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호

史記에 길을 묻다 / 마지막회

하룻밤 술자리에도 영원한 ‘내 편’은 없다

외교는 ‘자주적 예술’이다 下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입력2016-05-02 08: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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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 외교에서 영원한 내 편은 없다.
    • 그래서 약자의 외교는 예술적 경지에 올라야 한다.
    • 스스로 주인이 돼 주도해야 한다.
    • 항우와 유방의 운명을 뒤바꾼 세기의 술자리 ‘홍문연(鴻門宴)’이 주는 교훈이다.
    세기의 술자리 ‘홍문연’의 주역은 항우와 유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주객임엔 틀림없지만 주역은 아니었다. 1차적으로 이 술자리 전체를 연출한 사람은 항우의 최측근 범증이다. 유방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얻은 이상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항우도 범증의 계획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항우는 머뭇거렸고, 범증은 직접 항장에게 손을 쓰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가 나타났으니 항우의 숙부 항백이었다. 유방의 참모 장량과 인연이 있던 항백은 이 음모를 유방 진영에 고자질했고, 항장의 검무(劍舞)에 맞서 유방을 보호하는 수호천사 노릇까지 자청했다. 위기를 느낀 장량도 번쾌를 불러들여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그 틈에 유방을 빼돌려 사지를 벗어났다.



    홍문연의 X맨

    홍문연의 전 과정을 꼼꼼히 살피면 이 술자리를 중국사의 명장면이자 세기의 드라마로 뒤바꾼 사람은 다름 아닌 항백임을 알 수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X맨’ 그 자체였다.

    홍문연과 관련해 유방 진영의 주역은 1차적으로 항백과 개인적 친분을 맺은 장량이지만, 술자리를 극적으로 마무리한 주역은 번쾌였다. 번쾌는 항우에 당당히 맞서 논리적으로 유방을 변호하고, 유방에게 서둘러 자리에서 빠져나가도록 재촉함으로써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볼 대목은 항백의 이적행위다. 항백은 그 중차대한 시점에서 어떻게 대놓고 항우와 범증을 ‘배반’할 수 있었을까. 2013년 개봉한 영화 ‘초한지-천하대전’에선 마치 항백이 천하 백성의 평화를 위해 이적행위를 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적 상상력에 불과할뿐더러 설득력도 떨어진다. 패권을 두고 사생결단을 벌이는 양 진영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항백의 위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런 그가 유방을 죽이려는 항우에 맞서 그가 보는 앞에서 유방의 목숨을 지키려 칼을 뽑은 사실은 이적 행위이자 항명이다. 이는 죽음을 면키 어려운 행위이지만 항백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항우의 반응과 태도도 의문이다. 범증의 각본대로 움직였다면 천하대권의 주인은 일찌감치 자신으로 낙착됐을 것이고, ‘초한쟁패’니 ‘패왕별희’니 하는 드라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항우는 유방을 변호하는 항백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고, 유방의 변명에 대해선 자신에게 사람을 보내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려 한다고 알린 유방의 좌사마 조무상을 핑계 대며 얼버무렸다. 또한 항장의 검무에 맞춰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달라는 범증의 눈짓을 3번이나 무시했다. 이어 번쾌의 항의에 맥없이 술만 권했고, 유방이 줄행랑을 치며 남긴 선물인 벽옥을 고이 받음으로써 거창하게 시작된 연회를 싱겁게 끝내고 말았다.

    홍문연은 이렇게 유방의 기사회생으로 마무리됐고, 이후 천하는 초한쟁패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유방으로서는 정말 다 죽었다가 살아난 셈이다. 사지인 줄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었던 술자리를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빠져나왔으니 말이다. 유방은 승리할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항우와의 전투를 피했을 뿐 아니라 사지에서 살아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함양성에 먼저 입성해 진나라 백성의 인심까지 얻었으니 이런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조직보다 의리

    홍문연은 항우의 처절한 실패작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연출가 범증의 실패작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범증은 항우와 멀어졌고 결국 항우를 떠났다. 범증을 잃은 항우는 급전직하 주도권을 잃은 것은 물론 천하의 패권마저 유방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런 점에서 홍문연은 천하대권의 향방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유방을 사지에서 구한 주인공은 항우 진영의 항백이다. 따라서 항백의 이해 못할 행위를 먼저 분석하고, 이어 기타 인물들의 당시 행위를  따져본 다음 이 세기의 장면을 마무리할 필요가 있겠다.

    홍문연은 항우가 유방을 살려줬기에 패한 것이 아니라 뒤이어 벌어질 일련의 실패, 그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역사의 명장면은 결말보다는 그 결말의 한 자락을 슬며시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이런 장면이 아닐까.

    항백은 유방을 제거하려는 범증과 항우의 계획을 유방 측에 고자질했고, 홍문연에선 유방을 찌르려는 항장의 검무에 맞서 유방을 보호했다. 항백의 유방 사랑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 뒤 유방의 가족이 항우에게 포로로 잡히고,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 태공을 끓는 물에 삶아 죽이겠다며 유방을 협박할 때도 태공을 죽이지 말 것을 권했다. 대체 항백은 왜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유방을 보호했을까.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항백은 유방이 아니라 장량을 보호한 것이다. 항백은 과거 살인자 신분으로 수배당했을 때 장량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항백에겐 이런 사사로운 은원(恩怨)관계가 조직의 이익보다 중요했다. 이것이 이른바 지은필보(知恩必報)의 ‘협의(俠義)’정신이라는 것이다. 전국시대를 풍미한 유협(遊俠)들의 의리와 정신적 유산이 항백은 물론 당시 사람들에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항우가 항백의 건의에 흔들린 것이나, 일을 그르치고도 항백을 문책하지 않은 건 그런 전통적 의식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어린애’의 ‘婦人之心’

    하지만 협의정신의 유풍이 항우의 결단을 가로막았다고 해서 항우의 모든 행위가 납득되는 건 아니다. 대세를 중시해야 하는 리더로서 항우의 판단과 결정은 항백의 그것과는 엄연히 달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항우는 유방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항우의 행동엔 유방을 인정하지 않고 깔보는 오만한 심리가 작용했다. 그래서 유방의 사죄를 그냥 받아들였다. ‘네까짓 것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는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러면서 조무상을 핑계 댄 것은 그 절정이다.

    항우의 이런 오만함엔 그의 기질이 함께 작동했다. 훗날 한신은 유방 앞에서 항우를 평가하며 항우의 마음 씀씀이를 ‘부인지심(婦人之心)’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 같지만, 실은 ‘여자의 마음’ 같아서 중요한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의미다.  

    항우의 이런 우유부단함을 놓고 그의 최측근인 범증이 항우를 ‘어린애’로 표현한 점도 눈길을 끈다. 그러면서 범증은 유방을 ‘패공(沛公)’이라고 높여 불렀다. 범증은 둘의 운명을 ‘어린애’와 ‘패공’이란 호칭의 차이로 예견한 셈이다. 범증이 이보다 앞서 함양성 입성 이후 유방의 태도에 대해 정확하고 예리한 분석을 내놓으면서 유방을 제거하라고 한 것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세가 역전될 수 있음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우는 노회한 범증의 분석을 수용하지 못했다. 항백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한 이면엔 범증의 수를 읽지 못한 항우의 자질 부족과 소심함이 숨어 있다.



    반면 유방은 항우의 기질을 제대로 간파한 듯하다. 항우가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장량을 통해 항백을 포섭하고, 이어 홍문연에선 항우에게 한껏 자세를 낮추는 기막힌 연기력을 보였다. 유방이 다른 사람에게 비굴할 정도로 몸을 낮춘 것은 이날 홍문연에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했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이것이 ‘상황 리더십’이다. 유방의 처신은 절묘했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항우, 항백, 범증의 관계다. 초나라의 전통상 가족관계는 대단히 중요했다. 진나라에 패망한 뒤로 백성들 사이에선 ‘초나라에 단 석 집만 남아 있어도 진을 멸망시킬 나라는 초나라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진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이런 원한은 가족관계를 단단하게 결속시켰다. 그렇다면 항우에겐 범증보다는 숙부 항백의 존재감이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범증의 계획을 따르기보다는 항백의 권유를 수용한 것이다. 여기에 범증과 항우의 세대차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방, 대세에 올라탄 자

    한편, 항우의 기를 꺾은 번쾌의 마무리는 이 세기의 드라마를 보다 극적으로 만드는 흥행 장치로 손색이 없다. 이 모든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예물까지 챙겨 술자리를 마무리한 장량의 빈틈없는 단속도 홍문연 감상의 포인트라 할 것이다.

    범증의 기획-항백의 기밀 누설-장량의 준비-항백의 권유-홍문연 개시-유방의 연기-항우의 얼버무림-범증의 신호-항장의 검무-항우의 무시-항백의 방어-번쾌의 항변-항우의 포기-유방의 탈출-장량의 마무리로 이어진 홍문연은 마치 잘 짜인 각본에 따른 긴박감 넘치는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이것이 역사적 팩트가 갖는 매력이자 힘이다. 팩트를 뛰어넘는 픽션은 없다.

    어쨌거나 홍문연이 있은 지 4년 뒤 항우는 오강에서 자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죽는 순간 항우의 뇌리를 스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혹여 홍문연의 술자리는 아니었을까.

    유방, 아니 장량의 수호천사 항백은 유방이 기원전 202년 천하를 재통일하고 2년이 지나 사양후라는 작위를 받았다. 홍문연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유방 가족의 목숨까지 구한 공로의 대가였다. 그뿐 아니라 유방과 같은 유씨 성까지 하사받았다. 문득 항백이야말로 모든 상황을 예견한 진정한 고수가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흔히 하는 말로, 인간사는 정말 알 수 없다. 역사는 정녕 우연과 우연이 연속되면서 필연적 결과를 만드는 것인가. 그렇다면 유방은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다. 역사에 작용하는 운, 이걸 대세라고 하는 것 아닐까. 난세에 대세를 읽는 사람은 책략가이고, 대세를 움직이는 사람은 영웅이며, 대세에 올라타는 사람은 최후의 승자이자 리더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홍문연을 감상하는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다. 유방이 술자리를 빠져나간 다음 항우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누군가를 시켜 유방을 불러오게 했다. 그 ‘누군가’가 중요하다. 홍문연에서 단 한 장면 잠깐 등장하는 그 사람이 누군가. 바로 진평(陳平)이다. 당시 항우 밑에서 도위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다. 진평은 얼마 뒤 유방에게 귀의해 유방의 핵심 참모가 되는데, 모르긴 해도 이날 홍문연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 게 아닐까. 진평이 항우를 떠나 유방에게 건너간 사건은 초한쟁패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대목인데, 그 복선(伏線)이 다름 아닌 홍문연에 깔려 있는 것이다.

    또 하나! 훗날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최대 공신이자 당대 최고의 명장, 한신은 당시 어디에 있었을까. 분명한 사실은 유방이 홍문연 이후 한중으로 들어갔을 때 한신도 거기 있었는데, 그전까지는 항우 밑에 있었다는 것이다.

    홍문연은 이렇듯 ‘before’와 ‘after’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 술자리였다.



    역사를 바꾸는 술자리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3가지를 공자는 식(食), 색(色), 성(性)이라고 했다. 공자란 위인은 이런 점에서 참 꾸밈이 없다. 그의 언행록 ‘논어(論語)’엔 공자의 그런 풍모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중국인의 바이블’이란 별명이 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기 위한 원시적 본능에 만족하지 못했다. 먹고 마시는 자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고, 이 때문에 역사상 흥미로운 사건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특히 술자리가 역사를 바꾸는 경우까지 벌어졌다.

    고대 사회에서 술과 여자, 사냥은 권력자의 기호에 속했다. 이 때문에 패가망신은 물론 나라까지 망친 자들이 속출했다. 이 3가지는 정도가 지나치면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중에서 술과 술자리는 아주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역사에 깊숙이 개입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에서 역사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우리 현대사를 극적으로 바꾼 10·26사건도 술자리에서 터졌고, 온갖 정치적 스캔들이 술자리에서 비롯됐다. 이 때문에 국가 최고권력자가 피살되고, 정치적으로 파산한 자가 여럿 생겨났다. 술자리가 한 개인의 몰락은 물론 역사까지 바꾼다는 말이 그리 과장이 아닌 것이다.



    왜 主人이 돼야 하나

    최근 중국에서 출간된 어떤 대중 역사서엔 중국사를 바꾼 10대 술자리가 소개됐는데, 홍문연은 실패한 술자리 1위로 꼽혔다. 이 술자리가 실패였는지 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홍문연은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많은 명장면 가운데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술자리다.

    홍문연은 항우와 유방 두 사람은 물론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닌 외교적 대결이었다. 즉, 참모들의 지혜와 리더의 결단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경지에 오른 명장면이었다.

    이제 결론을 위해 시계를 2015년으로 돌려보자. 2015년 9월 미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첫 방문지 시애틀에서 가진 만찬 연설에서 미국을 겨냥해 중국 고전과 역사서의 구절을 인용했다. 하나는 ‘사마법’이라는 병법서와 ‘사기’ ‘평진후주보열전’에 나오는 ‘국수대(國雖大), 호전필망(好戰必亡)’이라는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이장군열전’에 인용된 ‘도리불언(桃李不言), 하자성혜(下自成蹊)’라는 오랜 속담이다.

    앞의 명구는 ‘나라가 비록 크다 해도 전쟁을 좋아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고, 뒤의 속담은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아래로 절로 길이 난다’는 뜻이다. 앞은 명백히 미국을 겨냥한 말이고, 뒤는 넌지시 중국을 가리킨 것 같다. 뒤의 말은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달고 맛난 과실을 주렁주렁 달면 사람들이 알아서 제 발로 찾아와 길을 낸다는 뜻이다. 전쟁과 같은 무력이 아니라 어진 덕으로 이웃과 잘 지내면 절로 찾아오고 가까워진다는 비유다.

    이와 함께 최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인용한 ‘항장무검(項莊舞劍), 의재패공(意在沛公)’을 함께 놓고 중국의 의중을 파악해보면 얼추 퍼즐이 맞춰질 것이다. 나라가 크고 힘이 세다고 자꾸 힘으로 다른 나라를 때리면 언젠가는 부메랑이 돼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지 6개월도 채 안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가 불거졌다.

    중국은 그것을 명백히 자국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이 앞장서서 춤을 췄다는 의미로 홍문연을 끌고 들어왔다. 당장 미국에 대한 보복은 어렵더라도 결국 미국에 경고를 겸해 한국에 대한 보복이 어떤 방식으로든 뒤따를 듯하다. 시 주석이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의 향과 열매를 거론하면서 중국은 경제와 문화로 이웃을 대하겠다는 메시지를 함께 던졌기에 노골적인 보복에 나서진 못하겠지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등 뒤가 서늘하다.

    국제 외교에서 영원한 내 편은 없다. 역사가 입증하듯 강대국은 언제든 필요하면 약소국을 집어삼켰다. 약자의 외교는 그래서 예술적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단, 스스로 주인이 되어 주도하는 ‘자주(自主)’가 전제돼야 한다. 휘둘리거나 부화뇌동하거나 특정 상대의 앞잡이가 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 위정자들에게 묻는다. 홍문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분석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중국 당국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할 것인가. 홍문연의 등장 인물들을 지금 한국, 북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6자 중 어느 쪽에 대입해 이해하면 될까. 나랏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이래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춘추시대 정나라 정치가이자 외교가로서 40년 동안 오로지 백성과 나라를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정자산(鄭子産)의 말대로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


    영화 ‘초한지-천하대전’은 오로지 홍문연만을 축으로 초한쟁패를 흥미롭게 다뤘다. 이렇듯 역사적 팩트는 무한한 상상력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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