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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고 집요한 통섭의 천재니까”

잘나가는 스타트업 ‘레진’이 ‘덕후’를 우대하는 까닭

  • 권정혁 | 레진엔터테인먼트 CTO xguru@lezhin.com

“빠르고 집요한 통섭의 천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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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업무 외에 무언가에 심각하게 빠져 있는 분(자전거, 레고, 다트 던지기, 식도락 등 온갖 종류의 덕질)’.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를 운영하는 레진엔터테인먼트가 채용공고에서 ‘우대 사항’으로 ‘영어·일어 능력자’보다 앞서 밝힌 문구다. 전설의 ‘만화 덕후’ 한희성 대표가 세운 이 스타트업엔 ‘덕업일치’를 이뤄 행복한, 기상천외한 덕후들이 대거 서식 중이다. 이 회사가 “덕후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융합형 인재”라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
잘알려졌다시피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御宅)’에서 나왔다. 오타쿠는 일본에서 만화, 게임 등 특정 분야 취미에 심취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어가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오’가 빠지고 ‘덕후’라는, 다소 한글화한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선 일본에서처럼 부정적이기보다는 ‘특정 분야의 마니아’라는, 썩 나쁘지 않은 느낌으로 쓰인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레진엔터테인먼트(이하 레진)는 왜 ‘덕후를 우대’하고, 직접 나서서 ‘덕후를 찾아내’려고 애쓸까. 우선 만화·게임 분야에선 덕후를 많이 찾아볼 수 있고, 레진이 ‘디지털 만화’ 웹툰을 주력 사업으로 하기 때문에 레진과 덕후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덕후가 업무적으로 가진 남다른 미덕 때문이다.



즐거운 일 하며 살 순 없나?

사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종종 혹은 자주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회사를 다니는가. 우리 회사는 어디로 가고 있나. 나는 왜 재미없는 일을 하러 꾸역꾸역 회사에 나갈까. 왜 회사에선 내 취미와 적성을 숨겨야 하나. 퇴근 후나 주말에만 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한데….

이런 의문에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회사를 옮기거나 아예 직종을 바꿀 생각을 하게 된다.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살 순 없을까?’ 이것은 우리가 회사를 시작하면서 한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해진다.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 레진의 사명(社命,Mission Statement)은 ‘모두를 즐겁게 하라’다. 여기서 ‘모두’는 콘텐츠 저작자(만화작가), 플랫폼 개발자, 그리고 독자다. 콘텐츠 저작자가 정당한 수익을 얻을 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고, 플랫폼 개발자인 레진 직원들이 일하는 게 즐겁고 재미나면 좋은 콘텐츠가 많아져서 결과적으로 독자들도 즐거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콘텐츠 저작자는 레진이 추구하는 수익 모델을 통해 돈을 번다. 그렇다면 플랫폼 개발자인 레진 직원들은 어떻게 하면 즐겁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만화를 좋아하는 덕후들을 우선해 채용하는 것이다. 만화가 너무 좋은 사람들은 하루 종일 만화를 봐야 하는, 또 볼 수밖에 없는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콘텐츠 저작자와 독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한다면 덕후들도 사명감을 가지지 않을까.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그래서 레진은 재무·인사담당자부터 마케팅·홍보·고객대응 담당자 및 프로그램 개발자까지 모두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만 골라서 뽑았다. 레진의 핵심 사업인 만화와 웹툰에 대해 남다른 열정과 애정을 가진 사람만 모였기에 더욱 흥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만화 덕후만 모인 게 아니었다. 레진 식구들은 만화를 좋아하는 것은 기본이요, 그 외에도 다양한 취미를 가졌다. 취미의 범위가 참으로 넓고, 사회 일반에 비해 심도가 꽤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각 분야 덕후들은 회사에도 큰 자산이 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J모 PD는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았다. 그는 ‘스타워즈’와 ‘마블’의 세계관에 푹 빠진, 전형적인 미국 문화 덕후다. 지난해 스타워즈 에피소드7의 예고편이 공개된 날, 그는 큰 화면으로 예고편이 보고 싶어서 미국의 영화관을 찾았다. 여러 관을 돌아다니며 여러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스타워즈 예고편만 반복해서 본 것이다.



‘스타워즈’ 광팬, 게임 마니아…

재미난 것은, J PD처럼 스타워즈 예고편만 보러 몰려다니는 미국인 무리를 발견했다는 사실. 바로 의기투합한 J PD와 미국인 무리는 영화관 문닫을 때까지 버티며 예고편을 수십 회 감상하고 나왔다. 그러고는 영화관 앞 주점에서 맥주를 마시며 스타워즈와 그날 공개된 예고편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다.



J PD는 레진의 만화를 영어 버전으로 번역하고, 미국인들을 상대로 레진코믹스 영어판을 운영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 만화와 미국 만화를 잘 아는 덕후야말로 레진코믹스를 영어권에 알리는 데 가장 적합한 인재일 것이다. 레진은 지난해 말부터 미국 사업을 본격화했는데, 그는 이 분야에서 자신의 지식과 역량을 한껏 발휘하고 있다.

L모 본부장은 일본 문화 덕후다. 일본에서 공부했고, 만화인들의 꿈인 지브리스튜디오 입사를 지원해 최종면접까지 갔지만 아쉽게 탈락했다. 그 뒤로도 일본에서 애니메이터이자 만화가로 일하다 고국으로 돌아와 일본 만화를 수입하는 업체에 입사했다. 이 회사 직원으로 다시 일본으로 나가 1년 반 동안 머물며 일본 문화에 더욱 푹 빠졌다.

L본부장은 액션 피겨 시리즈 ‘초합금혼’을 수집하고, ‘건프라’(건담 프라모델)를 색칠해 책상에 올려두는 것을 즐긴다. 또 일본 곳곳 지방도시의 잘 알려지지 않은 거리를 혼자 걷기를 좋아한다. 현재 L본부장은 레진의 일본 사업을 총괄한다. 그 누구보다 일본 문화를 잘 알고, 일본의 만화회사들과 절친한 그는 레진의 일본 사업에 딱 맞는 덕후다.

또 다른 L모 PD는 ‘덕후 천국’ 레진 내에서도 ‘진성 덕후’로 통한다. 그는 게임 마니아다. 그는 콘솔용 게임팩(CD)을 꼭 두 개 사서 하나는 포장된 채로 두고 나머지 하나만 까서 즐긴다. 그는 늘 뭔가를 계속해서 사고, 해외에서 물건이 그 앞으로 속속 도착한다.

L PD는 레진에서 무슨 일을 할까. 레진 만화를 기반으로 한 게임을 기획한다. 그는 과거 2차원 아케이드 게임의 각종 전통을 되살린 게임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그는 레진에서 만들 간단한 게임에서도 자신이 즐기던 게임들의 반응성을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꼼꼼하게 챙기느라 바쁘다. 자신의 취미와 관심을 일에서도 멋지게 살려내며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참, 레진이 직접 만드는 출판물 상품에도 L PD의 손길이 들어간다. 레진은 소장을 목적으로 하는 독자들을 위해 주문제작 형식(크라우드펀딩)으로 출판하는데, 여기에는 독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상품들이 포함된다. 최근 레진의 모 만화책 초판 한정판을 출판하며 일본에서 주로 볼 수 있던 다키마쿠라(안고 자는 베개)를 포함시켰다. 이 한정판은 20만 원 상당으로 꽤 비싼 가격에도 출시 몇 시간 만에 품절됐다.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추가 제작되기도 했다. 역시 최고 품질의 상품을 만드는 데는 덕후가 최고다.



열정을 바치는 ‘습관’

S모 PD는 대학 시절부터 일본 라이트 노블(light novel)에 빠진 덕후다. 그는 라이트 노블을 읽고 감상문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길 좋아하는데, 하루에 한 편씩을 독파한 뒤 감상문을 올리는 기행(奇行)을 몇 달간 할 정도로 심취한 적도 있다. 일반 직장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재미도 없는 일을 계속하는 건 내게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라이트 노블을 만드는 출판사에 취업한다.

S PD는 현재 ‘레진노벨’을 담당한다. 일본의 수많은 라이트 노블을 읽고, 순위 차트를 들여다보며 국내 독자들과 잘 맞는 라이트 노블을 찾아 번역, 한국에 출판한다.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출판하고 싶어 레진에 왔죠.” 이른바 ‘덕업일치(宅業一致)’의 대표적 사례다.

K모 PD는 보드게임 마니아다. 보드게임을 아주 좋아해서 주말에는 따로 동호인들과 모여 보드게임을 즐긴다. 그는 매년 독일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보드게임 박람회인 ‘에센 페어’에 자비를 들여 참석한다. 새롭게 출시되는 다양한 보드게임을 직접 보고 구입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취미로 보드게임을 ‘만든다’. 그렇게 만든 게임이 2014년 대한민국 게임대상 보드게임/아케이드 부문에서 상을 탔다. 그 게임에는 K PD와 친한 만화가들이 그려준 아트워크(Art Work)가 포함됐다.

여기서 다 소개할 순 없지만, 이들 외에도 회사 곳곳에 이런 덕후 기질을 갖춘 인재들이 자신의 끼와 역량을 발휘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른바 ‘덕질’하는 친구들이 회사에 도움이 될까? 당연하다.

무엇보다 덕후들은 업무에서 뛰어난 집중력을 보여준다. 일만 잘 맞는다면 자신의 업무에 온 힘을 쏟아 한 치의 흠집도 없이 일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 열정을 다 바치는 기질이 일을 할 때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덕후 개개인에게 잘 맞는 일을 줄 수 있는 회사라면 덕후는 최고의 인재다.



多能人, Multipotentialite

TED 강연 ‘어떤 사람들에겐 하나의 천직이 없는 이유’에서 작가이자 예술가 에밀리에 왑닉은 일생에 다양한 흥미와 직업을 갖는 사람들을, 자신은 ‘다능인(Multipotentialite)’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다능인은 자신이 관심을 갖는 여러 분야의 아이디어를 통합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남보다 습득력이 빠르다고 한다. 한 가지에 몰두하고, 그다음 또 다른 것에 몰두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아이디어 통합과 빠른 습득력이야말로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사회가 가장 갈망하는 재능이 아닐까. 덕후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한 가지에 진득하게 빠져서 잘하지만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갖고 누구보다 빠르게 습득하고, 자신이 가진 경험들을 잘 융합하는 사람이다. 일도 잘하고, 취미생활도 잘하는 다능인 같은 사람을 융합의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덕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레진은 덕후일수록 자신의 영역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역에서도 남다른 성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게다가 요즘처럼 모든 산업 영역에서 변화가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전문성과 빠른 습득력, 그리고 이것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섭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새로운 여건에서도 누구보다도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심도 있게 파고드는 사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역량을 버무려 신선한 결과물을 멋지게 만들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덕후다. 그래서 레진은 구인 활동을 할 때 이렇게 외친다.

“쿨한 덕후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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