일본 내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거였군요. 본격적으로 이건희 회장과의 인연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나요.

    “1982년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제약 소속으로 뛰다가 은퇴하고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레슬링협회 김정상 부회장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나갔더니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건희 회장님이 막 협회를 맡아 새롭게 꾸려나갈 때였어요.

    제가 좀 난색을 표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이긴 했지만 대표팀 감독 수명이라고 해야 길어야 2, 3년인데 그 이후를 보장받을 수 없으니 생계가 막막해진다는 거였죠. ‘어떻게 하면 좋겠냐’ 물으시길래 ‘삼성에 레슬링팀을 만들어주면 삼성 소속 감독으로 대표팀을 겸직할 수 있겠다’고 했지요. 며칠 뒤 회장님이 직접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독대하게 됐습니다.”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왜 국가대표팀 감독을 사양하느냐 하시더라고요. 앞에 말한 대로 똑같이 말했지요. 그랬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삼성팀을 만들어주겠다’ 하시는 거예요.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고등학교 때 레슬링을 하신 분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애정이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안 감독이 의욕을 내면 다 지원해 주겠다, 좋은 성적만 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동아제약을 그만두고 국가대표팀과 삼성 감독을 맡게 된 거죠.”

    왜 감독님을 찍었을까요.

    “김 부회장님에게도 똑같이 물은 적이 있는데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느낌에 회장님이 지목한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노 메달이 되니까 감독과 코치진을 새롭게 꾸려야겠다고 하신 것 같아요. 원로들에게도 물어보고 하면서 ‘안천영’이라는 이름을 들으신 것 같아요.”

    그는 이건희 회장을 처음 만난 날, 이전까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레슬링할 때 주로 어떤 손가락의 힘을 쓰느냐’는 질문이었어요. 레슬링이 유도처럼 악력(握力·쥐는 힘)이 중요하긴 한데 그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가운데,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을 주로 씁니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더라고요.

    그다음에는 골프를 치느냐, 운전은 하느냐 물으시길래 ‘골프는 안 치고 운전은 합니다’ 했죠. 핸들을 잡을 때 어떤 손가락을 주로 쓰느냐 생각해 보라 하셨어요. 한마디로 힘을 쓸 때 ‘생각을 하며 쓰라’는 거였죠. 실전에 급급한 저 같은 선수 입장에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죠.

    회장님의 그날 말씀은 마치 화두처럼 제 머릿속에 오래 남아 움직임에 대해 더 세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선수 지도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좀 더 이론적으로 개념화하고 정리해서 지도해야겠구나’ 하는 동기부여를 하게 해주셨죠.

    또 하나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당신이 경험한 것으로 볼 때 ‘기술도 중요하지만 상대를 꼭 이겨야겠다,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더라’는 거예요. 실제로 선수를 하셨던 분의 말씀이어서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 말씀도 이후 오랜 시간 제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협회장이 되자마자 우리 선수들이 국제 대회에 나갔죠.

    “제가 직접 말씀을 드렸어요. 좋은 선수를 키우려면 국제 대회 현장에서 잘하는 선수들하고 부딪쳐야 된다고요. 그랬더니 ‘바로 추진하라’고 하셨지요. 그 추진력에서 뿜어져 나온 힘이 선수들에게 얼마나 자부심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회장님이 저렇게 나오는데 우리도 목숨을 걸자’ 이런 분위기가 되는 거죠.”

    이건희 회장이 직접 전략 지시

    회장께서 직접 경기의 세세한 부분까지 전략적으로 조언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88 서울올림픽이 한창 치러지고 있는데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곧 있을 다음 경기에 감독으로서 전략이 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우리가 출전하는 경기를 모두 동영상으로 다 찍어 공부를 마친 상태였어요. 저는 이런 걸 모르는 상태에서 불려간 거고요.

    제가 ‘상대 선수가 태클이 약하니까 이 부분을 집중 공략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씀드리면 ‘다른 방법은 없겠냐’고 물으세요. 답을 드리면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때로는 미심쩍어하시고 그랬어요. 그럴 때 ‘제가 감독이니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하면 흔쾌히 받아주셨어요. 88 서울올림픽 때는 거의 매일 아침 만나서 그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전날 우리가 뭘 잘하고 잘못했다는 피드백까지 주셨습니다.”

    간섭한다는 느낌은 없었나요.

    “전혀요. 그렇게 일이 바쁘신 회장님이 동영상까지 보고 비교 분석하시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얼마나 예리한지 정말 도움이 많이 됐고요.

    1992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도 현장에서 지켜보시면서 응원하고 조언해 주셨어요. 사모님하고 같이 스탠드에서 지켜보시다 좀 의심스러운 게 있으면 김 부회장님을 통해 ‘이런 건 좋다, 이런 건 좀 더 할 수 없느냐’ 하셨죠. 단지 후원자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레슬링과 선수를 아끼고 사랑하셨어요. 애정을 갖고 옳은 얘기를 해주는 것처럼 도움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또 다른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회장님이 룰이나 경기 운영에 얼마나 박식하셨냐 하면 88 서울올림픽 때 김영남 선수가 금메달을 따요. VIP석에 사모님과 경기를 지켜보면서 응원해 주셨습니다. 제가 시상대로 올라가기 전 운영진에 양해를 구하고 함께 VIP실로 가서 인사를 드렸어요. 그랬더니 ‘여기를 바로 오면 어떡하냐, 도핑 테스트 가야 되잖아’ 이러시는 거예요. 그런 것까지 다 알고 계시다니 놀랐죠. 온몸이 땀범벅이었던 김 선수를 껴안아 주시며 ‘정말 큰일했다’고 격려해 주시던 두 분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의 말처럼 이건희 회장은 지도자들을 직접 불러 구체적 전략을 조언했다는 것이 이번 취재에서 여러 차례 확인됐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레슬링연맹(FILA) 심판위원장을 지내며 국제심판으로 활약한 김익종 씨(이하 존칭 생략)의 증언이다.

    “단지 돈을 주는 후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목표를 같이 설정하고 그걸 이루게끔 지원했습니다. 1984년 LA올림픽에 제가 심판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매일 밤 12시에 회장님이 부르셔서 묵고 계신 숙소에서 만났어요. 저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날 경기를 전부 보고받으시고 다음 날 예상 성적을 직접 챙기셨습니다. 대화가 새벽 3시까지 이어지니 저는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레슬링 선수에서 협회장까지

    고교생 이건희가 레슬링에 입문한 것은 1958년 봄 서울사대부고에 입학하면서부터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당시를 기록한 유일한 사람이 김필규 전 KPK통상 회장이다. 그는 2019년 서울사대부고 동문들의 수필 모음집 ‘우리들의 이야기’ 8호에서 고교 3학년 때 신입생으로 만난 이건희 회장을 이렇게 적고 있다.

    “강당 한구석 레슬링반에서 7, 8명의 신입생 지망자들과 상견례를 했는데 유난히 피부가 희고 눈이 깊고 귀티가 나는 사람이 있었다. 훗날 삼성을 이끌게 되는 이건희 학생이었다. ‘왜 하필 레슬링반을 지원했느냐’ 물었더니 ‘초등학교 시절 몇 년을 일본에서 살았는데 세계 프로레슬링의 영웅이었던 역도산의 경기를 많이 보고 존경했다. 나도 하고 싶어졌다’고 답했다.”

    이건희 회장과 50년 지기로 알려진 김 전 회장은 이 회장 영결식에서 ‘승어부(勝於父)’라는 단어로 추도사를 해 화제가 됐다. 승어부는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말로, 이것이야말로 ‘효도의 첫걸음’이라는 거였다. 기자는 영결식 후 지인의 소개를 통해 김 전 회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홍라희 여사가 직접 청해 추도사를 하게 됐다는 뒷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었다.

    고교 시절 레슬링반에서 이건희 회장을 스치듯 본 사람이 또 있으니 바로 김창규(85) 전 국민대 교수(대한레슬링협회장, 아시아레슬링연맹회장 역임)다. 역시 사대부고 레슬링반 출신인 그는 1990년부터 2017년까지 27년간이나 아시아레슬링연맹 회장을 하면서 앞서 소개한 김익종과 함께 한국이 낳은 대표적 국제레슬링협회 행정가다.

    기자는 경기 용인시 그의 집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김 전 회장은 한눈에 보기에도 다부지고 맑고 환한 얼굴에 우렁찬 목소리여서 8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고교 시절 만난 이건희 회장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우리 시절에는 고등학교마다 수영부, 럭비부, 레슬링부 같은 체육부가 있었습니다. 서울사대부고는 레슬링 명문고였지요.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 체육학과에 58학번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코치나 감독이 따로 없어서 선배들이 모교를 찾아가 지도해 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후배들 지도한다고 학교를 찾았는데 1학년 레슬링부에 갓 들어온 이건희 회장을 체육관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부잣집 아들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내놓고 티 내는 상황은 아니어서 그저 그런가 보다 했지요. 다부지고 눈매가 깊고 매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스치듯 만났던 이건희 회장을 다시 조우한 건 그로부터 24년 뒤인 1982년 3월로 이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이사회 멤버로 들어가게 되면서부터다. 김창규는 이때 회장으로부터 들었던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고 했는데 앞서 만난 안천영 감독과 비슷한 맥락의 증언이었다.

    “제게 ‘레슬링 근육을 만들어야 된다’고 하셨어요. 운동선수라면 근육 키우는 일이 당연한데 ‘레슬링 근육’이라고 딱 꼬집어 말하니 뭔가 선명하게 목표가 선 것 같았어요. 단지 일반적 근육이 아니라 레슬링에 걸맞은 근육을 키우라는 말이잖아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가서 운동생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대학교수를 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 나름대로 운동선수 몸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데 그런 저로서도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레슬링 근육을 만들어라’는 말 속에는 어떤 한 분야에 깊이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즉 자기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공부나 기술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라 운동에도 해당하는 얘기였지요.”

    이건희 회장이 레슬링 선수로 활동하긴 했어도 협회장까지 맡게 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앞서 안천영 감독 말을 조금 보태자면 사정은 이렇다. 1981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문교부(현재 교육부)에서 체육국을 떼내 체육부를 출범시키고 초대 장관에 ‘2인자’였던 노태우 당시 무임소장관을 임명했다.

    그리고 올림픽 메달 유망 종목 지원을 대기업에 맡겼다. 지금 한국의 대기업들이 각 종목을 지원하게 된 시스템은 이렇게 나온 거였다. 그 결과 탁구협회는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복싱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유도는 박용성 두산그룹 사장이,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이었던 이건희 회장에게는 대한레슬링협회가 주어졌다. 김정행 전 대한체육회 회장은 1980년대 기업이 경기 단체를 맡으며 한국 스포츠가 도약하게 됐다고 말한다.

    재벌들이 스포츠를 맡은 사연

    “1980년 전에는 한국 스포츠가 굉장히 침체돼 있었습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이 열리면서 국민들도 스포츠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지요. 대통령이 나서서 재벌에 스포츠를 맡기지 않았다면 전폭적 지원은 힘들었지요. 또 협회를 맡은 기업 간에 경쟁이 붙어서 성적이 많이 올라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 스포츠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해외 원정도 다 돈이지요. 지금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해외에 나가 보면 한국은 정말 보잘것없는 나라였습니다. 제가 1960년대 세계선수권대회나 각종 국제 대회에 가면 한국의 존재감은 전혀 없었어요. 다 일본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훈련도 항상 일본에 가서 하고요. 그러다 88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일본이 오히려 우리한테 와서 훈련하고 배우고 갔습니다.”

    다음은 레슬링협회 전무였던 장창선(1966년 세계선수권대회 첫 금메달리스트)의 회고다.

    “제가 1972년부터 레슬링협회 기획 총무를 맡아 실무적인 일을 했습니다. 5공화국 정부가 대기업 회장들에게 체육단체를 맡긴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협회 관계자들 거의 모두는 최적임자가 이건희 회장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렵게 삼성그룹 비서실에 선을 대 협회 관계자들과 함께 회장을 만나 맡아달라는 청을 드렸고 흔쾌히 승낙하셨지요. 제가 향후 메달 계획 등 구체적인 보고서를 만들고 선수들을 어떻게 키웠으면 좋겠다는 세부 사안들을 보고하고 결재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목표를 무조건 크게 잡아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2년 후인 1984년 LA 올림픽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각각 금메달 2개를 반드시 따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작게 잡으면 되겠습니까, 더 크게 잡아야 합니다. 스포츠나 회사 경영이나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원대한 비전과 계획을 세워서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하셨어요.”

    이건희 회장을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는 그는 회장의 승부사적 기질도 엿보았다고 했다.

    “‘해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하고 있느냐’고 혼난 적도 많았습니다. 아주 단호하셨죠. 맘에 안 들면 한참 들으시다가 ‘그것밖에 안 되냐’고 야단을 치셨어요.”

    ‘자의 반 타의 반’ 형태로 협회장을 맡은 이건희 회장은 앞서 안천영 감독 증언에서 나오는 김정상 신라호텔 부사장을 부회장으로 파견해 살림(재무이사)을 맡기는 등 협회를 적극적으로 다져나갔다.

    이번에는 국제연맹심판위원장을 지낸 김익종의 말이다.

    “회장님이 협회를 맡은 후 그야말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메달을 딸 수 있는 합당한 방안이 있다면 돈에 신경 쓰지 말고 뭐든 가지고 오고 실행을 해봐라. 1~2년을 보지 말고 10년을 내다보라, 2년 뒤 LA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면 실망하지 말고 그다음에는 반드시 따겠다는 계획을 갖고 추진해라’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희가 가장 먼저 말씀드린 것인 해외 전지훈련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돈이 없어서 상상도 못 했거든요. 국제연맹에서는 ‘선수 1인당 올림픽을 치르기 전에 적어도 36게임 정도는 국제 경기를 경험해야 금메달을 노려볼 수 있다’는 데이터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니까 ‘하면 되지’ 해서 처음으로 유럽의 레슬링 강국들을 차례차례 가게 됩니다. 대부분 동구 공산권 국가들이었는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그때만 해도 우리와 수교도 안 된 나라에 한두 달씩 선수를 파견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파격적 지원이 결국 올림픽 메달밭을 일구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여기에 외국인 코치도 불러올 수 있으면 돈에 구애하지 말고 데려오라고 하셨고, 심판의 판단이 민감하게 작용하는 레슬링의 특성상 국제연맹의 임원이나 국제심판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니 그것도 추진하라고 하셨습니다.”

    훗날 아시아 레슬링 행정계의 거목이 되는 김창규 전 아시안레슬링연맹회장도 이렇게 말한다.

    “회장님이 협회장을 맡기 전 선수들은 국내 경기나 훈련에만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이 오신 뒤로 레슬링 강국 선수들과 연습 게임도 하고 경기도 해보면서 국제화에 눈을 뜬 거죠.

    협회 차원에서 매년 두 차례 전지훈련을 했는데 그때는 레슬링 강국들이 모두 공산권이었어요. 수교도 안 된 러시아(그때는 소련)를 비롯해 폴란드·헝가리를 다닌 거죠. 회장님의 파격적 지원과 정부의 든든한 보호가 없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죠.

    1982년 폴란드 바르샤바 세계선수권대회 때 제가 선수단장으로 갔었는데 한국과 수교가 안 된 상태이다 보니 영사관이 한국에 없어서 비자를 받기 위해 일본 도쿄에 있는 주폴란드 대사관까지 가야 했습니다.

    저로서는 또 다른 큰 소득이 있었는데 폴란드 선수들로부터 매년 세계대회 스케줄을 얻을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무슨 대회가 어디서 열리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우물 안 개구리였는데 연간 해외 경기 스케줄을 얻으니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듯 눈이 확 뜨여서 미리 대회 준비를 할 수가 있었죠.”

    “전지훈련으로 나는 다른 사람이 됐다”

    그렇다면 해외 전지훈련은 선수들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기자는 과거 전설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찾아 나섰다. 우선 만난 이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자유형) 박장순(55) 현 삼성생명 감독이다.

    그는 88 서울올림픽과 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따 한국 격투기 종목 선수로는 유일하게 올림픽 3개 대회 연속 결승 진출이라는 신화를 만든 인물이다. 레슬링의 그랜드슬램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 2016년 세계레슬링연합(UWW)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아시아인이기도 하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던 그는 현재 삼성생명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박장순. [용인=허문명 기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박장순. [용인=허문명 기자]

    그를 만난 곳은 경기 용인시 삼성트레이닝센터였다. 삼성 내 스포츠단 소속 선수들이 훈련하는 선수촌이었다. 박 감독은 일본 전지훈련에서 막 돌아온 직후였다. 그는 이건희 회장을 두고 “아버지 같은 분”이라는 표현을 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나요.

    “회장님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해외 전지훈련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선배님들이 1982년부터 소련을 위시한 헝가리·폴란드·동독 등 레슬링 강국을 다녔어요. 다녀오면 ‘외국 선수들 기술은 어떻더라’ 전수해 주었는데 그 배움의 효과란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옆 굴리기도 그렇고 그라운드에서 팔을 잡거나 목을 잡는 기술 등등 우리가 배우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거든요. 우리는 좀 단순했다고 할까. 외국 선수들은 말 그대로 자유자재인 거예요. 처음엔 적응이 안 될 정도였어요. 어떻든 그런 사람들하고 경기와 스파링을 하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새로운 기술을 익히게 되니 기술 발전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는 거죠. 몸으로 습득하지 않고는 내 것이 되지 않거든요.

    저는 1987년 헝가리에 처음 전지훈련을 가서 한 달 반 동안 있었는데 프랑스·러시아·폴란드·동독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을 모두 만나며 경기를 하니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저희 레슬링 선수들은 완전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해외여행 자체가 쉽지 않던 시절에 공산권을 다니며 훈련했으니까요.

    헝가리 갈 때는 반공 교육도 안기부(현 국정원)에서 따로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회장님 파워가 있었으니까 여행이 안 되는 나라에 선수를 보낼 정도가 된 거죠. 한국과 수교가 없던 상대국에서도 위험부담을 갖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전지훈련이 끝나고 몇 달 뒤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 6등을 하는데 대학교 2학년이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고 선배들이 격려를 많이 해줬어요. 제 몸에 새로운 기술이 각인되면서 바닥을 완전하게 다져서 기본기를 익힌 덕분이었습니다. 그때 체험이 없었다면 88 서울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없었을 겁니다.

    88 서울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전지훈련 가도 무시당하거나 얕잡아보는 게 역력했고 상대도 잘 해주려 하지 않았어요. 기술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고요. 처음엔 속도 상하고 말로만 듣던 세계적 선수들을 상대하려니 두려움도 있었는데 자꾸 접하다 보니 없어졌습니다.

    국내에서는 레슬링이 비인기 종목이었지만 회장님이 메달을 딸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다 지원해 주겠다고 하셨으니까 선수들이 자부심이 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림자가 너무 큽니다.”

    기자는 박 감독과 함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그레코로만형)이자 현재 삼성생명 소속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안한봉 감독도 이어 만났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현우. [세계레슬링연맹]

    2012년 런던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현우. [세계레슬링연맹]

    ‌현역 시절 악착같고 끈기 있는 경기 운영으로 유명했던 그는 성공적인 지도자로 변신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수제자 정지현 선수가 금메달을 따도록 이끌었으며, 김현우 선수를 발탁해 키워 2012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 기록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2013년에 아시아인으로 처음 국제레슬링연맹이 선정하는 올해의 최우수 지도자가 됐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도 대표팀을 이끈 그는 한국 레슬링의 부활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그의 말이다.

    “회장님이 협회장을 맡고 계셨던 시절엔 박장순 감독이나 제가 제일 막내였지요. 처음엔 한 체급에 한 명씩만 보냈다가 나중에는 한 체급에 세 명씩 전지훈련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게도 그런 기회가 왔지요. 대표는 아니었지만 미래 유망주로 껴서 해외 무대를 경험해 보니 ‘나도 올림픽 메달을 딸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회장님만 생각하면 ‘하늘 같은 은혜’라는 표현이 떠 오른다”고 했다.

    “직접 선수 생활을 해보셨기 때문에 선수들의 고충을 잘 알고 계셨어요. 지도자들도 직접 불러서 상대방 분석 잘했느냐, 아시아 쪽 기술은 이런 기술인데 유럽 기술을 배워라 이런 구체적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감독, 코치 선배님들로부터 회장님의 레슬링에 대한 열정을 들을 때마다 힘이 솟았지요.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회장님이 태릉선수촌을 방문하셨을 때 ‘이번에도 금메달 나올 수 있나?’라고 물으셔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했더니 ‘열심히 가지고는 안 된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도 부족하다. 꼭 금메달을 이으라’고 하셨어요. 그때가 마지막으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안 감독은 말수가 적고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눈빛이 특히 투명하고 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희 회장에 대한 그리움이 눈빛으로 전해져 왔다.

    해외 코치 영입 처음 시도한 종목이 레슬링

    한편, 한국 레슬링의 도약에는 해외 코치 영입도 한몫했다고 하는 증언도 있었다. 해외 무대에서 오래 활약한 김익종의 말이다.

    “해외 전지훈련과 함께 해외 코치를 영입해 상시적으로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한국 레슬링을 비약적으로 도약시킨 계기가 됐습니다. 우리 전체 스포츠 종목 중에 해외 코치를 영입한 건 아마 레슬링이 처음일 겁니다.”

    가장 대표적 사건이 헝가리레슬링협회장을 지낸 자바 헤게뒤시 영입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국 레슬링의 부흥은 헝가리에서부터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헤게뒤시를 코치로 영입한 것이 우리가 레슬링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면서 그는 영입이 이뤄진 배경을 이렇게 전했다.

    “1985년에 일본으로 선수들을 데리고 전지훈련을 갔다가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수석 코치로 헝가리 선수들을 데리고 온 헤게뒤시를 만났어요. 자국에서는 차관급으로 대우를 받고 있었지요.

    제가 거의 매일 밥 사주고 술 사주면서 ‘한국에 한번 와보라’고 했지요. 그 친구는 한국이 어딘지도 모를 때였어요. 제가 지극정성으로 마음을 열었더니 정말 날짜를 잡아 서울에 왔습니다. 한국에서 가족처럼 대해주며 전체 일정을 함께했는데 마지막 날 ‘한국에 코치로 와달라’는 저희의 청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한 달 만에 자기 나라에서 허가를 받았다는 연락을 합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과 헝가리는 수교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더욱이 헝가리는 사회주의 국가였습니다. 헤게뒤시 소식을 들은 헝가리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왜 헤게뒤시가 남한으로 가느냐’고 헝가리 정부에 항의했을 정도였습니다.”

    헤게뒤시가 대표팀 코치를 맡게 되면서 선수들은 1986년 동구권 국가에 처음으로 전지훈련을 가게 됐고, 헝가리를 무대로 펼쳐지던 레슬링 강국들의 대회에 참가하는 기회도 얻게 됐다고 한다.

    이즈음 레슬링계로서는 전례가 없었던 50일간의 동구권 전지훈련도 있었는데 이때 배운 기술이 메달 박스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는 게 이구동성이었다.
    다시 김익종의 말이다.

    “헤게뒤시 영입에 이어 또 큰 사건이 러시아 코치 이반 야리긴을 영입한 겁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2개나 딴 사람으로 세계적 코치로 알려진 분인데 그분도 일본에서 만나 잡아왔습니다(웃음). 우리가 원체 따뜻하게 잘해 주니까 다들 오겠다고 한 거죠.

    아까 헝가리 때도 그랬지만 이런 분들이 영입되면 현지 훈련할 때도 큰 도움을 얻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존재감이 약하니까 현지에서도 상대 선수를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네 나라 레슬링 영웅이 코치를 하니 대접이 달라지지요. 올림픽 메달리스트들과 파트너가 돼 연습도 하고 서울로 불러서 배우기도 했고요. 이 모든 경비는 당연히 모두 회장님이 지원해 준 겁니다.”

    한편, 한국 레슬링이 글로벌 무대에서 힘을 갖고 도약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당시 국제레슬링협회의 거목이었던 밀란 엘세간 회장(유고슬라비아)과 이건희 회장의 친분이 결정적이었다고 김창규는 말한다.

    “제가 영어를 잘하다 보니 협회에서 국제이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세계레슬링연합 회장이었던 엘세간 회장이 국제 레슬링 행정의 리더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데 1984년 LA올림픽 때 이건희 회장이 오셔서 제가 두 분이 만날 수 있게 다리를 놓게 됩니다.

    회장님이 이듬해 엘세간 회장을 서울로 초대했는데 정말 극진하게 대접했지요. 엘세간 회장은 이런 환대에 고마워했고,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한국의 잠재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체험하고 갔습니다. 이후 제가 아시아연맹 회장이 되는 데 발판이 돼주었습니다.

    스포츠라는 게 경기에서는 이겨도 결과에서는 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협회에서 파워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게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희 회장님이 이런 생태계를 워낙 잘 알고 계셔서 가능했던 거지요.”

    88 서울올림픽이 완전 올림픽이 된 사연

    이번에 기자는 88 서울올림픽이 공산권 국가를 포함해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자유 진영과 공산권 진영이 모두 참여하는 동서 화합의 상징적 무대가 된 배경에 이건희 회장의 결정적 공이 있다는 것을 듣게 됐다. 김익종의 증언이다.

    “회장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제가 86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연맹 심판이 됩니다. 지금에야 털어놓지만 88 서울올림픽이 완전한 올림픽이 된 건 회장님 덕이 큽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1984년 LA 올림픽이 미소 냉전으로 공산권이 보이콧하는 반쪽 올림픽이었거든요. 그렇다 보니 서울올림픽에 공산권이 참가하느냐, 안 하느냐가 빅 이슈였습니다. 개최 2년 전까지 참가 신청한 공산권 국가가 하나도 없었어요.

    마침 직전 해인 1987년 프랑스 세계선수권대회 때 회장님이 직접 프랑스로 가서 엘세간 회장을 포함한 국제연맹 임원들과 식사를 하면서 그 문제를 논의하게 됩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한 헤게뒤시죠. 삼성 코치를 끝내고 헝가리에서 대표팀 총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함께했던 헝가리 체육부 장관을 소개하면서 ‘올림픽 문제를 협의하고 싶다’고 했어요.

    이튿날 제 호텔 방에서 헝가리 체육부 장관하고 회장님과 미팅이 이뤄졌죠. 헝가리 장관은 ‘우리 대통령이 삼성전자를 헝가리에 유치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며 올림픽 참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협의가 돼 회장님이 헝가리를 직접 방문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헝가리에 삼성전자가 들어가고 88 서울올림픽 참가도 정부 간 협의가 이뤄지면서 급물살을 타게 되지요.

    마침내 헝가리는 공산권 국가 중 최초로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이후 러시아 눈치만 보던 동구권 국가들도 속속 참가하겠다고 나섰습니다.”

    88 서울올림픽 당시 이건희 회장은 국제연맹 관계자들에게 극진한 접대를 했다고 한다.

    “심판, 국제연맹 이사회 멤버 등 105명 정도가 리버사이드 호텔에 묵었습니다. 회장님이 이분들을 다 부부 동반 초청을 해서 네 차례나 만찬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회장님 인기가 최고였지요. 다들 ‘삼성, 삼성’ 해서 브랜드 이미지도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올림픽 때마다 88 서울올림픽에 왔던 이들을 만나면 ‘역대 올림픽 중에서 서울이 최고였다. 고맙다’고 했습니다.”

    한편 1980년부터 20년 가까이 레슬링 담당 기자로 일해 국내 최고 레슬링 전문기자로 꼽히는 이종세 전 동아일보 체육부장(현 대한언론인회 부회장)도 “이건희 회장이 서울올림픽 기간 중에 엘세간 회장 부부를 신라호텔에 묵게 하고 한남동 자택에 초대해 극진하게 대우했다. 부인에겐 아름다운 한복도 선물했다”고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다.

    “이 회장이 국제연맹 임원들을 각별히 챙긴 것은 유명합니다. 특히 1987년 여름 프랑스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가 기억에 남습니다. ‘파스칼의 원리’를 개발한 프랑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고향이자 세계적 타이어 미슐랭의 본사가 있는 클레르몽페랑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저도 현지 취재를 갔습니다.

    1년 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때여서 선수들 간 경쟁도 치열했는데 이 회장이 직접 대회 현장을 방문한 것은 물론 며칠씩 묵으며 선수들을 격려했습니다. 당시 스위스 론진에 주문해 만든 삼성 홍보용 손목시계를 엘세간 회장 등 임원진과 심판진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마음을 많이 써주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자유형 48kg급 이상호가 우승을 하자 ‘금메달 절반은 회장님 덕분’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이 회장은 기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언론에도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제가 출입기자단 간사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해마다 연초에 레슬링 담당 기자들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줘서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요. 한 4, 5년 계속됐는데 이 회장은 저희 기자들에게 ‘잘한 건 빼고 문제점만 지적해 달라’며 메모를 해가며 들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정확하지는 않은데 제가 ‘선수들 부상 방지를 위한 테이프를 들여올 필요가 있다, 레슬링 선진국들엔 다 있는데 우리는 없다’고 하자 ‘좋은 아이디어’라며 ‘뉴욕 지사에 연락해 빨리 준비해 보라’고 지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익종에 따르면 “국제연맹에서 한국의 존재가 빛을 발하면서 선수들 사기가 올라 경기 결과도 좋아졌다”고 한다.

    “어느 종목이나 그런 게 있지만 레슬링은 특히나 심판 영향이 다른 종목에 비해 큽니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2점 짜리가 노 포인트도 되고 1점과 2점 중간도 되고요. 나중에 비디오 판독을 해도 카메라 위치에 따라 애매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아무래도 국제 무대에서 파워가 있는 쪽에 기울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판정을 번복한다든지, 없는 점수를 받아줄 수 있는 거는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심판 입장에서는 불공정하다는 항의를 받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업의 생존과 관련된 일이라 최대한 공정하게 하려 합니다.

    하지만 한국 레슬링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심판 판정으로 인한 억울한 일이 없게 된 건 회장님이 오신 뒤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대회에 나가면 먼저 한국이라고 알아봐주는 일이 생겼으니까요. 이건 제가 역대 올림픽에 13번을 참가해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국제연맹에서도 회장님을 굉장히 의지했습니다.”

    국제연맹에 대한 각종 인프라 지원도 있었다고 한다.

    “스위스 로잔에 국제레슬링연맹 본부가 있는데 라파엘 마티네티 심판위원장이 1992년부터 회장을 맡습니다. 이건희 회장님과 직접 통화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중간 역할은 했지만 필요한 건 직접 전화해서 국제연맹 사무실의 모든 TV, 전자 시스템을 삼성 걸로 기부해 줘서 한 2~3년 전까지는 전부 제공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1988년 상무체육관에서 서울올림픽 메달리스트와 함께한 이건희 회장(뒷줄 한가운데). [대한레슬링협회]

    1988년 상무체육관에서 서울올림픽 메달리스트와 함께한 이건희 회장(뒷줄 한가운데). [대한레슬링협회]

    세계 최고가 되려면 분석을 하라

    한편 전지훈련과 함께 레슬러들의 기억 속에 각인돼 있는 것이 VTR 분석이었다. 다시 김익종의 말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협회 임원들이 회장님한테 혼이 많이 났습니다. VTR 분석을 지금까지 미루고 안 했냐고 말이죠.”

    VTR 분석이라뇨?

    “지금이야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는 게 일상이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회장님께서 전체 경기를 비디오로 찍어서 숙소에 TV를 설치해 전력 분석을 하게 해주셨는데 다른 나라도 그런 시도를 한 곳이 별로 없었어요. 회장님이 ‘경기 전에 선수들 모아놓고 경기한 걸 전부 찍어서 보여주라’고 했는데 저희가 한발 늦어 많이 혼났습니다.”

    안한봉의 증언도 비슷하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직접 선수단 숙소에 오셔서 첫 질문이 ‘상대 선수들 분석 다 끝냈느냐’였어요. 다들 우물쭈물하니 ‘경기가 내일모레인데 어떻게 하느냐. 이러면 백발백중 진다. 상대를 알아야 상대를 이기지’ 하시더니 현지 삼성전자를 통해 TV와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를 넣어주셨습니다. 매 라이벌들 경기를 촬영한 것이었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난공불락이었던 미국 레슬링의 전설 케니 먼데이를 극적으로 이겨 금메달을 딴 박장순도 이때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대학 입학 때까지만 해도 56kg 체급이었으나 88 서울올림픽엔 68kg급으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74kg급으로 체급을 두 번이나 올려가며 3연속 메달을 딴 이례적 기록을 갖고 있다.

    “88 서울올림픽 때 먼데이(미국 74kg급)가 금메달 따는 경기를 현장에서 봤는데 ‘나중에 꼭 한번 붙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길처럼 솟았어요. 하지만 체급이 달라 도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체중 조절에 애를 먹었어요. 나이가 어릴 때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근육이 계속 자라는데 제어가 안 되더라고요. 1g이라도 줄여보려고 주먹으로 제 코를 때려 코피를 내고 뛴 적도 있어요. 흐르는 쌍코피를 휴지로 틀어막고 운동장을 뛰고 또 뛸 만큼 간절했고 힘들었어요.”

    결국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2년 앞두고 74kg으로 체급을 올린다.

    “코치님이나 감독님들은 결사반대를 하셨죠. 레슬링에서 체급을 바꾼다는 건 리스크가 매우 커요. 몸이 달라지니 기술도 달라지고 밸런스도 무너지니까 힘을 쓰는 지점이 달라지거든요. 한 체급에서 제대로 된 기술을 익히는 게 짧게는 5~6년, 길게는 10년도 걸립니다.”

    하지만 그는 적응에 성공해 이후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권을 얻는다. 그러면서 꿈에도 그리던 먼데이와 치열한 대결을 펼치게 된다.

    “연전연패였죠.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대회를 치를수록 점수 차가 좁아졌다는 겁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직전에 미국 US오픈이 다섯 번째 대전이었는데 0대 0까지 가다가 마지막에 근소한 차이로 지면서 ‘아, 내가 언젠가는 이길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그는 올림픽 3개월 전부터 일절 친구도 만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으며 수도승처럼 살면서 먼데이와 치를 대결전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올림픽 결승에서 경기 종료 15초를 남기고 이기는 역사적 한판승을 올리게 된다. 이때 박장순은 선수촌에 마련된 VTR 전력 분석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선수촌 거실에서 VTR로 먼데이가 다른 나라 선수들과 붙어 싸우는 경기를 몇 번씩 돌려 보면서 분석하니 전략이 더 입체적으로 섰습니다. 경기장에서 보는 건 한계가 있잖아요. 비디오로 자세히 보니 어떤 식으로 어떻게 공략해야 점수가 나겠다는 감이 오는 거죠.”

    나를 바꾼 한 마디

    이번에 기자는 한국 레슬링의 전설들을 만나면서 몸을 쓰는 체육인들은 말이 짧기 마련이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순수해 진심이 담겨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역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이 회장을 추억하며 ‘은혜’라거나 ‘아버지’라는 표현을 쓸 때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작 이들은 회장으로부터 들었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자신의 삶에서 큰 동력이 됐다고 말한다.

    박장순은 88 서울올림픽 때 이 회장이 자신에게 던진 한마디가 바르셀로나 신화를 만드는 힘으로 이어졌다고 회고한다.

    “1987년 프랑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회장님을 처음 가까이서 뵀어요. 헝가리에서 한 달 반 훈련을 하고 프랑스로 넘어온 상황이었습니다. 안천영 감독님을 필두로 국가대표 선배들까지 20명 정도 함께 만났는데 일일이 악수를 하며 ‘시합 잘하라’라고 하며 떠나시던 뒷모습이 생생합니다.

    이후 태릉선수촌에도 몇 번 오셨는데 저희가 허리에 15kg짜리 주머니를 매달고 10m 로프에 오르는 훈련과정을 보여드리면 흐뭇하게 미소 지으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때만 해도 회장님은 제 입장에선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존재였죠.

    그러다 대화를 나눈 것은 88 서울올림픽 끝나고 신라호텔로 선수단을 불러 저녁을 사주실 때였어요. 그렇게 맛있는 스테이크는 처음 먹어봤어요. 씹지도 않았는데 녹는 느낌이랄까(웃음).

    4년 전 LA 올림픽 때 금메달 딴 김원기 코치님, 88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김)영남이 형이나 (한)명우 선배에게 ‘지도자 수업하려면 외국어 공부도 필요하다, 유학도 생각해 봐라’ 같은 말씀을 주셨는데 저를 보시더니 ‘이렇게 젊은 선수가 은메달을 땄으니 차기 올림픽에서는 꼭 금메달 따라’고 하셨어요. 워낙 말씀이 없는 분이시잖아요. 그 투명하고 깊고 따뜻한 눈으로 저를 보시며 ‘꼭 금메달 따라’고 하셨을 때 그 눈빛과 말씀이 제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목표 의식이 더 확 생긴 거죠.

    이듬해 베이징아시안게임에도 직접 오셔서 격려해 주셨어요. 스탠드에 앉아서 저희가 경기하는 거 바라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어요. 정말 든든했지요.”

    먼데이를 이겨 금메달을 따겠다는 약속을 결국 지킨 셈이 됐네요.

    “네. 정말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웠죠. 회장님이 직접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셨는데 악수할 때 전해진 그 손바닥의 촉촉함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회장님은 뭐랄까, 굉장히 투명한 분이라고 할까. 눈빛을 보면 푹 빠져들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분이에요. ‘다음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야지’ 하실 때도 압박이 아니라 포근함으로 느껴졌어요. 지금 저도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때 선수들이 얼마나 회장님 밑에서 행복하게 운동을 했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뿌듯하죠. 그때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요.”

    이 회장의 말과 행동이 선수들 마음에 각인된 경우는 또 있다. 김창규의 증언이다.

    “88 서울올림픽 결승 때 한명우 선수가 그전 게임에서 머리를 많이 다쳤습니다. 국제레슬링연맹 닥터가 ‘이런 상태로는 힘들다’라고까지 했는데 꿰매고 붕대를 두르고 싸워 금메달까지 땄어요. ‘붕대 투혼’이라고들 했죠. 회장님이 한 선수에게 금메달을 걸어주셨는데 대견해하시면서 ‘이런 몸으로 금메달을 땄다는 건 대단한 거다. 기업 경영을 하는 나도 한 선수의 투지에 많이 배웠다. 레슬링협회장으로서 자부심을 갖는다’라고 말씀해 주셔서 다들 눈시울이 붉어졌던 일이 있습니다.”

    안한봉은 홍라희 여사의 ‘한 마디’도 함께 소개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였는데 당시 선수촌이 좀 빈약했어요. 경기장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회장님이 선수들 불편하면 안 된다고 따로 경기장 가까운 곳에 호텔을 얻어주셔서 경기가 있는 선수들은 거기서 식사도 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편의까지 제공해 주셨어요. 당시 홍 여사님도 함께 관중석에서 태극기를 열심히 흔들면서 응원해 주셨지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에도 회장님께서 직접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셨는데 시상식이 끝나고 안천영 감독님하고 VIP룸으로 갔습니다. 여사님하고 이재용 현재 회장님 세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때 여사님이 저를 보시더니 ‘체구도 작으신데 어디에서 그런 악바리 근성이 나왔어요? 정말 시합 잘 봤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싸우는 모습이 정말 멋졌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레슬링의 재도약을 위해

    앞서 소개한 이종세 전 동아일보 기자는 “이건희 회장이 스포츠계에 이바지한 공로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함께 영원히 기록될 만하다. 한마디로 스포츠계에 ‘빛’만 남겼지 ‘그림자’는 남기지 않았다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성싶다”고 한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은 레슬링뿐 아니라 육상·빙상·배드민턴·탁구 등의 경기단체를 삼성그룹이 맡도록 해 아낌없는 투자를 지휘했다. 협회 회장 재임 기간(1982~1997) 동안 올림픽 7개, 세계선수권 4개, 아시안게임 29개 등 모두 40개의 금메달을 따 한국 레슬링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지급하는 대한체육회 포상금(금 100만 원, 은 50만 원, 동 30만 원)과 동일한 금액을 선수들에게 추가로 지급하는 등 재임 15년간 한국레슬링을 위해 300억 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요즘 한국 레슬링의 현실을 보면 안타깝다고 했다.

    “2012년까지 회장사를 맡았던 삼성이 퇴장하면서 일부 레슬링인들이 협회 주도권을 잡기 위해 법정에서 파벌 싸움을 벌이고 있어 협회가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2021년 4월 법정 싸움 끝에 육가공업체 CKF 푸드시스템의 조해상 회장을 제36대 회장으로 영입했지만 아직도 구 집행부 임원들과의 법정 시비가 이어지고 있어 뒤숭숭합니다. 이를 지켜보는 원로들 마음은 안타깝지요. 무엇보다 레슬링인들의 단합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그래야 바닥을 치고 올라가 영광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부 안천영 전 감독의 당부다.

    “지금 현실은 저를 비롯해 우리 레슬링인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지금은 기술이 평준화돼 톱클래스 수준은 세계적으로 다 비슷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력이죠. 이건희 회장님이 터전을 만들고 꽃피웠을 때의 그 정신으로 돌아가 바짝 정신 차리고 새롭게 거듭나겠다는 마음을 먹고 개조한다면 2~3년 뒤 다음 올림픽에서는 금메달도 나올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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