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가 쏟아내는 말은 돌출 발언이나 실수가 아니다.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고립주의’를 간질인 것이다. 백인 저소득층, 노동자 계급의 밑바닥 민심을 반영한 주장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동맹의 균열은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언제든 불거질 수 있다.
미국 차기 대통령선거 공화당 선두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예비후보가 4월 2일 위스콘신 주 유세에서 한 말이다. 트럼프는 한술 더 떠 “행운을 빌겠다. 당신들, 잘해보라(Good luck. Enjoy yourself, folks)”라며 조롱했다. 그는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군을 동원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북한에 맞서 그들이 자신을 스스로 지키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를 비난하며 핵 무장 용인, 미군 철수 등을 주장해온 트럼프 후보가 미국의 한반도 전쟁 불개입까지 천명한 것이다.
“언제까지 한국 지켜줄 건가”
트럼프의 발언은 6·25전쟁 전의 ‘애치슨 라인’ 선언을 연상케 한다.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미국 극동방위선에서 한반도가 제외된다고 발표하자,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북한의 김일성은 이를 미국의 한반도 전쟁 불개입으로 오판하고 남침을 결심할 수 있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경제적 이유를 들었다. “19조 달러(2경1850조 원)에 달하는 미국의 국가부채가 21조 달러로 늘어나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할 수는 없다.”트럼프가 가장 많이 언급한 한반도 관련 사안은 방위비 분담 문제다. 맨처음은 지난해 7월 23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유세에서다. 그는 “한국은 미국과의 무역을 통해 수십억 달러를 벌어가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면 우리 군대가 해결해줘야 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북한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해줘야 하는가”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해 8월엔 이 주장을 더욱 구체화했다. “나는 그동안 사업을 위해 삼성·LG 등 한국산 TV 4000대를 구입했다”면서 “우리가 미치광이(북한의 김정은을 지칭)와 한국 사이의 경계에 2만8000명의 미군을 두고 있는데 한국은 푼돈(peanut)만 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해 10월 한국계 하버드대 학생 조지프 최가 “한국은 연간 8억6100만 달러의 방위비를 내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미국 주요 언론들이 주한미군에 대한 트럼프의 발언이 틀렸다고 거듭 지적해도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북한 핵 문제 해결 방안으로 애초부터 ‘중국 역할론’을 언급했다.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 열린 TV 토론에서 그는 “중국은 북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만큼, 중국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이 북한 문제로 미국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베이징이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미국과의 무역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중국 역할론 대신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주장하고 나섰다.
고도의 선거전략
트럼프는 3월 25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집권 이후 외교·안보 정책에 관해 말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북한과 중국의 위협에 맞서도록 하기 위해 이들의 자체적인 핵무기 개발을 허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4월 3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선 한·일 핵무장이 동북아의 핵 도미노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에 “이미 핵무기 경쟁 시대”라며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으로 북한의 미치광이에 맞서 스스로 자국을 보호할 수 있다면 미국도 훨씬 편해질 것”이라고 맞섰다.트럼프의 이런 발언들은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고도의 선거 전략일까.
백악관과 국무부는 트럼프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한국과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동북아 정세가 극도로 불안정해질 것”이라면서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장려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미국이 오랫동안 추구하고 국제사회가 지지해온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반박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외교·안보 정책과 핵전략,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정세에 무지한 사람이 백악관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공화 양당 지도자들을 비롯해 각종 싱크탱크의 연구원들까지 나서서 트럼프의 발언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트럼프의 생각 중 많은 부분이 앞뒤가 안 맞고 충격적일 정도로 무식하다”고 대놓고 비판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사설에서 “트럼프는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발언이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잘 아는 듯하다. 자신의 주장이 세계 각국의 핵무기 경쟁을 막아야 한다는 미국 역대 정부의 기존 방침과 상반될 뿐만 아니라 1969년 유엔 총회 결의를 통해 출범한 핵 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도 위배된다는 점을 모를 리 없다.
그는 3월 29일 CNN 인터뷰에서 “이란도 20년 뒤엔 핵무장하게 될 것이다. 중국도 천문학적인 예산을 국방력에 투자하고 있다. 북한의 도발은 차치하고라도 적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미국이 자국 경제를 망쳐가며 한국, 일본, 유럽 등을 모두 혼자서 보호할 이유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언급으로 볼 때 한·일 핵무장 용인 주장은 그에 뒤따를 부정적 반응을 충분히 고려한 것으로, 무지에서 나온 발언이 아닌 게 분명하다. 따라서 고도의 선거 전략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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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도 그는 부친과 달리 크고 화려한 사업을 주로 벌였다. 똑같은 건물을 여러 채 짓는 것보다 웅장하고 화려한 랜드마크 하나를 짓는 게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의 결과물이 트럼프 타워다. ‘뼛속까지 사업가’인 트럼프가 안보 무임승차론을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그동안 주창해온 글로벌 질서 유지나 동맹의 가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부동산 재벌답게 ‘비즈니스 관계’에 따른 손익만을 따지겠다는 것이다.
방위비 분담금을 늘리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는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외교·안보 등 모든 사안을 철저하게 사업가적으로 판단한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전문가인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 카운슬 선임연구원은 “트럼프는 미군의 외국 주둔과 동맹 네트워크 등을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적의 위협 저지, 규범에 기반을 둔 국제 질서 유지 등을 위한 공공재적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단지 돈 문제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실주의적 고립주의
트럼프는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을 ‘미국 고립주의(American Isolationism)’가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고 주장한다. 고립주의는 다른 나라와 동맹도 맺지 않고 다른 나라의 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 정책을 말한다. 미국은 건국 이후 한동안 고립주의로 일관했다. 제1·2차 세계대전 때 나중에 가서 마지못해 참전한 것도 이 같은 고립주의 전통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은 2차 대전 이후 옛 소련과의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개입주의(Interventionism)’로 바뀌었다. 미국은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각국에 군사지원을 해왔고 각종 분쟁에 개입했다.트럼프가 말하는 미국 우선주의는 초강대국 미국의 국제적 역할을 버리고 미국의 이익만 추구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4월 2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대통령에 취임하면 100일 내에 미국이 맺은 모든 무역과 군사조약을 재협상하겠다”고 밝힌 것도 자신의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발언이라 하겠다.
하지만 트럼프의 외교·안보 정책은 ‘현실주의적 고립주의’라고 할 수 있다.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는 것은 반대한다. 트럼프도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사태 등에 미국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다만 트럼프는 미국의 국익이 침해받으면 군사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의 국제기구 지원에도 반대한다. 트럼프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분담금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며 나토가 해체돼도 어쩔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미군의 해외 파병은 극히 예외적이고 제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로선 트럼프가 공화당의 최종 후보가 될지, 대통령에 당선될지 불투명하다. 공화당의 최종 후보가 되더라도 본선 경쟁력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히스패닉계를 비롯해 흑인과 무슬림 등 소수인종들은 이미 트럼프에게 등을 돌리고 있고, 중도층과 무당파도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주요 언론들도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화당 주류는 ‘아웃사이더’(비주류)인 트럼프가 최종 후보가 되는 것에 마뜩잖은 태도를 보인다. 공화당 주류는 대선뿐만 아니라 동시에 치러지는 상·하원 선거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지율 1위’의 含意
트럼프는 4월 5일 위스콘신 주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패하면서 향후 최종 후보로 지명받기 위해 자력으로 대의원 과반(1237명)을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이런 경선 상황을 볼 때 공화당 지도부가 후보 선출에 개입하는 이른바 ‘중재 전당대회’가 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중재 전당대회는 과반의 대의원을 차지하는 후보가 없을 경우 경선에 참가한 후보나 중진들이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들에게 특정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는 방식으로 대통령 후보를 정한다. 따라서 가장 많은 대의원을 확보한 후보가 탈락할 수도 있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를 이런 식으로 배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분명한 것은 트럼프의 주장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장기 경기침체에 분노와 상실감을 품어온 미국 백인 보수층을 자극하면서 “왜 남의 나라 방위까지 챙겨줘야 하느냐”는 속내를 대변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공화당 후보 중 지지율이 여전히 1위라는 건 상당수 미국인이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얼토당토않다고 무시해선 안 된다. 미국 우선주의는 세계 질서뿐만 아니라 한반도 질서에도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